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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체의 17세기 영어로 쓰여진 이 책은 밀턴의 서문처럼 그리스 비극을 형식을 따르며 동시에 히브리의 삼손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연상시키는 설정 속 24시간의 하루에, 비교적 간단하게 성경에 씌인 사사기의  삼손이야기에서 밀턴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삼손의 심리적 고뇌와 결심,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백성의 승리를 보여준다.
 
어리석은 장사가 아닌 유혹의 피할 수 없는 성격을, 우발적 붕괴사고가 아닌 인간의 약함에 무관한 하나님 의지의 실현을 보여주는, 밀턴의 시각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의식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삶과의 결정적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후회하며 주저앉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은총을 구하여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다. 결국 위대함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약점으로 인해 무너지는 자리에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일어서는 삶임을...
 
부모의 계획은 아들 삼손의 보석이었으며, 드릴라의 최후의 제안은 유혹의 은근함과 거절할 수 없음을 이용한 러브 어페어로 돌아감이었고, 이 상황을 비웃는 적의 장수는 그의 절망적 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하지만 삼손은 다른 확신에 머무른다. 새로운 힘의 재생, 힘 가진 자앞에서도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을 의뢰하는데서 나옴을 그는 끝까지 믿고 그 길을 묵묵히 나아간다. 진정한 용사는 힘의 용사가 아닌 존재 중심에서 그를 도우시는 자를 의뢰하는 자이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아닌, 쓰여지던 젊음의 순간에 이 중심을 가졌다면 그는 얼마나 아름답게 쓰여질 수 있었던 삶인가. 그는 마지막 기회조차 놓칠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지혜는 블레셋으로 내려가는 길을 되돌렸으면 더욱 빛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약함을 너무 잘 아는 나이에 다다르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으랴. 지금이라도 나는 유혹을 끊고 일어나 부족함에도 써 주시는 분 앞에서 인생을 낭비치 않으려고 결심하는 아고니스트인가? 아니면 많은 시간과 되돌아올 기회를 믿으며, 아직도 원수의 수중에서 수수께끼와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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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gmatism
William James 지음 / 대양서적 /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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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란 책은 1906년 로웰협회에서 몇번의 연속 강의한 것을 다음해인 1907년 출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일반인에게 서술하는 형태를 띄고, 또 그 당시 강의 사이에 청중의 반응들에 답하여 강의를 이끌어가는 형식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여기서 프래그머티즘이 아닌 것을 말한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존의 어느형태도 프래그머티즘은 아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오히려 절대주의와 사실주의의 중재자로서 존재한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절대주의적인 진리의 유일성에 대한 독단적 주장도 피하고, 유물적이고 경험론적인 절망적 세계관도 피하는 [현실적]이며 [진행형인 진리관]을 제시하는데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극단적 경험론]이 보여주듯 그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이며 경험론적인 생각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다만 이들 사상이 가진 절망성과 소수주의,배타성을 극복하고 일반인의 [상식]에 맞는 형태로, 또한 기존의 미국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 형태로 제시되도록 다듬어낸다.
 
그의 진리관은 그래서 다수의 인간이 노력하여 이끌어내는, 만드어져가는 진리이다. 다수의 인간이 이 진리의 연합과정을 통해 [평화롭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는 절대주의에 의한 충돌도 상대주의에 의한 공허와 절망도 원치 않는다. 진리란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것을 만들어내는 인간은 신뢰할만큼 상식적 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분명 미국의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사상의 한 흐름과, 현대 과학과 종교, 다문화와 다종교를 묶어내고자하는 미국적 사회통합의 사고에 주요한 철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번역판이라곤 절판된 1978년 사상전집 일부로밖에는 구할 수 없었다. 어떤 뜻이건 미국이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라면 이제 좋은 새번역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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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과 떨림
   쇠얀 키어케고르/ 민음사/ 1991년 4월

 1843년(30세)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시작으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같은 해에 집필된 이 책에는 그래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의 인간구분과, 선택으로서의 믿음의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논의의 대상은 아브라함의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에 대한 이해이며, 논의의 목적은 철학, 특히 헤겔철학이 종교안에 그 의미를 발견하기 보다는 오바해서 엉뚱한대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후에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이라 묘사된 인간의 상태를 그는 [무한한 체념]이라 표현한다. 완전히 수행된 무한한 체념은 그래서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빛을 어설픈 대체물에서 찾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의 상투성에 이미 지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친 그에게 부조리만이 힘이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는 것이 그 부조리함이라면 얼마나 더 슬픈가? 아브라함은 그의 절망을 받아들이고 또 한 존재를 바라보는 가운데 부조리의 힘을 얻는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그로 하여금 체념 다음의 행동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 눈에 비치는 영웅적 행위와, 맘과 따로인 어설픈 자기변호와, 그랬으면하는 공상적 결말을 뛰어넘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이삭을 돌려주실줄 알았고, 자신은 설명 못할 줄 알았고, 그 일이 지난 후 잊게 될 줄 알았다. 죽이려 결단하고 설명하려 노력하고, 잊어지지 않아 고통 받는 인간의 나약함에 비해 그는 믿음의 조상이다. 나에게 이 신앙은 어디에 잠자고 있는가? 나는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더 나아갈 곳이 없는지 찾는다는 면에서 유럽의 16-19세기의 사람들안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찾는 것은 보편성, 즉 설명가능한 우월한 체계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껍데기 안에 나와 공감하는 영혼은 없다. 악마적 영혼도 공감은 가능한 영적 존재이지만, 그런 영혼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선한 영혼의 아버지를 그 체계를 만들때 분명히 집어넣었는데 막상 완성되고 안을 들여다보면 사라져 버리고 없다. 아니면 썩은내 나는시커먼 놈이 들어있거나... 라이프니쯔, 헤겔, 피히테 그들에게서 나는 나자신을 본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에 단단히 붙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 하나님을 나 자신과 관계하여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의 상태를 그럴듯 설명하여 포장만 그럴싸한 보편성 꾸러미로 만들려 들지 말고, 인격적 절대자 앞에 무릎 꿇으라 권한다. [아 아브라함이여! 위대한 이 사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나약함과  재빠른 설명하려 듦과 다른 탑을 쌓고 싶어하는 마음은 그 분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변해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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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현대인.

쟈크 엘룰,  윤종석 역. 도서출판 두레시대. 1993

Prayer and Modern Man, 1970, 1973

두레공동체에서 출간하고 전문 번역가인 윤종석씨가 번역한 엘룰의 1970년 저작이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엘룰이 제시한 기술사회에 대한 대안은 [다른 삶] 그리고 [기도] 였다. 손에 잡히는, 뭔가 왕창모여서 으싸으싸하는 대안에 익숙한 나로서는 오잉~하는 표정을 짓게 만드는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도가 내가 아는 그 기도가 아닌가부지?

그 기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엘룰은 책 머리를 [이 책은 경건서적이 아니다]로 시작하고 있다. 기도는 자연적 기반이나 동기를 갖지 않는다. 종교적 기반도...아니다(!) 언어로서는 설명불가능에 빠진다. 그는 기도해야 할 이유를 계명에서 찾는다. 율법이 아닌 우리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의 계명, 기도는 그 응답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계명에 대한, 즉 말씀에 대한 순종, 자유로운 순종으로 시작된다. 그분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자에게 응답하심을 알고 부르는 믿음위에 기도가 가능하고 기도는 나머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하나님께 가능하게 한다. (말씀, 기도, 믿음이 하나이다)

현대 기술사회, 유기(버려짐)의 시대에서 이 믿음은 극단적 신뢰를 요구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 기도는 전투가 된다. 산만한 마음, 효용가치(하나님은 높은 수준의 소비거리인가?), 소유(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뭐냐?)가 우리 자아 안에서 기도를 불가능케 한다. 종교적 기도의 틀이 혹은 비종교적 탈기도의 틀이 우리 기도를 어리둥절한 것으로 만든다.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은 치열한 전투다. 그래서 차라리 기적이다. 결과를 모르고 기도한다. 결과를 확인할 수 없어도 한다. 내가 기도로 살아있게 되는 것만을 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붙든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아버지로 부른다. 총력전이다. 그분이 없으면 내 존재는 無로 돌아간다. 하나님께 우리 현실에 온전히 가담하라고 부른다. 그 일은 우리의 자기헌신을 요구한다. (여기부터 힘들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기를 걸고하는 기도는 나에게 너는 끝까지 나와 같이 갈 수 있는지 묻는다. 기도는 위험하다.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다. 내가...겁도 없이... 정작 가만있을거면서...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국가의 평안을 위해(국가가 하나님 역할을 않도록), 운명과 어리석음에 처한 사회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앞에 순종하고 충성한다. 기도는 종말의 하나님나라가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들어오게 한다. 기도할때 우리는 이 상대적 현실과 성취될 궁극적 목표 사이에서 깨어있게 된다. 오염될 수 밖에 없는 행동은 기도로만 진정한 행동이 된다. 상대를 상하게 하는 폭력으로 밖에는 행동은 결말지워질 수 없지만, 폭력의 대치물은 기도이외는 없다(얼마나 많이 경험하는 일인가). 이런 미약한 순종(기도)과 그 결과의 행위로 그분은 우리와 역사를 만드시고자 한다. 파스칼의 [숨겨진 말씀]이 드러나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된다. 행동은, 기술은, 애씀은 無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그분의 계획과 의미로 부르신다.

이 책을 읽고 요즘 새벽에 주기도문만해도 눈물이 쏟는다. 눈물에 휩싸여서는 안되겠지만, 그분 향한 내 마른 마음이 녹는 건 사실이다. 아버지시다.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의미를 그분 앞에 느낀다. 한편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기도를 알게 된다. 그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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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1 0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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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서설(1686년)

라이프니츠, 대양서적, 1981년(절판)

총 37절로 이루어진 이 서설은 신에 대한 고찰(1-7절), 실체에 관한 고찰(8-16절), 역학에 대하여(17-22절), 인간오성(23-29절), 인간의지(30-31절), 정신으로서의 종교(32-37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이 아닌 신과 실체 개념에 기초한 형이상학이라 하여 자신의 형이상학을 [새로운 형이상학]이라 한다.

쪼개서 생각하자 신은 절대완전, 완전오성, 완전의지의 존재이며, 실체는 그 안에 속성을 포함하는 우주전체의 표출이다. 후에 그의 저작에서 발견되듯, 개별 실체는 모나드라 불리운다.각 실체는 신의 다양한 시점으로 창조되어있고 상호 관련성은 없다(모나드는 창이 없다) 정신에 있어서의 데모크리토스인 셈이다. 또 그의 이런 사고가 그가 미적분을 만든 원천이기도 하다. 

싸우는거 나빠요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주된 성품은 조화와 화해이다. 당시의 새로운 과학을 너무 유물론적이라 비판하면서도 그는 이 [새로운 과학]을 기존의 아리스텔레스적 스콜라철학과 조화시키려 한다. 당시 動力因으로만 고찰되던 역학을 그는 目的因에 의해 같이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철저한 유물론은 내켜하지 않고, 이신론적 물질론은 친근함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데카르트에겐 약간 적대적이고, 스피노자에겐 우호적이다. 그에게 관념은 철저히 내부적인 것이다. 생득적(이거 로크가 엄청 싫어하지) 실체개념이 우리 안에 있고 오직 神만이 외부에 빛(조명이란 의미밖엔 안되는듯)으로 존재한다. 또한 철학안에서 그는 신교와 구교의 일치점을 찾으려 한다. 사실 신교가 좀더 아퀴나스적이 되면 구교와 좀더 친할 수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아퀴나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가 그에게는 악이 존재하고 행해지지만 신이 이를 선용하여 조화로운 세계로 이끈다는 신의 절대지혜로 설명한다. 인간은 자기 실체(모나드)에 갇혀있고 갈 길이 정해져(예정)있는 존재다.  신만이 예지적인 영혼인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영혼불멸의 이유가 된다. 영혼불멸과 계속되는 기억은 상벌의 근거(심판)이고, 신국에서의 삶의 근거가 된다. 예수는 이 길을 보여준 최고의 스승이다. 많은 신교의 교리가 그의 철학속에 자리매김을 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모나드에 일치시키고 조화시켜나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타락과 구원, 십자가와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이 돌이키시는 믿음의 자리는 철학 밖으로 떠밀린 느낌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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