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머리말: 절망은 구원의 시작이다.
서론: 그리스도가 같이 계심으로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의 두려움을 안다.
 
제1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
  A. 절망은 정신의 병이며 세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는 경우
     자아는 자기자신에 관계하는 관계이다.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는 경우는 더욱 절망에 매몰된다(의지의 긍정?)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가능에서 현실로 나아갈때 추락한다
     절망하고 있지 않으려면 절망의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절망한 사람은 모든 순간에 절망의 가능성을 끌어들이고 있다.
     고통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온다(쇼펜하우어)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고통이 극대화될 때, 절망은 죽을 수 있는 희망까지 빼앗는다.
    절망은 자기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그래서 자기를 벗고자 한다. 즉 자기자신이고자 하지 않는다
    자기의 참자아를 벗어나 그 자신이 발견한 힌두적 자아로 있기 원한다. 그러나 원래 자기에 억류되어 있음에 그의 고뇌가 있다.
    철저히 자아를 상실하는데 성공한다해도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은 드러나고만다.(!)
    자아를 갖는 것은 인간에 허용된 최대의 것인 동시에 영원히 인간에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절망의 보편성
    서너가지 병명을 붙힐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절망을 겪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불안의 절망은 걸리지 않는 자에게 불행이고 걸린 자에게 신의 선물이다. 치유를 원치 않는다면 이는 위험한 병이다. 나아야 한다. 병 자체는 불행인 때문이다.
    절망을 통해서만 일상의 사람은 자신이 정신임을 깨닫는다.
    절망을 모른 체 살아가도 영원은 너의 자아를 통해 너를 절망에 못박아 놓은 것이다.
 
독후감) 쇼펜하우어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고통은 인간 안에 보편적 요소 혹은 기회로서의 축복이다. 이것은 우리 삶이 치유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자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어둠에 거하는 백성에게 빛이 비추니라]
 
제3장 절망의 형태들
   의지를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많은 자기의식을 갖는다. 자기의식은 절망의 의식이다.
 
 A. 절망의 의식 여부에 관계없는 절망(종합의 계기 점검)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 자기가 자기되지 못하면 절망한다. 자기의 자기됨은 무한화하여 해방되고 유한화하여 자기자신에게 돌아옴이다.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
            상상력은 무한화의 매개이며, 자아의 가능성, 반성의 가능성이다
            감정,인식,의지가 공상적이 되면 자아는 희박해진다.
            그에게 절대이성, 내세종교, 초월적 의지란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β.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
            정신에 대한 무시와 무가치한 것에 대한 이슈화
            편협성-근원성(정신)의 결핍, 다른 인간에게 맞추어가다가 자기를 잃음
            고루함-모험하지 않으면 잃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세상은 세상에 몸을 파는 사람들로만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소유하나 그들자신은 아니다. 정신적 의미의 아무런 자아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가능과 필연의 변증법)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
      가능성만 남으면 추상이 된다. 부족한 것은 필연에 대한 복종이다
      이로 인해 자아는 상실되며 경로는 동경(희망)의 추구와 우수(공포와 불안)의 매몰이 있다.
     β.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
      가능성이 사라진 인간의 구원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이것이 믿음, 곧 절망 가운데 구원이다.
      믿는 자는 인간적 계산에 의해 자신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믿는다.그래서 파멸을 면한다.(공포와 전율)
     절망의 온전한 해독제, 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이것이 모순을 해결한다.
     결정론자,숙명론자는 필연성으로 인해 절망한다. 그들은 기도할 수 없다.
     속물성은 무정신성이고, 경험에 국한된 세계의 해석이다. 경험울 뛰어넘어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속물성은 상상력을 혐오하며 그래서 절망이며 신앙의 가능성이 없다.
      결정론,숙명론은 필연성의 긴장을 늦추는 완화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하며 속물성에는 무정신성에서의 각성작용의 가능성이 결핍하다.
 
B. 의식의 규정 아래 볼수 있는 절망
  의식이 증가할 수록 절망은 증가한다.악마의 절망은 절대의 반항이며 최저의 절망은 천진한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a.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모르는 절망-자신이 자아이며 영원적 자아임에 무지
    감성적인 것에 지배되는 보편적 인간은 비소크라테스적인 오류안에 살기를 즐겨한다
    절망에 대한 이런 무지는 절망을 더욱 증가시킨다.
    진리로부터 떨어진 절망보다 절망에 대한 무지는 한 단계 더 떨어져 있다(절망의 통과가 필요)
    가장 보편적인 절망임. 심미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오직 무정신성으로 절망을 판단한다
    즉 절망은 신 앞에 자기를 개인적 정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외관이 찬란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고  타인에게 헌신적이며 보편자를 인정하고 기독교회에 몸담고 있어도 무정신성 안에서 절망이다.
 
독후감) 현대사회의 바쁨과 물질성, 기술문명과 과학주의의 자기 맹목성은 인간을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쾌락에 마취시켜서라도 절망에 잠들게 한다. 절망이 그를 최후에 집어삼킬 때까지
 
 b.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아는 절망-자신이 자아임을 아나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신이려 함
   의식의 정도가 높고 명료한 절망의 관념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이 절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더욱 절망적이다. 신앙은 자아와의 관계에 자기로 남으며 자기를 정립하는 힘 가운데 자기자신을 의식적으로 기초두어 확고케 한다.
 
  α.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애니마적 절망
 
  1. 지상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불쾌해지고 불행해지면 그는 절망한다.(직접적 인간) 외부적 도움이 오면 절망은 끝난다.
      결코 진정한 절망의 탈출인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웃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아로 바꿔입길 원한다(헨리 애덤스)
      반성에 의해 이런 절망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나 어느 한계가 있다.
      직접성과의 절연을 하지 못하고 만다. 추상적 자아에 대한 인식과 윤리적 반성의 부족 때문.
      젊을 때나 그러하다는 변명은 절망을 소유케 된 상태를 나이로 얻은 소득으로 생각한 때문.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지상적인 것 자체(전체규정)에 대한 절망으로 바뀐다.
 
  2. 영원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는 영원적인 것에 절망적이다.
      차이는 지상적 절망이 [약함의 절망]이라면 이 절망은 [자기의 약함에 대한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신의 약함에 절망, 영원한 자아를 인식하나 헤어나오지 못함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벗어나고자 함.내향성으로 빠져들어가고 고독을 갈망함.
      폐쇄성이 교만 때문이나 그런 자기를 깨뜨리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열정으로 바뀌면 [안식을 모르는 일중독]의 정신이 되기도 하고, 절대 폐쇄로 나아가면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자살]로 치닫는다. 
 
  β.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는 경우-애니무스적 절망
    자아의 의식적인 상승으로 자기에 머무르려한다. 이런 자아는 가장 추상적 가능성일 뿐이다.
    부정적 자아를 무한형태로 상승시켜 자신이 원하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에 남음
    행동적일때는 자신의 일을 신이 아닌 자기가 주시하고 있는 실험적인 것으로 만든다. 모든일은 평정과 부동 가운데 만족을 향해 치닫다 갑자기 無가 된다.(쇼펜하우어)
    수동적일때는 지상적 고뇌 앞에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버린다.
    구걸하여 이 고뇌를 제거하느니 차라리 이것을 지닌 채로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반항이다.
    고뇌는 받아들여도 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다.
    이 demon적 사고는 이것을 빼앗을 영원자 앞에 불안으로 떤다. 절망은 폐쇄성안에 감추이고 차라리 자기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원자에 대해 비난하길 원한다.
    
[제2편]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죄는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가중된 절망)   
 
 A. 자아의식의 여러단계(코람데오)
    척도는 質이며 윤리적 목표이며 사물의 본성이다. 인간은 신을 척도로 한다.
    신을 척도로 하면서 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인간적 자아만을 척도로 하면 죄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죄이다.
    눈에 보이는 죄의 모습은 결국 이 정신적인 죄(죄는 정신이다)가 동의한 행위이다.
    그 반대인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되며, 자기자신되고자 하여 신의 기초 위에 두게 하는 것.
 
    附論) 죄의 정의가 좌절을 포함함
        기독교의 척도가 신이라는 사실이 인간을 좌절케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신앞에 설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그 신이 그에게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하는 현실이 그를 당황하고 좌절케 한다.
        좌절 이 불행한 경탄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경탄하여 헌신할 수 없다면 질투하듯, 신에 대하여 예배할 수 없다면 좌절케 된다. 
       그래서 이 역설과 비논리의 기독교는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의 감격은 변호가 아니라 공격이며 승리일 뿐이다.
 
  B.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죄는 무지이다
    무지가 죄라면 죄는 없다. 죄는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지와 반항이 빠져있다.
    하지만, [안다면 그의 생활이 그렇지는 않을 것, 그는 모른다]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해한 것에서 행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죄가 의지안에 존재함이 그리고 원죄가 있다.
    개인에게 이해에서 행위로의 이행에는 지연이 끼어든다. 인식의 쇠퇴와 악한 의지의 승리!
    인간의 생각의 범주는 소크라테스까지이다. 그 이상은 신의 계시에 따른다. 죄는 의지에 있다
    죄는 [신의 계시에 의해 어디에 죄가 존재하는지 인간에게 밝혀진 후]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
   
   C. 죄는 소극성이 아니고 적극성이다
      개념적으로 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변적 교의학은 결국 죄는 부정이라는 소극성으로 만든다.
      신앙은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래서 오직 죄는 절망의 도가 심해짐으로 인해 점차 강해진 자아와, 행위로서의 죄에 관한 최대한의 의식으로 구성됨으로 인해 적극성임을 안다.
 
제1장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서 드문 것은 아닐까?
강한 도의 절망은 드물다. 죄란 것은 절망의 도가 높아진 것이니 결국 드문 것이 아닌가?
절망해 있지 않다고 절망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절망해 있다.
그렇다고 높은 정도의 절망이 공적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심미적 우월이다. 윤리적으로 보다 더 절망하는 것은 낮은 절망보다 구원에서 더 멀다.(기독교-유대교-이교)
인간의 생활은 하도 신앙과 떨어져 무정신이어서 죄라고 아니 절망이라 부를 수도 없다. (철저한 절망)
기독교를 변호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변호되어야 한다는 무정신적인 것이다.
 
제2장 죄의 계속
   죄에 머무는 상태는 새로운 죄이다.
 
    A.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죄는 선에 대한 단절이다. 죄에 대한 절망은 선으로부터의 더욱 심한 제2의 단절(회개와의 단절)이다
       그는 선한자로 가장하거나 격정적으로 자기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위장된 자기애와 교만)
        자기의 죄에 대해 고뇌한 후 필요한 것은 머무는 것이 아닌 올바른 방향전환이다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그리스도 앞의 자아, 죄인인 자기자신이려 하지 않는 반항이나, 죄용서는 없으므로 죄인인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약함이 있다.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것은 사실 가장 가까이 신에게 접근했을때나 가능하다(기독교안에서)
      이제 기독교 사회 안에선 이런 걸 멋있다고 한다
      인간의 군집으로서 교회는 신을 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의 필요를 희석
      죄의 범주는 개체성의 범주이지 집단의 범주가 아니다.죄는 사유의 일반화 범주가 아닌 현실성이다.
      개체가 신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면 공포와 전율 속에 느끼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 중압 가운데 좌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물 즉 개념을 통한 신의 이해는 이런 중압감이 없는 천박하고 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하여 죄만이 신에 대하여 부정으로나 긍정으로나 말하여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각 사람을 개체로, 개체적인 죄인으로 하는데서 좌절은 시작되고 기독교는 시작된다.
    심판은 오직 개체를 상대로 한다.각 사람은 자신의 죄의 보고서를 개체로 지닌다
    좌절은 이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강화된 죄이다.
 
   C. 기독교를 폐기하며 거짓이라고 말하는 죄
     자아의 절망적 강화
     어쩌면 이토록 가까이 우리를 부르는 신의 근접감에 좌절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좌절하지 않은 자만이 믿음으로 예배한다.
     좌절의 이유는[너는 믿어야 한다]에 있다.
     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택하는 것도 좌절이다.
     관심은 가지나 이제나저제나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도 또 다른 좌절이다
     적극적으로는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실이 假現說이거나 합리주의로 부정하는 것이 있다.
     현재 이 사실이 중요치 않게 취급되는 이유는 죄와 신앙을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에 관계하여 자기자신이길 원할때 , 자기를 정립한 힘안에서 자각적으로 자신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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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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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ul@naver.com 2017-02-04 10: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Ewedu14 2017-12-3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정리를 잘 하셨네요!! 많은 도움 얻고 갑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