유령의 집
헨리 제임스 지음, 이채윤 옮김 / 데미안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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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나사의 회전]이란 제목의, 헨리 제임스 대표작의 하나이다. 하지만 국내에 [유령의 집]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건 그의 이름과 책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사의 회전] 번역판을 1년 가까이 찾다가 이 제목이 그 책인줄 알았을 때 약간 씁슬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최초의 심리소설로도 혹은 괴기소설로도 해석된다. 심리소설이라 함은 일체의 사건이 가정교사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함이요, 괴기소설이라 함은 진짜 유령이 나오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분명 어느 쪽으로도 무게를 싣지 않고 그 해석을 독자에게 떠넘긴다. 번역한 출판사는 [유령의 집]을 선택했고, 프로이트적 해석을 즐기는 사람들은 가정교사의 억압된 성적 욕구가 유령의 망상으로 나타난 심리소설이라 주장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이 책을 읽어보고자 했다. 그것은 서양소설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돈끼호떼]와의 비교를 통해 재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돈끼호떼와 가정교사, 둘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둘씨네를 지키기 위해 혹은 두 착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명을 가진 존재라고 스스로 규정한다. 한 사람은 기사로서 , 한 사람은 키를 손에 잡은 선장으로서 자신을 정의하며 이 책임을 기꺼이 수행해간다. 그들 이외에 주위의 등장인물의 유사점도 재미있다. 산쵸 빤사와 그로즈 부인. 멀쩡한 정신임에도 주인공들에 동화되어가는 인물, 즉 자기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도리어 주인공의 관점을 강화하고 스스로도 닮아가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망상 탐험은 정교한 구조를 갖추어가며 서로의 대화를 통해 강화되어간다. 끝내 가상적 세계에서 성공치 못한 주인공들, 돈끼호떼는 운반용 우리에 실려 끌려 돌아오고, 가정교사는 쫓겨나서 수기를 쓴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지극히 대립적 상황은 상대하는 적들이다. 정신병적 섬망증은 주위에 존재하는 악을 형상화함에 있어 두 사람에게 다른 경향을 보인다. 풍차와 유령. 돈끼호떼의 적이 외부에 있는 압도적 힘의 대상이며 그래서 그의 책임이 이런 부당한 힘으로 선을 위협하는 적들을 괴멸하고 둘씨네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면, 가정교사에게 악은 훨씬 내재되어 있는 은밀한 것이다. 원한과 악의의 영향력. 보호되어야 하는 아이들은 이런 심리적 정신적 영향으로 인해, 스스로 선택하여 파멸의 길을 가도록 꾀임받고 있다. 그녀가 성공하면 고용주를 [귀찮게 하지 말아야 하는 책임]을 완수하여 칭찬받을 것이다. 이제 풍차의 모습을 한, 날개를 펄럭이던 용은 이 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인간을 위협한다. 우리 내면의 공포와 불안을 죄어오는 나사가 되어, 내면화하여 유령이라는 모습으로 화하는 것이다. 과거 두려움의 대상인 환타지적 요소의 괴물은, 인간 정신이 스스로를 붕괴시키도록 하는 사악함으로 대체된다. 주위를 배회하며, 뽑히지 않고 서서히 죄어가는 나사와도 같이 단단히 우리의 정신을 꿰뚫고 못박아둔다.
 
언제부터 공포의 대상은 동물과 괴물에서 인간의 악의와 원한인, 이기적 만족감에 목마른 혼백의 형태로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하는가? 호랑이가 아닌 귀신이, 용이 아닌 유령이 이제 현대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며 또한 우리자신이기도 하다. 햄릿에게 아버지의 혼백은 호소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지였지 스스로 복수의 실행자는 아니었다. 요새는 다르다. 굳이 왕 출신이 아닌 여고생 귀신도 [스스로] 해치운다. 현재의 인간은 왜 이런 공포의 대상에 공감하며 자기내면의 어떤 실마리를 보려하는가? 아이들조차 공룡은 우스운 놀잇감이지 더 이상 진정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적의는 모두 인간에게 굴복한 때문인가? 이제 적의는 인간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런 악령은 인간이 모여 살며 서로에게서 느끼는 악의가 형상화되는 것이 아닌가? 서로를 먹어치워야만 생존의 질을 보장받는 인간상황은 인간을 점점 불안과 알 수 없는 적의에 둘러싸인 느낌으로 몰아넣고 있다. 때로 이 불안의 형상화인 유령은 우리에게 전할 말이 있는 듯하다. 우리 사이의 원한과 적의를 그치고 이제 편안히 쉬게 해 달라고...우리는 아직 그들을 쉬게 하기에는 다른 사람을 다치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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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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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든 책이다. 처음 읽을 때도 그랬고, 다시 읽어보아도 꾸준히 붙잡고 있는데 어느 정도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는 정경들이나 상황이 내 머리속에 없는 것인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따분해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읽으며 느낀 것은, 내가 경험했던 일이라면 반드시 그의 생각에 공감하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몇권의 소로우가 읽었던 책들을 같이 보았고, 그가 경험한 어려움과 고민을 해 볼 기회를 가졌었다. 몇몇 경험과 책들, 그리고 나이로 인해 와닿는 부분들이 생긴 것일까? 그의 책이 [살아보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만큼 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 생활할수록 더 공감할 부분이 많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나보다 여유있게 더 많이 그 문제를 고민하고 더 깊이 파내려간 때문에 나는 그의 글에 놀란다.
 
그러면 모두 소로우처럼 살아야 할까? 우리집 주위엔 호수는 커녕 연못도 없는데...소로우가 숲 속의 생활을 시작한 까닭은 [자기자신으로 살아있고 싶어서]였다. 소로우도 단지 2년간 이 숲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위한 삶의 태도]이다. 소로우가 좋아한 논어 학이편 끝자락에 [가난하여도 비굴하여지지 않고, 부요하여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은 충분치 않다. 가난하여 즐겁고, 부요하여 남을 올바로 대하길 좋아함이 자기모양대로 더 아름다운 삶이다]라고 했다. 소로우는 적게 먹고 가난하여 즐거움을 알아낸 사람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옥이 있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 옥을 발견하여 갈고 닦아야 한다. 소로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소로우의 생각과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른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긴 모양 안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와 소중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올곳이 살아야한다. 아름다와질 때까지...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소로우처럼 사는 삶이 나에게 진정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돌볼 사람들이 여기 있고 여기서 더 큰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까닭에  여기에 머문다는 의미를 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의미가 있는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가 있는 장소를 의미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면 나의 의미는 사라지고 사육되는 육체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삶에 진정 중요한 것은 영혼이다. 검소하여 많은 시간을 얻으며, 그 시간을 영혼을 위해, 사랑을 위해 써야한다. 마음의 해가 되는 삶의 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도록 중독시키는 텔레비젼, 신문, 인터넷은 절제되어야 한다.
 
그의 삶은 소수자로서의 삶이다. 소수의 견해만이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주류의 삶을 수정할 힘을 갖는다. 나의 삶은 고용되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여유있으면서도 가족, 자연, 생각과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있는 대안에 대해 닫혀있지는 않은지...남을 대할 때 다그치고 드라이브를 걸며 그들의 삶을 빠듯하게 몰아갈 권리가 나에겐 없다는 것을 잊지는 않는지. 아무리 계약이라 하더라도...이 모든 것은 그의 생각에 의해 점검 받고 있다.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보다, 흠이 없이 깨끗하여 즐겨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깊이 있는 생각으로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그는 읽을 때마다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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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보관함에 넣어요.^^

카를 2005-04-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갖고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풀잎 민음사 세계시인선 22
W.휘트먼 / 민음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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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태어나, 어린시절 브루클린으로 이주했으나,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인쇄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그가 시를 써 발표한 최초의 시집인 이 책은 그의 나이 36세인 1855년이었다.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의 삶 자체에 녹아있는 경험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철저히 살아있고 숨쉬는 [자기자신]의 노래인 동시에 [미국에 대한 노래]였다. 당시의 미국은 지구상에 시민들의 힘으로 건설되며 다스려지는 새로운 실험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인류가 돌아가고자하는 자연적 힘을 잃지 않은 대자연이 살아숨쉬는 땅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 땅에 무지랭이로 사는 미국인의 자연적 야성에서 인류의 희망을 발견하려한다. 그는 바로 그들을 노래하고, 그들을 위해 노래하는데 자신의 기쁨, 자신의 의미,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지금의 미국과는 너무 다른 어리고 미숙한 한 나라인 미국의 시절이야기이다.
 
해방을 맞은지 60년, 우리의 시대, 우리의 나라는 어떤 노래로 부를 수 있을까? 수많은 고통과 내부적 다툼을 넘어 이제 우리의 시대는 다시 한번 외부의 위협적 힘들 사이에 끼여있는 위태로운 모습을 보인다.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또다시 55년전의 경험, 100년전의 억울함을 반복할 것인가? 그냥 어떻게 편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없나?  우리를 위해 어차피 투쟁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은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지나갈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당신을 찬미하며 공손하고 길을 비켜주는 사람들의 가르침만 배워왔는가?
        당신을 거슬리고 버티고 업신여기며 앞서가려고 다투는 사람들의
        크나큰 가르침은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휘트먼의 싯귀가 딱 들어맞는 하나로 뭉침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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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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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다름을 용납하는 문화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사회는 아니다. 그래서 다름은 적의 상징이며 다름을 나타내는 것은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에서 학회때 반론이 섞인 질문은 흔히 상대에 대한 약간의 무례의 의미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영미권 사람들과 학술행사를 하다보면 유달리 발표된 내용에 대해 질문과 토론을 좋아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런 토론 자체가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나 관심을 갖고 흥미를 많이 느끼며 활발한 토론은, 발표내용이 소수 의견이고 기존의 의견과 충돌하는 발표일 때이다.  이런 발표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약간 다소 적대적인데 비해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발표와, 혹은 자신의 발표에 대한 반론을 반기는 분위기라는 것이 큰 차이이다. 그들에게 다양한 소수의견은 기존이론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기존이론의 장점을 부각하거나 때론 뒤집을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어릴 적부터의 토론 문화에 깊이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자유론]에선, 영미권도 기본적으로 오랜 과거로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음과 이것이 한 백오십년간의 달라진 그들 문화의 한 부분임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은 기존 통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명 발전의 초석이며 우선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일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분명 기존의 것을 유지하는데 더 익숙하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활력과 발전은 없다는 것이 밀의 주장이다.

주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밀은 더 나아가 그들의 돌출적이기까지한 행동이나 문화라도 용납되어야 할 필요에 대하여 주장한다.  각 개인이 각자가 생긴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다양한 대안과 문화적 선택이 존재할 수 있으며, 도리어 이러한 다양성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과 발전이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생명력이 제한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즐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개인도 사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밀은 순수한 이론적 주장에만 머무는 사람은 아니다.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르 실현할 수 있는지를 돌아본다. 분명 사람이 부딪혀 사는 현실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부가 간섭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한 비교적 균형잡힌 견해를 보여준다. 다른 사람을 침해하거나 명확히 나쁜 영향을 타인이나 혹 자신에게 줄 수 있을 때 그는 이런 자유는 제한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자유라는 목적을 위해 상당부분의 불편을 감래하는 것이 필요함을 빠뜨리지 않는다. 나아가 자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도 정부를 제한할 필요까지를 이야기한다.

[작은 정부]의 구상에 있어서는 소로우와도 통하지만 기본적으로 밀은 국가가 올바로 작동해야 하고 그것이 인간 행복의 필요조건임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모델로 힘과 위엄, 열정과  에너지의 로마를 내세움은 루소와 더 닮은 모습을 보인다.(계약이 사회를 성립시키지는 않는다고 믿지만...) 그는 국가가 필요한 정도에서만 개인에 간섭하고, 개인 각자의 능력을 펼치도록 놓아둔다면 정부는 그 생명력의 원천을 공급 받고 더 건강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정부주도의, 그리고 집단 단일화의 일본문화, 군사문화를 겪은지 얼마 안되는 사회이다. 성취를 위한 일로매진은 우리에게 성공의 경험을 주었고, 계속 이 방법에 머물렀으면 하는 충분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더욱 소중한 목표, 그리고 장기적으론 지속적 인간행복 확보의 조건인, 자유와 개별성, 다양성과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심지어는 보수적 사고와 복고적 흐름도 사회의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만큼 서로에게 열려야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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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민음사 세계시인선 1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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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악의 꽃] 전체 130편 6부 중 20편을 발췌한 시집이다. 권두의 서시를 포함하여 전체 흐름을 위해 6부가 빠뜨리지 않고 포함되어 있으며,  90여편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 [우울과 이상] 중 14편을 나머지 한 부에 한편씩의 시를 싣고 있다.
 
서시인 [독자에게]는 도전적 서문으로, 너희도 알지 않니? 죄악 밖에 없는 인생 그 허접함의 권태란...이런 뉘앙스를 던지고 시작한다. 1부 [알바트로스]에서는, 추락한 영혼을 인식하고 이 땅에 산다는 것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시는 6부 [연인들의 죽음]에서 그들의 불꽃이 사그러드는 자리에, 흐린 거울과 죽은 불길을 되살려주는 은총이 임하리라는 암시로 끝맺는다.
 
보들레르의 시적 예술관, 예술 안에서 영원과의 교감 혹은 절대 자연과의 하나됨을 찾고자한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표현된 시집인 셈이다.  번역임에도 프랑스적 인생의 권태로움에 대한 절망감이 너무도 정제된 시어와 와닿는 표현으로 전달되는 것은 번역자의 보들레르에 대한 이해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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