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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조지 마스든 저, 박용규 역, 생명의 말씀사, 1997. 

  이 책의 원제는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이다. 원제가  의미하듯 이 책은 20세기(1870-1925) 복음주의의 형성 배경에 대한 글이다. 마스덴은 이 책을 통하여 근본주의 운동내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굴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본서가 출간되기까지 근본주의 운동과 근본주의자들은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에  백해 무익한, 소위 소수의 모반자, 반지성주의자, 분리주의자 혹은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반사회주의자로 매도당하며 기독교 주류로부터 소외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미국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아 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존 다비로부터 시작한 세대주의 운동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여러 주류교단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나이애가라 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현대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적하기 위해 프린스턴 출신 목회자들과 세대주의의 전천년주의자들이 연합하게 되었으며, 그 후 근본주의  운동은 상호 영향을 받으며 미국 기독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근본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확히 짚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다른 한 흐름은 19, 20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국한시킴으로서 그 폭이 제한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속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문화의 관점에서 미국 근본주의를 재구성하였다. 즉 근본주의 운동은 단순히 신학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과 근본주의의 관계성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성경의 권위와 상식 실재론과의 상관성은 미국 복음주의 학계 내에서 큰 쟁점이 되어 왔다. 미국 복음주의는 교리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해석과,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성경의 무오성과 교리 자체가 그 철학의 영향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의 가르침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이라는 두 개의 해석이 있는데. 마스덴은 전자에 속한다. 전자는 잭 로저스, 도널드 매킴, 마크 놀, 나단 해치 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미국학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프린스턴 신학자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1881년 처음으로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후자를 대변하는 인물로는 제임스 아이 패커, 프란시스 쉐퍼, 케네스 갠저, 그리슨 아처 등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학자들이 지지하는데, 1979년 시카고 선언을 통하여 이들의 성경관이 집대성되었다.
 
  미국 신학에 미친 상식 실재론을 처음 거론한 것은 예일 대학교의 종교사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이다. 그는 1955년 Church History지에 '스코틀랜드 철학과 미국신학'이라는 글을 통해 미국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그후 플러신학교의 잭 로저스가 그의 제자 도널드 매킴과 함께 '성경의 권위와 해석:역사적 접근'에서 그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고, 1970년 샌딘이 그것을 받아들여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1881년 찰스 하지의 아들 A. A.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관성에 대한 긍정론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것이 본서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의 내용이다.
 
  본서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였듯이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와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 하에 '문화'와 연관지어 미국 근본주의를 해석한다. 본서는 근본주의의 발흥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의 서술이라기보다는 대표성이 현저한 인물, 집단 혹은 사건들을 실례로 선정하여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Ⅰ. 근본주의 이전 
제1부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미국의 기독교가 처한 위기적 상황을 설명하고,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의 근본주의와의 노선문제 그리고 무디의 부흥운동을 다루고 있다.
1.위기에 처한 미국의 복음주의 (1870년대)
대부흥운동과 복음주의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대. 상식철학은 실재에의 과학적 접근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였기에 19세기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상식철학과 경험론은 국가의 도덕질서를 세우는 근간이 되었다. 상식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낙관적 견해는 미국인들의 기질에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미국 개신교의 옛질서는 신앙과 과학과 도덕성과 문명의 상호관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1869년 올리버 웬델 홈즈가 임박한 재난을 예언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이 과학적 표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였다. 1870년대에 복음주의자들이 홈즈의 명제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위협들의 심각성에 관하여 빈번히 논평하였다. 1873년 복음주의 동맹 모임에서 로스웰 히치콕, 암허스트 대학의 학장 스턴스 등은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턴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래로 그리스도의 종교가 그 가장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보다 대중의 마음에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적은 없었다"고 하여 복음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언급을 하였다.
 
또한 프린스턴 뉴저지 대학의 학장 제임스 맥코시가 다윈주의와 성경을 조화시켜 발언한 내용에 대하여(50-) 조지 웰던, 챨스 핫지 등은 양자의 양립이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로체스터 대학의 앤더슨 총장은 진화론을 '입증되지 않은 작업가설'이라고  주장하여 핫지의 입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이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내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 이제 상식철학과 경험론으로 무마되어오던 과학과의 갈등은 성경비평과 진화론 앞에 새로운 설명을 요구받게 되었다.
 
 2. 노선이 갈라지다. (1880-90년대)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에 대한 적어도 형식적인 존경심을, 도덕성, 훌륭한 체통, 질서 등에 대한 깊은 관심과 결합시킨 개신교 중산그룹들, 일명 '빅토리아인들'이 새로운 도시문제, 윤리 사회 노동 정치에 대해 "혁신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목표는 옛질서의 여러측면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되 옛질서의 본질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헨리 워드 비처(1813-1887)는 그 시대 최고의 설교가로서 브루클린 교외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도덕적 모범으로서 덕스러운 부(富)의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온건 자유주의적 인물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전통적 "추상적 교리"를 거부하고 상상력을 따르는 낭만주의적 초월적 시대풍조를 따랐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았다.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의 종교적 자유주의의 몇가지 경향이 여기에서 엿보이는데,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문명의 발전, 특히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과 동일시된다.
둘째, 도덕성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되었으며, 또 사실상 종교의 본질과 동일시된다.
셋째, 초자연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 안에서만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이원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성향과 잘 일치했다. 이제 종교적 목표는 저급한 동물욕망을 극복하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낭만주의의 영향
 
-조나단 블랜차드는 도덕적인 점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하나의 법 체계,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법 체계를 세우시고 인간의 마음을 창조할 때, 이성과 도덕적 감각이 그 법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입각한 블랜차드의 가설이었다. 바른 사고는 바른 삶의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적이기도 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종식 이후 비처와 블랜차드는 미국의 기독교 이해에서 양대 마차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블랜차트 가(家)는 자신들과 성향이 가까운, 죄와 회심 및 거룩한 삶의 근본적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는 부흥운동가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70년대 말 무디의 부흥운동과 교류였다. 블랜차드는 사설에서 후천년주의자들과 전천년주의자들(무디)이 상호 일치할 수 있는 점들을 강조하였다. 비처가와의 동맹이 깨어진 후 블랜차드로 대표되는 복음주의의 한쪽은 점차 기득권을 상실한 자들의 운동이 되어갔다.
 
** 반정립 역시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있다.
 
3. 무디와 새로운 미국 복음주의
무디는 성경의 무오류성과 전천년설을 믿었다. 그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윤리적 강조점과 여러 가지 성결의 가르침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사실상 후대 근본주의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다수가 실제로 20세기에 근본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직접 참여하였다. 하지만 무디는 논쟁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는 실용주의적 행동가였다. 그는 추상적인 자유주의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평화가 널리 퍼져야 한다는 희망하에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그는 말년의 한 설교에서 "사람들은 이 지독한 논쟁에 피곤과 싫증을 느끼고 있다" "그대의 싸움을 중지하고 일하러 나가 단순한 복음을 전하라."라고 하였다.
 
-무디의 제국은 파라처치의 형태로, 교단과의 연결을 최소화한 자유사업체제의 하나의 종교였다. 젊은이의 훈련에 초점이 모아졌으며,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수만의 대학생들의 선교열정을 구현하였다.
 
-무디는 '죄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것을 찾기 위해 모든 사상을 시험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분명하였는데 '3R'이 그의  핵심적 교리를 잘 요약해준다. "죄에 의한 파멸Ruin",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이 그것이다. 그는 쉬운 메시지를 통해 지옥불과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대 미국의 실용주의적 분위기에 맞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참여 등과 같은 문제는 회피하였는데 복음 전도로 향한 그의 최고 관심을 흩뜨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사회적 요망 사항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회심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책임의식 앙양과 도덕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무디는 미국 개인주의의 전성기에 활동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 시대의 일반적 가설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다.
 
무디는 부흥운동진영을 두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중 하나가 죄에 대한 승리를 강조하는 성결교리의 새로운 판이며, 또 하나는 전천년주의이다.이런 "세상이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견해는  그 이전의 구속사역이 미국역사의 영적 도덕적 진보에서 가시화될 것이라는 지배적 전통에서 크게 멀어진 것이다. 근본주의는 항상 배타주의적 호전성과, 성결 및 영혼 구원과 결부된 평화의 정신, 이 양자 사이에서 긴장된 양면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무디의 전통에서는 이 후자의 요소가 그 운동에 지극히 큰 매력을 부여하였다.
 
** 무디는 오히려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적인 노선을 취함.
 
Ⅱ. 연합의 형성
  이 부분에서는 천년왕국 사상과 성결운동, 기독교 근본 진리에 대한 논쟁과 1910년대의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견해들을 다룬다.
 
이 시대와 천년왕국(1890년대)
1. 프롤로그: 부흥운동적 근본주의의 패러독스
- 근본주의는 때로 상호 모순성을 보이기도 한 상이한 전통들과 사상적 동향들이 모자이크처럼 뒤얽혀 있는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한 주된 요소는 기타 온갖 관심사를 영혼구원과 실천적 기독교 신앙의 하위에 두는 현상이었다. 무디가 이 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운 일부 동료들의 입장은 이점에서 현저히 달랐다. 무디는 화해를 깨는 신학적 입장의 표명을 원치 않았다. 무디의 자세는 부흥운동 유산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대입장(루벤 토리)은 지성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사상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본주의 내의 주요한 조직적 세력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는 후대의 근본주의 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후대 근본주의 운동에는, 경건주의 전통의 부흥운동가들과 칼빈주의 전통의 교단적 보수주의자들(특히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던 자들) 사이에 동맹현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 진영 자체 내에도 이 두 전통, 즉 경건주의와 칼빈주의의 완연한 융합 양상이 있었다. 이러한 융합은 대각성 운동에서 처음 기원된 이래 미국 부흥운동의 중요한 양상으로 존재해 왔다. 17세기 청교도 운동은 고도의 지성적 신학을 강렬한 경건과 혼합하고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는 이러한 감정 강조의 경향 이면에 신조의 수호와 대중적 형식과 조직과 전략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토레이, 피어선, 고든, 블랜차드, 어드맨, 스코필드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경건과 신조가 융합되었다.
 
무디는 지성체계보다는 행동을, 권위주의보다 자유를 선호하는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지성적 측면의 토리에 의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의 이해가 미국문화와 관계를 설명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2. 천년왕국론의 두 수정판
  후천년설- 18세기초 영국에서 구체화된 후천년설은, 미국에서 대각성운동 시절에,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촉진되었다. 19세기 초에 많은 미국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사탄 세력의 패배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교황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명백한 사양 상태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문자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통치의 1,260일(게시록 11장) 1860년대에 즈음해 종식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들은 문화적 진보에서 천년왕국의 도래 징후를 찾아내었는데 노예제도와 억압 및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현행의 노력들이 성공할 것을 믿었고 과학과 기술, 학문이 큰 업적을 달성하리라고 예측했다.
 
후천년설의 세속화- 독립전쟁시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대의(大義)의 승리와 미국적 원칙의 승리가 왕국의 표식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국 시민종교가 탄생하면서 영적 소망은 어느 정도 세속화되 민족화되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쟁성 및 민족주의를 안고 있는 문화는 미국적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진보를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미국인이 이런 문화적 진보를 선도할 운명을 안고있다는 신념에 쉽게 도달했다. 자신들이 지닌 기본적인 인식론의 범주를 새로운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에 의해 깊게 변화시켰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남북전쟁이후 점차 후천년적 역사관의 극적인 초자연적 측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인간의 삶과 모든 상호 관계 및 온갖 제도의 지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표현되는 것이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경을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엇으며 진보에 관한 희망이 더 적었다. 그들은 성경이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하고 정확하며 성경의 의미는 명백하고, 가능할 때는 언제나 그 뜻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이 시대에 혹은 인류의 자연적 발전에서 실현되지 않고 전적으로 미래에 존재하며 기원에 있어서 완전히 초자연적이고 이 시대의 역사와는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점이 전천년설과 다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의 전개는 당대의 독특한 역사관을 전개하는 지성적 성향과 19세기의 문화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 등과 맞물려있다. 이 두가지 요인의 집합은 물론 각개 요인으로부터 그 운동의 독특한 점들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천년왕국은 역사철학의 여파와 자기변호적인 과학과의 일치에서 변증적으로 파생되었다.
 
3. 세대주의와 베이컨적 이상
세대주의는 17세기초 객관적인 경험론적 방법의 주창자였던 베이컨적 이상 및 그에 기반을 둔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의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한다. 세대주의자들의 문자주의와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에 대한 부동의 믿음, 성서의 "정확무오"에 대한 믿음 등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전제하에 주장된다. 이런 전제들은 보다 경험론적 성향의 성결교 전통이나 대중적이며 분파적이며 구어체 지향적인 오순절주의와 구별시켜준다. 이런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해석체계라는 것은 신학교가 아닌 소규모 성경연구그룹의 개인적 수준에서 근본주의가 발전하도록 하였다.세대주의와 결부된 지성적 경향은 근본주의에 특유의 색채를 부여하였다.
 
** 결국 과학과의 조화 혹은 일관성을 위해 성경무오설이 등장했다는 주장.
 
4. 역사, 사회 그리고 교회 
역사
-세대주의자들이 인간을 거대한 우주적 투쟁(그리스도의 군대와 사탄의 앞잡이 간의)의 한 일원으로 보는 역사관은 19세기 중엽의 다윈과 마르크스의 사상, 지질학적 대격변주기등의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지질학적 대격변주기와 동일한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세대주의에 의하면, "무죄"시대는 에덴에서의 타락과 함께, "양심"의 시대는 대홍수와 함께 끝났으며 "인간통치"시대는 바벨에서 와해되었으며, "약속"의 시대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 종지부를 찍었다. "율법"시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최후를 맞았다. "은혜"시대는 대환난으로 종료된다. 천년 왕국 시대조차도 사탄이 "잠깐 놓임"(계 20:3)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사회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진보의 여지가 없는 비관주의에 머문다. 세대주의자들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문제들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문명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에 대한 환멸을 반영하는 당시의 비관적 양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대두에 기여했다.
 
교회
-종말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천년주의자들은 선교 운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교도 민족이 곧 회심하리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미국교회의 현상태보다 선교의 전망에 더 실망했다. 그들이 교회의 쇠퇴가 불가피하다는 부정적 입장이면서도 자교단으로부터의 분리를 자기 신조의 필연적 결과로 보지 않은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종교를 일차적으로 제도적 차원보다는 개인의 차원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영적 단위는 개인이었다.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 의해 연합된, 성화된 개인들의 집합체로 존재하였으며 부차적으로는 특정목적을 가진 영적 존재들의 네트워크로만 존재하였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세상과 문화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다만 "개인이 어떻게 영적으로 분리된 승리의 삶을 사느냐"에 대하여 가르쳤다.
 
** 미국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개인중심의 신앙의 파생물로서 교제권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성결운동
1. 승리하는 삶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근본주의'등으로 불리게 된 종교 운동들은 1870-1890년 성령에 관한 관심의 고조가 미국 복음주의를 휩쓸던 때에 등장하였다. 성결운동은 근본적으로 감리교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성결 교리의 다수 작가들이 칼빈주의적 성향을 지닌 전도자들과 성경교사들이었다. 무디의 조력자들은 성령사역을 이끌었고 칼빈주의적 전도자들 및 성경교사들의 성결교회와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성결교리는, 현 시대가 성령 부음의 시대이며, 성령부음의 시대는 사도행전의 첫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상에 기초를 둔다. 세대주의의 핵심적 가르침-즉 교회시대가 독특한 성령 시대라는 이론-도 역시 바로 그 점을 비중을 두고 있었다. 성결파 가르침은 웨슬리의 감리교는 물론 이전의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사실상 세대주의의 수용을 위해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미국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웨슬리 전통 내지 감리교 전통은 말과 행위로 증명되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증거는 이성과 과학에 입각한 성경 권위의 변호와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측 성결 운동의 주창자들과 나중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접어두고 체험을 중점적으로 역설한 반면, 세대주의적 성결파 교사들은 둘 다 강조하고자 하였다.
 
감리교측 성결파 전통과 개혁주의 성결파 교리를 접속시키고 있던 것은, 18세기 요한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웨슬리는 성경이 인간에게 "완전하라"고 명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였다. 성경이 명하였으니 이 상태는 반드시 도달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반면 개혁주의 및 청교도들은 금생에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충돌되던 양자의 견해는 19세기 전반 미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시에 하나로 종합되었다. 챨스 피니는 양자를 종합하였으며 1840년까지도 감리교의 성결에 관한 가르침과 아주 흡사한 것을 개혁주의에 소개하였다. 피니와 그의 동료들, 특히 에이서 메이헌(Asa Mahan)은 완전주의의 수정판인 오벌린 신학을 발전시켰다.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중생을 넘어 성령의 특별 사역이 의지를 완전히 압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인간의 자유로운 중개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권능에 대한 완전한 의존성을 둘 다 인정하는 개념의, 이러한 특별 사역이 있을 경우, "금생에서 완전한 성화가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40년부터 1870년까지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피니가 감리교도들에게는 푀베 팔머(Phoebe Palmer)가 영향을 주었다. 팔머부인은 뉴욕시에서 "화요 모임"을 통해 성결의 갱신을 촉진시켰다. 성경 연구와 기도, 찬양, 개인적 간증을 위한 크고 작은 규모의 그러한 집회는 성결을 부각시키고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확산시키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팔머부인의 사역은 1867년 '성결운동 촉진을 위한 전국 캠프 집회 협의회'(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팔머의 가르침의 핵심은 거룩한 헌신 행위에 의해 획득된다는 극적인 제2의 축복이었다. 이 헌신행위는 "제단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는 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관건은 믿음의 행위였다. "당신이 성화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화된다" 그 결과는 바로 지금 모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현재적 순결화(성화)였다.
 
  19세기 말 이 체험은 "성령세례"로 널리 묘사되었다. 남북전쟁 이전 웨슬리안 감리교와 자유감리교회가 창건되었고 1865년 윌리엄 부스는 동부 런던에서 "기독교 선교회"(1880년에 구세군으로 됨)를 조직하였고 1880년 하나님의 교회(인디애나 주 , 앤더슨)가 창립되어 성결파 교리를 가르쳤다. 주로 캠프 집회운동으로부터 분열해 나와 결국에 가서 나사렛파나 필그림 성결교회 등을 형성했다. 한편 개혁주의 전통 내의 복음주의자들도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858년의 부흥운동은 성결파 가르침을 특색으로 하는 소규모 기도모임을 낳았다.
 
1870년경에는 미국 개신교 부흥운동 어느 곳에서나 성결파의 사상이 퍼져잇엇다. 1873년에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에서 초기 무디 부흥운동 시기에 등장한 피어솔, 한나 스미스, 윌리엄 보드먼의 성경 연구와 성결운동 집회가 열렸다. 이듬해에 보다 큰 대회로 발전하였고 1875년에 케직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District)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였다. 영국 국교회 성직자 웨브 피플로(H. W. Webb-Peploe)가 근 50년간 케직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금생에서 죄악된 본성이 근절될 수 있다고 믿은 감리교 유형의 완전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런 생각은 결국 그리스도보다 자아를 신뢰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금생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본성의 원초적 부패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죄로 얼룩져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케직의 생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170-172쪽을 참고할 것).
 
  1870년대 중반 이후 케직형태로 수정된 성결파의 가르침은 미국으로 돌아가 무디의 사역과 연결되었다. 1871년 무디는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의 체험은 "바로 그 기쁨의 현장에서 자신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케직의 가르침은 무디가 영국에 있는동안 발생했고 교리적 논쟁을 피하고 실천적 경건과 봉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디의 사역과 흡사하였다. 무디는 케직의 견해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와 매우 유사한 견해들을 가르쳤다. 케직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디의 조력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이슈는 "봉사를 위한 권능"이라는 실천적 개념이었다. 특히 증언을 위한 권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종말론, 성령세례, 케직, 성결운동 1980년대 제자훈련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들이었다.
 
2.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
세대주의와 케직에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아더 피어선은 구제선교, 시 복음화, 고아사업, 대학생과 청소년 운동, 여성 사역, 성경학교, 온갖 종류의 선교, 극빈자들 사이에서의 복음전파, 교회 연합을 위한 노력, 의료선교, 신유 기도와 영적 삶의 증진 등을 비롯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류애적, 선교적, 영적 운동들"을 논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었다. 1894년에 개최된 브루클린 대회는 "삶과 봉사에 있어서의 성령"이란 주제를 내걸어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시대의 전천년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특정한 성결파 교리를 수용했든 하지 않았든,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성화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강력한 도덕적 추진력을 제공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열성을 보완하였다. "사회사업 조직을 갖춘 제도적 교회"형태(성공회 스티븐 팅 부자의 홀리 트리니티 성공회 교회: 빈민구제에 힘을 기울였고 뉴욕의 빈민들을 위해 교회의 일년 수입을 제공)는 개신교도들이 복음 전파와 사회사업 및 공동체 봉사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심프슨(A. B. Simpson)은 1880년대에 도시빈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독교 및 선교 동맹을 창립하였다. 동 시기에 들어온 구세군도 도시의 소외 계층을 위해 유사한 사역을 실시하였다. 1880년대에 이들 조직체들은 다수의 구조 선교회,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 구제 프로그램들을 세우고, 이민자들 중에서 일하며, 빈민들에게 직업을 구해 주었다. 복음 전파가 언제나 그들의 중심 목표였으나 사회 사업과 복음전도 사업이 병행하였다.
 
** 빈민과 연관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반작용과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이 사회에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실천적 성찰이 일어났다.
 
3. 대반전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 시기 모든 진보적인 사회 사업은 정치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흥운동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우 작은 역할로 좌천되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 칼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경건주의적 견해로 변천한 과정이 변화의 요인을 제공하였다. 즉 칼빈주의 전통은 정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보시키기 위한 의의 깊은 수단이라고 보았던 반면 경건주의적 견해는 정치적 행동을, 악을 억제하는 수단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성결파 운동의 발흥은 율법의 시대의 종말과 성령시대의 도래를 통해 세대주의적으로 복음을 사적 차원에서 보도록 규정하였다.
 
대반전의 제2차 단계는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이다. 이 시기에 세대주의 혹은 성결파적 교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공공복지를 위한 사업에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을 꺼렸지만 모든 사회적 활동과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적 요인과 함께 대 반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요인도 작용하였다. 무디 시대로부터 1920년대 근본주의 논쟁을 통과하기까지 이 부흥운동적 복음주의 운동의 지지권은 주로 개신교 백인 중류 계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요인은 불충분한 설명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1900년 이후 일어난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에 대한 근본주의의 반응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사회적 기독교'가 자유주의와 철저히 동일시되어 가고 있었으며 많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무엇이든 사회복음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적인 혹은 사적인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그리스도의 중생 사역의 보완적 부산물로 이해하였다. 죄에 대한 회개 이후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사회복음은 정치적 문제에만 비중을 두었다. 월터 라우센부시는 '하나님이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것"은 "종교적 윤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신앙의 선언 및 신학적 교리는 도덕적 행위 특히 사회적 행위의 자극요인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태도와는 반대로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진리가 실용주의적 테스트에 의해서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은 행위에 대해서만큼 신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사회 복음이 사회적 관심사를 배타주의적인 방식으로 강조한 것은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위험 요소로 보였다. 그들은 사회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 획득되는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의 의의를 잠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이 가열되면서 부흥운동과 사회복음을 둘 다 견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은 점차 방어하기가 곤란해졌다.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중산층의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대한 갈망이 일단의 견해에 고착된 상태로 머물러, 반자유적이며 동시에 비사회참여적인 형태로 동결되었다.
 
4. 성결운동과 근본주의(1900-1910년대)
- 1899년 무디 사후에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세대주의 운동은 휴거가 '대환란'이전에 일어나느냐 이후에 일어나느냐를 놓고 양분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찰스 파햄과 시모어의 오순절 운동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감리교의 성결파적 견해, 즉 죄악된 본성이 근절되는 완전 성화의 '제2축복' 후에는 제3의 축복, 즉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가 온다고 주장했다.
 
무디성경학교와 성결파 교리의 저술가 힐스와의 논쟁은 곧 감리교측 성결파와 케직교사간의 반목으로 이어졌다.케직은 완전한 성결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장로교 정통주의에서는 케직이 서로 모순되는 캘빈과 알미니우스를 동시에 붙잡으려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체험, "간증"을 중요시하는 것이 미국의 부흥신학이다.
 
케직의 가르침은 성경학교 운동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보완해 주는, 최소한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케직의 가르침은 신앙에 대한 중요한 주관적 확증을 제공해줌으로써, 이것을 성경과 상식으로부터 나온 객관적인 논증과 병행될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전천년주의는 사회 전반에 대한 성령의 정복적 권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이런 평가를 포기하는 입장이었으나, 케직은 개인적 "승리"를 약속해 주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개신교의 지배요소는 그래서 개인적 경건, 낙관주의, 행동주의이고 이것은 논쟁을 유발시키는 특징을 수반하고 있었다.
 
** 케직은 근본주의적 비관주의와 계몽적 미국 낙관주의, 성결파적 체험 중심주의와 장로교적 이성중심주의의 변증적 도출이었다.

신앙의 변호(1870-1910년대)
  1. 논쟁의 소용돌이
-세대주의와 성결교리가 발생한 사회적 원인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국부적 원인을 따져볼 때, 양자가 문화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두 운동은 어느 것도 근본주의와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 당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던 근본주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를 보태주었다. 이들을 그 자체로서 근본주의의 일부가 되도록 만든 것은, 명백했던 세속화의 한 측면, 즉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반발이었다.
 
  1870년대 후기부터 주요 교단 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이 있어왔다. 현대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성결운동가들이 근본주의와 손을 잡았다. 여러 교단에서 아주 강렬하게 토론된 것들은 성경의 권위,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 혹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초자연적 요소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교단들의 독특한 교리들이나 전통들을 놓고 그와 유사한,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다. 예컨대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는 엄격한 칼빈주의, 침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침례가 그런 논점이었다. 거의 모든 교단이 그러한 모종의 이슈로 싸움을 겪었다.
 
  남북전쟁기 남부의 신학은 강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신학적 보수주의는 후대의 근본주의를 닮은 많은 특징들을 창출해 놓았다. 여러 중요한 근본주의 지도자들이 남부출신이었다.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철학 및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남부의 사고는, 성경은 다윈의 가설같은 사변적 가설들과 반립하는 엄연한 진실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극히 존중하도록 자극하였다. 남부에서 현대주의는 발을 붙힐 수가 없었다.
 
  남부가 보수적 견해로 정리되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부에서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들을 부추긴 문화적 변화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였으므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북감리교와 미국 성공회는 최초 이런 현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교수를 퇴임시켰으나 1908년 송사 이후 이런 공판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지역적 자율성이 한층 더 많이 보장되었던 침례교는 다양성도 한층 더 크게 발전하는 가운데 주요 파당들, 즉 교단적 전통주의자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 공공연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고백주의적 칼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뉴잉글랜드 침례교회) 교리적 자유를 강력히 역설하였다. 비교적 개방적인 이런 분위기에서 성경 비평과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이 북미주 연합의 침례교 가운데에서 일찍 출현하였다(그 실례는 235-237을 참조할 것). 침례교 내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견해들은 서로에 대한 관용과 공개토론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보수주의의 조화와 협력과 행동주의 정신 그리고 대다수 평신도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2. 장로교와 진리
  북장로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장로교인들은 개교회주의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교권적 치리회를 두고 있었기에 신학적 차이점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로교 보수파는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유산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고도로 명료하고 극도로 신학적인 종교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1729년 이 신조가 채택된 이후 이들은 이것들에 대한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을 형성하는데 역시 일익을 담당하였던 뉴잉글랜드와 영국 청교도 전통 출신 장로교인들은 신조에 대한 보다 폭넓은 해석을 주장했다. 이들은 부흥운동과 관련을 맺었다. 부흥운동은 19세기 초엽과 중엽 신 학파(New School)운동에서, 보다 융통성 있는 칼빈주의의 변형판을 가져왔다. 펜실베니아, 프린스턴 신학교, 남부에서는 그 세가 강했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구학파(Old School)는 뜨거운 경건주의적 혈통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교리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성경이 내포한 교리체계를,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사실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프린스턴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논쟁과정은 247-264을 참고할 것).
 
상식철학의 난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 도덕적 일탈의 현실이었다. 워필드는 이를 화란의 바빙크와 카이퍼의 견해를 참조하여 제1원리에 대한 편향적 시각으로 인해 이런 오류들에 매몰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1890년대 장로교의 방어전략-교권적 조처와 소수근본교리의 방어에 전념-은 근본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근본주의 5개 조항"은 1910년 장로교 5개항을 따른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육체적 부활, 기적의 진정성. 장로교와 근본주의의 연합은  1903년 결성된 Bible league of north america를 중심으로한 잡지 Bible champion을 통해서였다.
 
3. 근본 진리들
"The Fundermentals"(1910-1915)紙는 현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상징한다.고등비평의 문제점 지적과 이단 주의의 논박, 복음설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전천년설이나진화론에 대해서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1910년경의 네가지 견해
1. 이 시대를 정죄함 ; 극단적 전천년주의의 입장
- 전천년주의의 문화적 비관론은 Our Hope의 편집자인 아르노 게벨라인, 1910년 '시대의 표적'을 저술한 뉴욕시 제일침례교회의 목사 아작 핼디먼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핼디먼은 기근, 지진, 역병, 전쟁 혹은 군사력 증강 등은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한편 기업가의 새로운 부(富)는 시대적 종말을 보여주는 특징들이고 유럽도시들의 상업적 유대관계와 교류는 바벨론의 문자적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대부분의 개혁을 점증하는 사회주의의 위협과 연결지었다. 그는 이 사회주의를 무정부주의와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개혁이 연상시켜준 것은 "무법"의 확산에 대한 예언이었다. 민주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핼디먼이 근본적으로 반세상적으로 극단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으며 북침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게벨라인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세상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1899년 감리교로부터 분리해 나왔고, 1914년의 예언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부르심은 분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분리는 반세대 후 근본주의 싸움의 패배시 근본주의의 표상이 되었다.
 
  2. 중도적 입장의 긴장상태
- 1914년에 미니애폴리스 중심가의 한 교회 목사였던 라일리는 "의미심장한 시대의 표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핼디먼과 게벨라인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수의 지도적인 전천년주의자들처럼 라일리의 배경에는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식 사회개혁이 결합되어 있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이러한 결합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활기찬 도시 목회의 건설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사회 개혁을 주창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도시로 부름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도시의 죄뿐만 아니라 도시의 고통도 보아야 하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에 맞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하며 자본가에 맞서 정직한 노동자 편에 서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야 하며 시의 공직에 개혁자들을 선출하고 도시의 모든 악덕을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는 특별히 도시 개혁의 임무를 위탁받았다"고 역설하였다.

1910년 이후 이런 견해는 약화되고 복음전도가 최우선으로 주창되었지만 여전히 낙관주의적이고 사회 개혁주의적이었다. 성경학교 특히 무디성경학교는 이런 생각을 대표하며 사회적 신조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유지했다.
 
 3.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기독교 문명의 보존
- 브라이언은 문명에 있어서의 성경과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특히 금주와 평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기독교적 경건의 이상들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미국의 국가적 이상들과 병행하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상식적인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신적인 법 안에 계시되어 있었다. 평화와 세계적 조화의 희망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북 전쟁이후 다소 손상을 입었던, 복음주의 유산 안의 낙관주의적 기질에 속한 것이었다. 그의 사고 안에는 신적인 법에 대한 믿음과 미국이 도덕적으로 세계를 선도할 운명에 있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일단 진리를 보고 이해하기만 하면 즉각 전심으로 그 진리를 수용케 된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끈질긴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기독교 정신은 1911년 위노나대회(297-298)의 정신과 유사하였다. 양자는 각각 전통적 기독교를 보존하려는 열망과, 견해가 다른 이들과 기꺼이 협력하려는 자세 및 실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강조를 동시에 표출하였다. 이런 요소들은 그 시대 보수 복음주의 대부분에 전형적인 것들이었다.기독교는 문명을 진보시킨다는 믿음이다.
 
 4. 말씀으로 문화를 변화시킴
- 구학파 전통의 후예들은 문명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이 세대에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그 관심의 가장 강한 표출 가운데 하나가 워필드의 후천년주의에서 출현하였다. 그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가 단순히 전쟁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러 나오신다"고 생각했다. 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전 온 세계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교회의 영적 '황금시대'가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 발전에 관해 워필드보다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메이첸은 19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개강식 강론에서 "문화와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교회의 거대한 위기가 주로 지성적 영역에 놓여있다.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지성적 풍토에 기인한다. 싸움의 열쇠는 대학에 있다. 문화적 위기는 지성적 위기에 근거하므로, 문화를 회피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메이첸의 관심은 문화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술과 과학을 파괴하고 거기에 무관심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의 열성을 다해 그것들을 장려하도록 하자. 그러나 동시에 우리 하나님 섬김에 그것들을 거룩히 바치도록 하자"고 하였으며, 기독교는 "단지 모든 족속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상 속에도 깊이 침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간의 차이를 지우거나 혹은 반면에 세상에서 물러나 일종의 현대화된 지성적 수도 생활 속으로 은둔하는 대신,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즐거이,열정적으로 나아가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이었다. 개혁주의 전통은 메이첸이 표현한대로 모든 문화를 하나님 섬김에 거룩히 바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자 장기적인 실제적 요망 사항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 넓은 마음과 인도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무디성경학교, 브라이언, 선데이와도 함께 했다.
 
Ⅲ. 위기시대:1917-1925
1. 제1차대전,전천년설,미국근본주의: 1917-1918
   제1차대전 초기 평화주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인하던 전천년주의는, 전쟁을 통해 미국에 대한 충성은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을 옹호하는 의무라는 견해로 급변한다. 공격하는 편에 섰을 때, 혹은 평화기에는 평화주의자이던 그들이 수비하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반정치적이던 근본주의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무렵은 미국의 기독교 문명 옹호를 주요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을 만큼 애국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 지성적 기반은 메마르기 쉬우나(유연성 없이) 감성적 기반은 어떤 경험에 의해 너무 다른 입장으로 급변할 수 있다.
 
2. 근본주의와 문화적 위기:1919-1920
     전쟁직후 위기의식은 도덕적 토대의 붕괴와 볼셰비키 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급속히 복음전도와 기도, 대망사상보다 퇴보적 경향의 저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교리적인 것이었다. 즉 반민주주의적 진화론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전쟁의 영향이 근본주의 운동에 새 문화적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사회위기의식은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 지도자, 도덕적 개혁가를 전면에 부상시켰다. (윌리암 라일리) 이러한 애국과 복음전도와 성경주의의 상호결합 위에 복음주의 진영의 재결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전천년주의의 악덕에 대한 공격은 청굗 전통이 도덕적으로 억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대중의 관념과 근본주의를 하나로 얽어매는데 일조하였다.
** 전쟁의 승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역할에 기독교적 소명감을 부여케 하였다.
 
3. 근본주의의 양면공세:1920-1921
   교회에서의 전통신앙교리를 부인하는 자들과의 투쟁, 미국문화에서 반진화론 투쟁을 개시하였다. 자유주의적 초교파 세계운동의 저지와 침례교내 신조의 채택, 선교사업을 통한 연대의 강화가 나타났고, 반진화론 이슈는 전천년주의와 교단적 근본주의의 중심인 북부에서 남부까지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 승리에서 온 현대주의를 미국에서 몰아내야한다는 투지와 문제의 핵심을 현대신학과 진화론으로 파악하는 판단이 어울어진 행동이 나타난다. 승리는 때로 자기자리를 떠나게 한다.
 
4. 자유주의자들은 각 교단에서 밀려날 것인가:1922-1923
   해리 에머슨 파스딕의 1922년 설교를 통해 침례교는 근본주의자의 분리로, 장로교는 자유주의의 패퇴로 막을 내렸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로 인식하도록 했다.
 
5. 공세의 차단과 분열:1924-1925
 매슈스는 이에 대해 "현대주의의 신앙"에서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이해하고 이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적용하는데 있어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현대주의라고 정의한다. 이의 기본전제는 개념이나 믿음이라는 것이 외적 실체의 거울이 아닌 진화론적 문화적 발달로 형성된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래서 하나님이 된 인간 안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완벽한 도덕적 삶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보의 법칙이며 인간사회가 안전하게 세워질수있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 무렵 승리는 근본주의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교단의 분열로 몰아가는 근본주의 급진파에 온건한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급격한 분리주의자들의 쇠퇴와 입지의 약화를 가져왔다. 교리적 순결의 보존과 복음전파의 진척에는 뜻을 같이한 양세력이 분리문제에서 갈라짐으로써 이 운동의 사멸을 자초한다.
 
6. 에필로그:전위,재배치,재기: 1925-1940
  1925년 진화론 교사에 대한 테네시 데이턴 재판에서 제닝스 브라이언이 클래런스 대로에게 당한 반대심문과 조롱은 여론을 급속히 근본주의에 적대적으로 돌변시켰다. 이때부터 대중에게 근본주의는 농촌적, 전근대적, 몽매주의의 동일어로 비취게 된다.
 
이 후 근본주의자들의 스캔들은 이런 여론의 악화를 더욱 가중시키고, 편집증적 문체는 대중과의 격리를 심화시켰다.모든 교파에서 스스로 혹은 결의에 의해 밀려난 근본주의자들은 따로 신학교와 교단을 만들게 된다. 1930년대 이후 이제 근본주의는 이들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대주의자들과, 교단내 잔류한 세력, 이런 흐름에 이끌려 새롭게 들어오는 독립적인 성결교, 오순절파 그리고 이민교단에 의해 다시 재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이런 새로운 포스트근본주의 연합체는 복음주의로 다시 불리우며 비록 복음주의적 하위문화가 "근본주의"를 의미상 지나치게 배격하지만 이 말은 근본주의의 가장 큰 투쟁(교리의 수호와 현대사상의 비판)의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단어로 남아있다.
 
 IV.  해석
 
  1. 사회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문화위기에 대한 배타성과 신조의 강조)
 근본주의는 종교적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에 뒤이은 문화적 위기의식이 이 운동을 중요한 여러 방향으로 모양짓고 수정하였다. 급진적인 성결운동 및 오순절 집단과는 달리 근본주의는 사회의 변두리에만 존재하기 힘들었다. 근본주의는 일부 부유 계급과  일부 빈곤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그 포부와 이상이 본질적으로 중산층 빅토리아풍이었던, "존경할 만한" 개신교 및 북유럽 노동자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 모든 종교 집단은 특정 사회 기반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진다. 사회적 요인들은 종교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또 이것들은 명백하게 확립된 투철한 신앙 이외의 일반적 종교 행동을 예측하게 해주는 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근본주의 체험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진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다른 인종 집단의 이민 체험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제공했다. 근본주의의 지도층은 주로 앵글로 색슨 집단에서 나왔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와 터전을 잡는 이민의 직접체험은 없었지만 그들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다. "국내 이주자들"인 이들은 무수한 경쟁적 이상들을 가진 문화에 직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 응집력을 가지고 개인적인 투철한 신앙과 신조에 큰 강조점을 둔 현상이다.
 
  2.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미국적 정치화)
 정치가 아닌 신앙과 신학이 근본주의자들의 전반적 시각형성에 있어서 수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적 체험은 이차적 문제 특히 정치관의 형성과 많은 관계가 있었다. 진보적인 정서의 소멸은 자유주의의 사회 복음 지지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관련된 복합적  현상이었다. 그들은 현대주의와 진화론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가졌고 때로는 반유대적 정서조차도 여기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이 자라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국가여야 한다는 후천년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조직적인 정치사상은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주의자들은 보수적이고 공화적인 색채를 가졌다. 1차대전 이후 정치화는 우연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표류하여 보수로 밀려갔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선입관과 상투적 신조에 입각하여 이슈들에 우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역사관의 구도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연계된 사회주의, 진화론, 유대주의는 투쟁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이 투쟁은 신학과 교회를 넘어 학교로까지 확대되었다.
 
  3. 지성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상식철학적 과학이해)
 근본주의는 진정한 과학은 사실에 입각하지만 진화론은 단순한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일단의 박약하고 사변적인 가설들을 선호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배제하는 세계관은 아주 불합리하고 그 결과가 참담한 것이었다. 이것은 베이컨적 과학적 사고의 모델과 인식을 해석과정으로 보고자하던 칸트 이후 철학적 전통과의 패러다임의 충돌이 빚은 현상이다.양측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근본주의의 연합 또한 이런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전제가 잇어 가능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최우선적인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진리는 불변하고 진정한 과학과 양식에 의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들은 성서의 사건을 사실로 인정하여 과학적 증명과 과학에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앙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체의 기독교 신앙을, 진리와 도덕에 대한 19세기의 특정 미국적 사상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미국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만큼 뚜렷하고 침투적인 역할을 한 곳은 거의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적 요인들
미국의 인종적, 교단적 다양성은, 새로운 지역적 다양성까지 가세해, 새로운 사상에 대한 수용 혹은 불용과 관련하여 독특한 경향을 창출하였다.영국은 안정적 사회에 오래된 의사전달의 통로가 잇엇고 지방교구까지 대학의 이슈가 잘 전달되었으나 미국은 이런 차이가 투쟁을 야기했다. 또한, 가치기준 형성에 주도적이었던 미국 복음주의의 TRANSPOSITION은 더욱 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종교문화적 전통
저항없는 부흥운동을 가졌던 전통은 부흥운동에 의해 촉진된 성경주의와 초대교회주의를 형성했다. 성경주의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부흥운동으로 고무되었다. 근본주의는 초자연과 자연의 엄정한 차별을 두었다. 이는 부흥운동의 일반적 추진력이 구원받은 자와 잃어버린자 간의 반정립에 대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음과 관계있다.  따라서 자연과 초자연의 반정립이 아닌 종합에 기초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과학적 자연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주제들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다. 다윈설과 고등 비평은 둘 다 자연적 발전 과정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부흥운동의 인식적 기초에는 용납될 수 없는것이었다.
 
  또한 오랜 칼빈주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은 엄밀히 공식화된 종교적 진리의 진술에 대한 지성적 동의를 요구하였다. 근본주의에는 미국의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에 이미 강력히 자리잡고 있던 교리적 경향을 강조하는 특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성적 경향
영국이 전통의 점진적 발전에 뿌리깊은 인식이 존재한 반면 미국은 합리적 규정,새출발,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했다.이는 역사의 진화적 발전과 현재의 과거의 산물로 이해하는 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혹은 적어도 섭리적인 개입을 당연시하는 성경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해석해 온 미국의 체험은 역사를 성경의 렌즈를 통해 관찰함으로써 성경을 역사의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고등 비평 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짧은 역사에 기인하여, 과거와의 연속성보다는 새로움과 미래를 향한 전진을 강조한 경향은 세대주의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다.
 
18세기중엽의 사고를 넘지 못하던 미국은 낭만주의의 도입도, 이에 따른 과학의 제2혁명(?) 즉 고정법칙이 아닌 변화과정의 분석의 이해로의 이행도 늦었다. 다양한 인종성은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기보다 퇴행적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이런 경향은 다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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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that day he knew very well what he was doing,
my Son who loved them so much.
Who lived among them,
who was like one of them.
Who went about like them,
who spoke like them,
who lived like them.
Who suffered like them, who died like them...

He knew very well what he was doing on that day,my Son who loves them so much.
When he put that barrier between them and me,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those three or four words.
That barrier which my anger and perhaps my justice will never pass...


Those three or four words
which advance like a strong prow in front of a weak ship,
And which cleave the wave of my anger.
And when the prow has passed,
the ship passes and all the fleet behind it...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My Son knew just how to set about it,
To bind the arms of my justice and to loose the arms of my mercy.
And nowadays I must judge them like a father...

That is what my Son told them.
My Son yielded up to them the secret of Judgement itself...

In the same way that the wake of a great ship goes on widening till it disappears and is lost,
But begins with a point which is the point of the ship itself,
So the immense wake of sinners widens till it disappears and is lost.
But begins with a point and it is the point which comes towards me, which is turned towards me.
It begins with a point which is the point of the ship itself.


And the ship is my own Son,
loaded with all the sins of the world.
And the point of the ship is the point of my Son’s hands joined in supplication...
And that point is the three or four words;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And behind that point advances the point itself, that is to say the prayer in its entirety,
As it was uttered on that first occasion
And behind it widens and disappears
The wake of innumerable prayers
As they are uttered textually on innumerable days
By innumerable men,
(By simple men, his brothers),
So many other times on innumerable days;
As they were uttered innumerable times
During innumerable days.


All that immense fleet of prayers loaded with the sins of the world.
All that immense fleet of prayers and penitence attack me
Having the prow that you know of,
Advance towards me, having the prow that you know of.
It is a fleet of cargoes,
And it is a fleet of the line
A battle fleet,
Like a beautiful classical fleet, like a fleet of triremes
Advancing to attack the King.
As for me, what do you expect me to do; I am attacked.
And in that fleet, in that innumerable fleet
Each Pater is like a high-decked ship
Which has its own prow,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Turned towards me, and which advances behind its own p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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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9-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글도 올려야될텐데...

stella.K 2004-09-0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대문의 그림 또 바꾸셨네요. 전 먼저 그림도 좋던데요...!^^

카를 2004-09-0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은 요염한 여인네가 대문에 지키고 섰네요^_^
 

서른 아홉에 죽임을 당한 사람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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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0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출처: Gerald Corey의 상담과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 of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를 발췌하여 편집하여 요약 한 것

 

실존치료이론 

 

Victor Frankl(1905- )

 

   프랭클은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30년에 M.D를 그리고 1949년에 비엔나 대학에서 Ph.D를 받았다. 1928년에 그는 비엔나에 「the Youth Advisement Centers」를 세워 1938년까지 그것을 운영하였다. 그는 또 여러 군데의 임상실과 병원에서 일했다.

 

1942년에서 1945년까지 그는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다하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혔엇는데 이곳에서 그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부인이 죽었다. 1947년 이후 비엔나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후에 그는 캘리포니아 샌디애고에 있는 미국 국제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하버드, 스탠퍼드, 그리고 남부 신학대학 등에서 초청받았다.


나치의죽음의수용소에서 투옥되기 전에 실존적 접근법을 연구했지만 수용소의 경험들이 그의 관점을 확고히 해주었다. 수용소에서 그는 실존철학자들과 학자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관찰했고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그런 진리 중의 하나로 사랑은 궁극적이며 인간이 존중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이다. 그는 인간의 구제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다. 일상의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수용소에서 그가 경험에 의해 확신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자유와 마음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것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체험으로 배웠다. 그 한가지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자유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 자신만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은 의미와 목표를 추구하는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가치(사랑이라든가 과업의 성취와 같은)를 추구함으로써, 그리고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그의 연구는 세계 각국에 번역되었고 실존치료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탁월한 저서<<의미에의 추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실존적 접근법에는 어떤 하나의 이론설립자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양한 운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랭클을 택한 이유는 삶의 비극에 의해 그의 이론이 검증되었다는 극적인 것 때문이다.

 

1. 서 문

  실존치료는 치료의 실제에서 볼 때 지적인 접근법이며 치료자가 갖는 철학이다. 이것은 분리된 하나의 학파나 특수 기법을 가진 세련된 모형이 아니다. 이 장에서는 실존치료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실존적 개념과 논제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실존적 접근법은 서로 다른 두 기법 즉 정신분석치료와 행동주의치료에 대한 반동에서 발달하였다. 실존치료는 인간본질의 결정론적 ·생산적·기계론적 관점에 반대한다. 이것은 인간은 자유롭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반면에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무의식적인 힘, 비합리적인 동기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의해 인가의 자유가 제한을 받고 있다고 본다. 실존적 관점은 성장에 기초한 모형이며 병보다는 건강을 개념화하고 있다. 

 

1) 철학적 배경
  실존치료에는 많은 지류가 있다. 이 치료법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정립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주요 성향에서 도출된 것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유럽의다양한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정신의학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고독과 소외와 무의미함 같은 삶의딜레마에 직면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의 기법을 발달시키는 대신에 인간의 깊은 경험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May & Yalom, 1984).


  실존적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들은 19세기 초엽까지 되돌아가서 여러 철학자와 작가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실종치료의 철학적 불꽃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니체(Nietzsche), 하이데거(Heidegger), 사르트르(Sartre), 그리고 부버(Buber)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1)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이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는 인간은 가장 쾌락을 준다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한다는 정교한 신념을 깨뜨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심하다고 자처하는 남자와 이 세상의 성공적인 어떤 사람보다 양심적이라고 믿는 남자는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행동하거나 단지 쾌락보다 선행하는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에 대해 논쟁하였다. 우리는 "가장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항해서 결정하거나 행동하기도 한다. 양심은 고통스럽고 우리를 망설이게 하지만 결국 우리의 삶에 위대한 자유를 준다.

 

(2) 키에르케고르(1812-1855)
  덴마크의 학자인 그는 불안(angst)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불안이란 덴마크어와 독일어로서 영어의 두려움(dread)와 불안(anxiety)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불안의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몽유병환자처럼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 특히 청소년은 극도의 불안에 의해 참된 삶을 각성한다. 삶은 연속적인 우연이며 죽음의 확실성 외에는 어떤 보장도 없다. 삶은 결코 편안한 상태가 아니지만 인간조건에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은 던져진(projected)존재이다.

 

(3) 니체(1844-1900)
  독일의 철학자인 그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다라는 고대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하였다. 우리는 합리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라기보다 의지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사회는 도덕, 종교, 정치 등을 주입시킴으로써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약 양떼처럼 "집단도덕성"(herd morality)을 묵인한다면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군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의지의 고삐를 풀어 놓음으로써 우리를 해방시킨다면 우리는 창조성과 공성을 가진 우리의 잠재력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 즉 "초인"(superman)이 되는 길이다.

 

(4) 하이데거(1889-1976)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니체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된 인간존재의 주관적 경험은 20세기에 들어 현상학이라는 경험적 연구방법으로 발달하였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매일매일을 피상적인 대화와 타성으로 채우기 때문에 나날을 낭비하면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포함한 기분과 느낌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신뢰로운 삶을 살아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좇아 신뢰롭지 못하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호한 느낌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에 따라 삶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하게 될 것이다.

 

(5) 사르트르(1905-1980)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위험스런 저항의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과거의 실존주의자들보다 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무(nothingness)라는 시존적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에 우리가 하려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준다. 그러나 이 자유는 직면하기 어려워 "나는 이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어. 왜냐하면 잘못된 궤도에서 태어났으니까"라든가 "나는 내 과거의 조건 때문에 변화할 수 없어"라는 식의 변명을 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 변명들을 "잘못된 신념"(bad faith)이라고 불렀다. 내 과거가 어땠건 나는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위임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다른 측면인 책임성이다.

 

(6) 부버(1878-1965)
  독일을 떠나 이스라엘에서 산 이 사상가는 다른 실존주의 학자들보다 덜 개인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을 중간적 존재(etweenness)라고 보았다. 즉 바로 나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남이기도 한 존재이다. "나"란 대리인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도 되고 "당신"도 된다. 그러나 때로 나는 다른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경우 나는 그/그녀를 교묘히 다루고, 나처럼 자발적인 존재로서의 그/그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서로의 역할이나 권위의 정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로저스와의 유명한 대화에서 부버는 치료자와 결코 같은 보조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논쟁하였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내담자를 돕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계가 충분히 성숙하면 우리는 "대화적인" 인간조건을 갖게 된다.

 

2) 세 명의 유럽의 실존적 정신의학자들
  빈스방거(Binswanger), 보스(Boss), 그리고 프랭클은 정신의학에 실존요법을 적용한 학자들이다. 비록 그들은 어떤 이념적인 응집력 있는 학파를 형성한 것은 아니지만 치료자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실존적인 이해를 통해 내담자의 주관적인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빈스방거와 보스는 하이데거의 생산적인 연구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의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개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보다 폭넓은 기초를 제고해 주었다. (May, 1958).

  

 빈스방거(1975)는 치료에서의 위기는 내담자를 위한 치료법의 선택에 있다고 보았다. 처음에 그는 정신분석이 정신병환자에게 빛을 주는 이론이라는 관점을 가졌었지만 차차 실존적 관점으로 옮아갔다. 이 관점은 그로 하여금 치료자로서의 경험과 행동에 그의 관점을 지나치게 부과하는 것과는 반대로 내담자의 행동의 의미와 직접적 경험 그리고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보스(1963)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깊이 영향을 받았었으나 후에 하이데거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치료자로서의 그의 주요관심사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치료에 적용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책 <<현존재분석과 정신분석(Daseinanalysis and Psyhoanalysis)>>에서 보여 준 것처럼 프로이드의 방법과 하이데거의 개념을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프랭클(1963, 1965, 1969, 1978)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을 가지고 실존분석(로고테라피)이라는 그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치료관점이 진공에서 발달된 것은 아니며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프로이드의 제자로서 정신분석적인 정신의학자로 출발하였다. 후에 그는 실존철학자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의 실존적 철학과 심리치료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를 참고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나의 고통이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1963)

 

  프랭클은 프로이드의 결정론적인 개념에 반대하여 자유, 책임성, 삶의 의미 그리고 가치추구와 같은 기본 개념으로 심리치료의 이론과 시제를 정립하였다. 그는 "의미를 통한 치료"를 뜻하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발달시켰다. 그가 발전시킨 주제는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이다. 프랭클에 의하면 현대인은 가끔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채 그의 삶을 산다고 한다.우리 시대의 비극은 일상사에서 그리 바쁘지 않을 때 경험하는 무의미함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이다. 치료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사람 속에서 살고, 고통을 받고, 사랑하면서 그런 것들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도록 도전하는 것이다.(Frankl, 1965).

 

3) 미국에서의 실존치료
  미국에서 실존적 접근법을 주장하는 가장 탁월한 대변자는 메이(May)와 얄롬(Yalom)인데 이들의 사상이 이 장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나라에 실존치료를 최초로 소개한 것은 "실존 :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새로운 영역"(May, Angel & Ellenberger, 1958)이었다.
  

 메이는 유럽의 실존주의를 미국의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의 주류에 옮겨 놓은 심리학자이다. 그는 시존적 관점을 발달시킬 때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들의 관점을 많이 인용하였다. 특히 그는 현대의 실존적 사고의 기수인 하이데거를 신뢰하였는데 그는 실존적 정신의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깊고 폭넓은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1958). 메이는 또한 빈스방거와 보스가 실존치료에 기여한 점을 인식하였으며 특히 내담자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개인적 세계를 가진 존재로 보는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저술은 치료의 주관적 영역을 강조하는 이런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운동의 역사적 개관을 보다 세부적으로 아고 싶은 사람은 메이(1958)와 상의할 수 있다.
  

 보다 최근에 얄롬의 포괄적인 교과서인 <<실존적 심리치료>>(1980)는 획기적인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여러 소설가와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채에서 앞서 논의된 철학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제를 도출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 창조성, 무의미성, 죽음
·키에르케고르로부터 : 창조적 불안, 절망, 두려움과 죽은, 죄의식, 무.
·니체로부터 : 죽음, 자사, 의지
·하이데거로부터 : 신뢰로운 존재, 돌봄, 죽은, 죄의식, 개인적 책임성, 고립.
·사르트르로부터 : 무의미, 책임성, 선택
·부버로부터 : 인간관계, 치료에서의 나 /당신의 관계,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

 

  그러나 얄롬은 빈스방거나 보스로부터는 별로 인용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저술이 너무 심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생각이 미국의 실용주의적인 치료의 전통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얄롬은 프랭클을 그의 저술과 임상에 영향을 준 가장 뛰어난 실용주의적 사고가라고 생각하였다.


  심리학은 오랜 동안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경험적 접근법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북미의 많은 학자들은 조작적 정의, 검증할 수 있는 가설, 경험적 데이터만이 인간행동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는 데 타당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전통 속에서 엄격한 통계적 수치를 갖추지 않은 철학적 접근법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실존치료는 학문집단에서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얄롬은 실존분석을 "보다 좋은 학문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집없는 방랑자"(1980)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험이 많은 숙련된 치료자들은 그들의 이론적 태도에 관계없이 실존적 개념과 통찰을 치료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존분석에 대한 방어에서 얄롬은 실존분석을 "이것은 역동적 접근법이다......개인의 실존에 관심을 두는"(1980)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죽음, 자유, 고립, 그리고 무의미성은 실존적 정신역동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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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6-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페이퍼를 올리셨네요. 저도 한때는 빅터 플랑클을 좋아했었죠. ^^
 

2, 주요 개념들

 1)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
  심리치료에서 실존치료의 결정적 중요성은 이것이 기법으로 치료를 하려는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존재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치료의 기초를 두는 치료이다. 실존치료는 인간을 존중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또한 인간행동의 새론운 면을 탐색하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새로운 방법을 탐색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가정에 기초된 치료로서 여러 가지 접근법을 사용한다.


  인간본질에 대한 실존적 관점은 우리의 실존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기초해 왔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설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인식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우리가 제기하는 특수한 질문들이 각 발달단계에 따라 다양하지만 기본 주제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존재했던 것도 없고 주어진 의미나 부과된 의미도 없으며 이 세상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Fischer & Fischer, 1983).


  실존적 접근법에 의하면 인간조건의 기본 영역은 즉 ① 자기인식의 능력, ② 자유와 책임,  ③ 자신의 정체감의 발견과 다른 사람과의 의미있는 관계의 정립 ④ 의미·목적·가치·목표의 추구, ⑤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⑥ 죽음과 무의식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2) 전제 1 : 자기인식의 능력
   인간존재로서 우리는 자기인식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반성할 수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다. 인식이 넓어질수록 자유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인식을 넓히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사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실존의 핵심이 되는 인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유한하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 행동을 취하는 것은 하나의 결정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운명을 부분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


·의미는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추구한 산물이며 독특한 목적을 창조하는 것이다.


·실존적 불안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자유를 가졌다는 자각이며 삶의 본질적 부분이다. 유용한 선택에 대한 자각이 늘수록 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도 는다.


·우리는 고독과 무의미와 공허감, 죄의식 그리고 고립감을 경험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혼자이다. 그러나 다른 존재와 관계할 기회를 갖고 있다. 

 

3) 전제 2 : 자유와 책임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우므로 삶을 이끌어 갈 책임을 수락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피하려 할 것이다. 사르트르(1971)가 말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며, 실존한다는 것은 이같은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관여"(commitment)라고 했는데 실존적 죄의식은 관여를 회피하거나 선택하지 않아야 할 것을 선택한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We are our choices)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에서 자유라는 것과 인간존재는 그 의미가 같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진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와 생활 그리고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갖고 있다. 자유와 책임은 병행한다.이런 관념을 언급하면서 러셀(1978)은 책임의  정의는" 작자"의 개념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삶의 상황과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삶의 제작자이다. 다른 삼을 계속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수용하지 않는 내담자는 치료에서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책임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변화의 기본조건이다.(Yalom, 1980).


  프랭클(1978)도 역시 자유와 책임의 관련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the Statue of Liberty on the East Coast"는 "the Statue of Responsibility on the West Coast"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익살스럽게 시사하였다. 프랭클의 기본전제는 자유는 어떤 제한에 의해 묶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는 그런 제한에 저항한다. 궁극적으로 이들 조건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4) 전제 3 : 정체감의 추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람은 그들의 고유성과 중심성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 우리 각자는 자기를 발견하려 한다. 즉 자기의 정체감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것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며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실존작가들이 고독, 뿌리가 뽑혀 나간 것같은 허탈감, 소외 등을 논의하는데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 결과이다. 이런 실패는 산업화와 도시화 사회에서 개인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고독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개인은 고독한 군중 속에서 타자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Riesman, Reuel & Glazer, 1950). 내적 공허감과 텅빈 느낌,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의 결여의 결과로 개인은 익명의 군중 속으로 자신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우리의 대부분이 겪는 고통은 외계의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지시와 대답과 가치, 신념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는 믿음이나 삶의 길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믿음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됨으로서 우리를 팔아버린다. 우리의 존재는 그들의 존재에 뿌리를 두게 되므로 우리는 더욱 자신에게 낯설게된다.

 

(1)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
  우리의 존재의 핵심을 발견하거나 내면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Tillich, 1952). 우리는 존재의 내부 깊숙이 있는 핵심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내담자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가 자신에게 핵심이 없고 자기가 없으며 실체감이 없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그대하는 것을 반영하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담자는 "내 두려움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으며 자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빈 조개껍데기, 내부가 텅빈 공허, 그리고 만약 나의 가면을 벗긴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실존적 치료자들은 내담자들에게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의 총체에 불과하다고 느끼는지 또는 그저 단지 부모의 투사물이나 대체물로 느끼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느끼는가? 이런 식으로 영원히 머물러야 될 운명인가? 출구가 있는가? 그들은 만약 자신이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자기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일단 내담자가 이 두려움을 인식할 용기를 보이면 그것을 언어화하고 치료자와 공유하려고 한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바깥에서 살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중심으로부터 길을 탐색하도록 이끄는 것이 치료의 시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외로움의 경험
  실존철학자들은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한 부분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 보고 고독감과 분리감을 느껴 보는 경험에서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분리의 감각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존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 할 때 생겨난다. 즉 혼자서 자신의 삶에 의미감을 부여해야 하며 어떻게 상아야 하는 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혼자일 때 스스로 견뎌낼 수 없다면 어떻게 타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누군가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과 어떤 견고한 관계를 갖기 전에 먼저 자신과 견고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곁에 서기 전에 먼저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인 동시에 다른 사람과도 관계되어 있다는 명제는 본질적으로 역설이다. 우리가 인간조건을 고칠 수 있다든가 그것이 고쳐져야 한다든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다.

 

(3) 관계의 경험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지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가 우리의 세계에 중요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혼자 설 수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깊숙이 침잠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의 내부에 자리를 잡으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개인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기생적이며 공생적인 관계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치료의 기능의 하나는 내담자가 다른 사람에게 신경증적이고 의존적인 애착과, 치료자와 내담자 양쪽 모두가 고양되는 치료관계와를 구별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그들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는지, 친숙한 접촉을 어떻게 회피하는지, 동등한 관계를 어떻게 방해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치료적이고 건강하며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지 검토하도록 내담자에게 촉구할 수 있다.

 

5) 전제 4 : 의미의 추구
  인간의 특성 중 가장 뚜렷한 것의 하나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삶의 목적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와 개인적 주체성을 추구한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치료자와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갈등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나의 인생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의미의 근원은 무엇인가?"와 같은 실존적 문제로 집약될 것이다.


  실존치료는 치료자가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내담자가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도전하도록 돕는 개념적 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 "당신의 삶의 방향을 좋아하는가? 현재의 당신과 형성되어 가고 있는 당신에 대해 만족하는가? 이상적 자아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면 분명한 해답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1) 인습적인 가치관을 버리는 문제
  치료상의 문제들 중의 하나는 대체시킬 다른 절절한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가치관, 자기에게 부과된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내담자가 실제로 도전받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내면화 할 수 도 없었던 가치관을 버리고 이제 공허해 한다면 치료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담자는 자신을 "키"없는 배와 같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새로운 측면에 적합한 새로운 지침과 가치관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것들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치료과정에서의 과업은 아마도 내담자의 존재방식과 일치하는 생활방식에 기초한 가치체계를 창조하도록 내담자를 돕는 데 있을 것이다.


  치료자의 역할은 의미있는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치체계를 내담자 스스로 그의 내부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담자는 확실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며 불안스러워할 것이다. 내담자에 대한 치료자의 신뢰는 새로운 가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내담자가 갖고 있다고 내담자 스스로 확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2) 무의미성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내담자는 어려운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가치있는지 심지어는 사는 일이 가치있는지까지도 회의하게 된다.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는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걸까, 결국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일단 내가 죽으면서 내가 한 모든 것들은 잊혀질 것이 아닌가? 죽음이  확실히 주어졌다면 왜 나는 하찮은 일들로 바빠야 하는가?"와 같이 스스로 묻는다. 우리 집단 중의 한 남자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급히 넘겨진 책 속의 한 페이지 같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아무도 그 페이지를 힘들여 읽으려 하지 않았어요."그런 무의미성을 프랭클(1978)은 현대의 삶에 잇는 실존적 신경증이라고 보았다.

 

(3)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
  로고테라피는 시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도와주도록 고안되었다. 삶의 의미성에 도전하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표지이다. "의미에의 의지"(the will to meaning)는 개인의 기본적인 추구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하여야 한다.(Frankle, 1978).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는 과제는 삶이 게속되는 한 결코 끝낼 수 없다.


  치료자의 기능은 내담자에게 그들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Frankle, 1978). 이 견해는 실존주의 철학은 염세적 경향을 지니지 않았으며 고난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개인이 취하는 자세에 따라 삶의 고난(삶의 비극적이며 부정적인 측면)은 성취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프랭클은 인간은 고통, 죄의식, 저망, 죽음에 직면할 수 있으며 일단 그것에 직면하면 그 절망에 도전하여 승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미란 우리가 직접 찾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그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잃는다. 얄롬(1980)과 프랭클은 쾌락처럼 의미도 완곡하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참여"(engagement)의 부산물인데 그 참여란 창조하고 사랑하고 일하며 삶을 정립해 가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6) 전제 5 :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생존하고 유지하며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개인적 열망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인간조건의 필수적 부분으로 불안에 직면하게 된다. 실존치료자들은 정상적 불안과 신경증적 불안을 구분하는데 그들은 불안을 성장의 잠재적 근원으로 본다. 정상적 불안은 직면한 사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나아가 이런 종류의 불안은 억압되어서는 안되며 변화의 동기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의식되지 않으며 개인을 활성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안이 전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치료과제가 아니다. 불안이 없다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죽음 또한 직면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정상적 불안, 실존적 불안의 구조적 형태는 우리가 점차 자유를 인식해가고 그 자유를 선택하거나 거부했을 때 생기는 결과를 인식해 가는 것 같은 인간 성장을 위한 자극제가 된다. 사실 우리가 자신을 재구성하겠다는 결정을 하면, 이때 수반되는 불안은 변화의 준비가 되었다는 지표이다 그 신호는 건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신호의 미묘한 내용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감히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상담을 원하는 내담자의 대다수는 불안을 근절시킬 해결첵을 원한다. 환상을 만들어 불안에서 도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환상을 만들어 불안에서 도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확고한 안전성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삶을 구축함으로써 불안을 줄이고 선택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것은 불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며 간헐적 불안에 과도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자신에 직면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당황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안을 기꺼이 가지려는 사람은 개인치료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확신한다. 너무 빨리 편안해지려는 사람은 잠시의 휴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결국은 옛날 방식에 고착되어 좌절을 경험한다.


  메이(1981)에 의하면 자유와 불안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불안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수반되는 흥분과 비슷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아는 영역에서 나와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불안을 느낀다.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우리 대부분은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을 회피한다. 메이는 이것을 " 우리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자유를 묶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 의식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불안 때문에 그들의 영감을 잠가 버리기 때문에 가장 창조적인 생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표현하였다.(1981). 

 

7) 전제 6 : 죽음과 무에 대한 인식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조건으로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인간존재의 특성은 미래의 실재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다. 만약 삶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실재에 대항해 방어한다면 삶은 어리석고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과제를 완성하는 데 영원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현재의 순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향기와 맛과 창조성을 제공하는 근원이 된다. 죽음과 삶은 상호의존적이며 비록 육체적 죽음이 우리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죽음의 관념은 우리를 구제한다.(Yalom, 1980)


  죽음에 대한 인식은 심리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기가 없는 삶의 유형을 보다 신뢰로운 삶으로 옮겨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Yalom,1980). 그래서 실존치료에서는 내담자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정도를 탐색하는 데 중점을 둔다. 죽음이 주는 과거와 현재의 위협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어지면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할 때 자신이 어떻게 잘 살았으며 삶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어했는지를 평가해보는 건강한 감각으로 무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두려움은 상호관련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두팔을 벌려 삶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만일 가능한 한 최대로 현재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삶의 종말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 결코 참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무로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와 직면하는 데서 도피하려고 하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메이는 이것을 "죽음을 부정하는 데 대해 치루어야 하는 대가는 막연한 불안과 자기소외이다."라고 말하였다.(May,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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