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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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의 견해가 지나친 것은 그의 예상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설득력을 갖게 하는 증거들이 많기 때문이다. 리프킨이 이야기한 석유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파국이 이 책이 나온지 26년이 지난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엔트로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득세와 대전환도 모든 학문 분야에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주와 합일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자각과 삶의 개선도 미미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에너지 사용이 그래도 줄어들고 그로 인해 파국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이미 석유값이 치솟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건 왠지 황우석의 논리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발생한 모든 사건을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게만 해석하려는 오류. 구절구절 옳은 리프킨의 주장이 왜 이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는가.
 
그의 주장의 근거는 논리적으로 모두 옳다. 석유 에너지는 언젠가 아니 곧 고갈될 것이고 이것은 현재의 생활패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함은 물론 그 소용돌이속에서 수많은 전쟁과 기아와 무질서로 인한 나를 포함할 인류의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진행을 막을 방법은 오로지 세차게 브레이크를 밟는 방법 이외에는 없어보인다.
 
다만 그의 주장은 우주의 엔트로피가 상승하며 그 흐름은 가속화되고 가용 물질은 고갈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것으로 역사와 종교, 과학과 경제를 일반화하려하고 있다. 내가 그의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이유는 이런 확장해석의 오류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근거로 이렇게 저렇게 신문기사와 과학논문 잡지와 자연의 이상현상을 증거로 점점 논리를 확장하여 어느때 어느 곳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다른 논리로 다음 휴거일시를 지정할 것이다.
 
너무 약한 근거위에 너무 큰 성을 쌓은 결과이다. 그의 방향이 틀린건 아니다. 재림도 있어야하고 줄기세포도 있어야 하고 환경보전도 있어야 한다. 다만 올바른 크기의 근거 위에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는 이미 첫번째 휴거일을 맞추는데 실패한 것 같다. 다음 날짜를 맞추려 하지 말고 더 포괄적 그림의 탄탄한 배경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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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지음, 정인섭 옮김 / 민족문화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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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종종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기어,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그리고 우리의 지나간 날들은 우매한 자들에게
먼지뿐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추어 왔도다. 꺼져라, 꺼져,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기껏해야 걸어다니는 그림자,
자신의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뽐내고 안달하다가
그리고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헛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에 가득 차,
아무런 뜻없이. [맥베드]

부서지는 가정, 부서지는 가치, 혼돈의 세계. 그것은 남부의 몰락이고 인간사회의 몰락이며 근본적으론 서구 도덕과 가치의 몰락이다. 아무도 이런 가치의 전복과 까발려진 더러움을 수습하지 못한다. 여기서 인생은 이제 헛소리와 분노에 찬 외침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벤지의 통곡 앞에서 작가는 깊은 절망과 연민을 느낀다고 말한다. 서구의 몰락한 가치 위에 사는 이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으나 그리 살 수 밖에 없다. 그 앞에 서서 시간을 부정할 수도, 양심을 부정할 수도,  심지어는 동료인간의 모든 면을 저급한 것으로 몰아부칠 수도 있다. 포크너가 본 것은 그 시초와 종말의 모두였고 깊은 연민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구원의 가능성을 가진 이 서구의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억압받으며 노동을 부당하게 요구받는 흑인노예들이다. 백인의 사회가 거부하며 섞이려 들지 않는 존재. 아직도 백인들은 백인 이민들을 통한 백인들끼리의 근친상간만이 그들을 지킬 길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백인의 자멸을 불러올 것이다. [나는 처음과 끝을 모두 보았다.] 이제 포기하거나 악착같이 살아가거나 멍하니 응시하거나...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치를 잃은 존재들이다.

어쩌면 결국 백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 벤지의 후각과 관련된 슬픔, 아버지의 냉소적 불가지론적 알콜중독, 어머니의 도피적 무기력증, 퀸틴의 자의식적 고통과 자기정죄와 자포자기, 제이슨의 현실적 이기주의적 비양심적 처세술. 이제는 무기력한 그러나 잔인한 이 세상의 일상이 된 모습들이다. 그 무엇도 이 가족의, 남부의, 이 나라의, 또 세계의 파멸을 저지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딜시는 [나는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았다.]고 말한다. 깊은 연민으로 챙겨주는 일 밖에 남지 않은 세상. 우리도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다. 들어선 자에게 파국적인 끝은 불가피하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하지 않아도 됨이 저주라면 누가 믿을까? 나 자신에 대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일하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한 벌거벗겨짐...노예를 부리는 자는 스스로의 타락과 스포일링을 막을 수 없다. 만약 자신이 하여야 할 일들을 하려들지 않는다면 그 댓가를 각오해야 한다.  나에게 책임이 주어진 직업과 관계로 짜여진 역할들. 부모, 가족, 선생, 제자, 아들, 인간으로서의 일들은 사실은 축복이었다.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이면에는 노동하는 자의 고통이, 나의 스포일링이 있었다. 그대로 둔다면 끝은 파국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조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안락을 댓가로 한 생명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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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와 사상 에버그린북스 13
알베르트 슈바이처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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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의사이며 많은 사람에게 봉사의 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의 이런 행동의 뿌리가 된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슈바이처 나이 56세이었던 1931년 쓰여진 이 책은 그의 삶에 대한 회고이면서 동시에 그의 사상에 대한 개괄서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의 요체는 [생명경외사상]이다.  1차대전을 통해 드러난 서양사상의 자멸적 몰락은 슈바이처로 하여금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를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었다. 원래 신학이 전공인 그가 의사로서 살며 느낀 살아있는 삶의 근저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만큼 남도 귀중한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명에 대한 외경심]만이 인간의 운명과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고 파괴적 견해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20세기의 세계관을 인간 긍정적, 세계 긍정적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19세기말의 자유주의적 신학 이해에 기초한다. 비록 교회전승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한 당시의 독일신학,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교수에 이른 그이지만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이해가 놓치고 있는 후기 유대적 메시야 사상과 초기 기독교의 재림 대망에 기초한 윤리관을 접목한다.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자기인식과 이에 기초한 초대교회의 도래할 하나님나라의 주이신 예수 사상, 그리고 이 기다림 속의 윤리관으로서의 바울 신학을 발견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신학적 이해가 당시 사회에 구원이 되기 위하여 예수의 메시야 인식에 기초한 윤리가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내지길 원했다. 
 
그는 그의 생각을 따라 실행에 옮긴 삶을  살았다. 그에게 인간적 결함이나 천재적 재능과는 별개로 참다운 진실과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을 바치는 한 인간을 본다. 그는 음악이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의료이든 동료인간과 생명을 존중하기를 원했다. 나는 과연 무얼하고 있나? 주어진 모든 혜택은 베풀기 위함인데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연히 그는 19세기의 신학적 방자함과 철학적 교만과, 경제논리적 파이프오르간과 폐쇄적 국가관과 계급에 갇힌 의사를 넘어섰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힘을 주었는가? 사랑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성으로 연결되는 신앙만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사랑으로 채워진 진리만이 인류를 해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은 그의 이성적 도출인가? 그는 그의 안에 있던 신앙을 설명하려 하고 그 힘은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왔음을 내비친다. 그는 신학의 이단자로 비치지만, 남의 영역으로 넘어들어온자가 아니라 진정 그의 관심이 신학에 있었던 사람이다. 메시야 인식과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속마음을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열매있는 봉사라고 여겼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다른 모습을 본다. 균형과 내적 힘은 믿음의 신앙이 훨씬 강하지만 지성의 신앙인 그에게서는 일관성과 세상에 대한 설득의 의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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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시선 중국시인총서(문이재) 306
이종진 지음 / 문이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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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년 25살의 나이로 벼슬길을 올라 아버지와 동생과 헤어질때로부터, 64세의 나이로 해남도 유배생활을 마치며 밤바다를 건너 중원에 이르기까지의 40여수의 시를 연대기순으로 모아놓은 시선이다. 소동파의 삶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 마흔셋의 나이로 어사대에서 고문을 받은 이후로 유배와 감금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표적인 시들은 도리어 이 어려움의 시기에 더욱 아름답고 진중하다.
 
이 시집은 익히 알지 못했던 소식의 아름다운 시들을 많이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어려움 속에서도 인생을 즐길 줄 알고, 재주를 발휘치 못함을 아쉬워 하면서도 시로서 자신을 드러냄이 애틋하다. 우리가 산중에 있을때는 산의 진면목을 모르는 것처럼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마쳐보아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스스로 위로하는 [여산진면목]의 통찰은,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와 성공밖에 모르는 나에게 주는 시 한자락 같다. 
 
  
題西林壁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한결같지 않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단지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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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신서 114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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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뮌헨대학 학생단체에서 강연한 내용인 이 글은 짧은 소책자 정도의 분량 속에, 학자라는 직업이 20세기의 사회와 철학적 배경에서 의미하는 바를 막스 베버적 인문학의 관점에서 다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교수는 더 이상 학문의 상아탑에 위세를 떨치는 권위적 존재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직업인으로 비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천부적 소질에 따라 소명감을 가지고 신비를 파헤쳐 가는 고고한 수도자가 아닌 하나의 객관적 지식 전달자이며, 완성된 학문의 최고봉을 이루며 한 문파를 형성하는 위치가 아닌 그저 또 하나의 지식의 벽돌을 학문의 진보 위에 얹는 역할을 하는 소박한 기능인으로 교수를 본다.
 
그의 이런 관점은 베버 자신의 합리주의화 혹은 탈주술화의 근대 이해와 맞물려 있지만, 동시에 독일철학의 전통인 역사의 발전과 이성의 완성을 향한 흐름, 변증법적 이론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진보의 흐름에 기여하는 개인의 소박한 역할에 대한 이해와 닿아있음을 본다면 당연히 헤르더, 괴테, 헤겔, 니체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주장은 더욱 깊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학자에 대한 그의 이러한 접근이 여전히 유용한 것은 더더욱 많은 학자들이 학자의 지위를 사회정치지도자로서 나서는 발판으로 여기거나,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어 스스로 편향된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 authorized person이 될 소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의 역할에 대한 자기성찰의 부족은 자연스레 학자를 정파의 이론적 지지자나 특정 경제체계의 정부측 혹은 자본측의 어릿광대, 혹은 연구비를 위한 노예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학문에 대한 이해부족의 가장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은 학자를 믿는 사회와 자기역할을 잊은 학자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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