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08.09 */

뜨거운 공기를 뚫고 산뜻할 정도의 기화열을 발산하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궤적에는 상쾌함이 남아서 한 여름밤의 열기를 달래 주었지만,

바지에서 여정을 마친 빗방울들은 그와는 반대로 축축하고 눅눅한 불쾌감만을 남길 뿐이었다.

 

우산을 접고 집으로 가는 퇴근버스에 올랐다.

회사의 퇴근버스는 대부분 45인승 관광버스로, 맨뒷자리를 제외하고는 좌우로 두 개씩의 좌석이 놓여 있다.

극도로 마른 체형이 아니고서야 관광버스의 좌석 하나의 크기가 1인분이 아니고 실제로는 0.8인분,

최대로 잡아봐야 0.9인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다리를 쭉 펴고 팔은 팔짱을 통해 몸 안쪽으로 우겨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옆자리에 다른 성인 남자가 앉게 되면 필히 신체의 어느 부분인가가 (대부분 팔이나 옆구리겠지만)

닿기 마련이다.

같은 회사에 다닐 뿐 전혀 모르는 남자와 신체 한 부위를 맞닿은 채로 30분 넘게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은

꽤 오랜 시간동안 겪어와서 무덤덤해질 만도 하지만 여전히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버스에 올라타고는 먹이를 찾는 매처럼 직감적으로 빈 좌석을 찾아 보았다.

나에게는 내 나름대로의 빈 좌석을 찾는 알고리즘이 있다.

 

1. 연달아 두 좌석이 모두 비어 있는 자리를 찾는다.

   그 수효가 여럿이면 최대한 뒷자리를 찾는다. (단, 맨뒷자리는 우선순위에서 마지막으로 한다.)

2. 연달아 비어 있는 두 좌석이 없을 경우, 복도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찾는다.

   복도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 중 창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남자인 쪽을 우선 선택한다.

3. 복도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가 없는 경우 창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찾는다.

   창쪽으로 비어 있는 자리 중 복도쪽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남자인 쪽을 우선 선택한다.

4. 창쪽으로도 비어 있는 자리가 없는 경우, 서서 간다.

 

어제는 2.에서 나의 알고리즘은 진행을 멈추었다. 사실, 3.이나 4.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리를 잡은 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우산을 대충 말아서 앞좌석에 달려 있는 그물망에 넣었다.

그 와중에 많은 양의 빗물이 내 바지를 적셨으며, 그물망에 넣어진 우산에서도 계속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다리에 막혀, 버스에 흔들릴 때마다 하늘거리는 젖은 우산을

나의 다리는 피할 수 없었다.

젖은 날, 끈적거리는 몸에 러닝셔츠가 딱 달라붙은 것이 느껴지는 상태로, 젖은 우산을 피해 다리를 벌릴 수 없는,

그러면서도 몸을 까딱거릴 수도 없는 이 난국이란...

 

이 때, 팔자 좋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 창쪽 자리는 비워 놓고 복도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서,

나의 자리잡기 알고리즘에도 드러나듯이, 창쪽 빈 자리는 제일 나중에 채워진다는 사실에 득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다리는 적당히 편안한 각도로 벌려져 있고,

우산은 빈 자리의 그물망에, 또는 아예 빈 자리의 좌석위에 놓여 있었다.

꽉찬 좌석에서 벌어지는 '앉아있음'의 치열함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들에게는 부르주아의 기름낀 넉넉함이 넘쳤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좌석버스의 착석은 창쪽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에티켓 쯤은 모르겠다는 듯이

'창쪽 자리로 들어올테면 들어와 보시지'라는 표정을 한 채

통행세 징수원이라도 되는 양 다리를 바리케이트삼아 창쪽 자리를 가로막고는 의기양양해 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들은 아마도 꼭 막히는 고속도로에서는 갓길 운전을 일삼을 것이며,

점심시간 길게 늘어서 있는 짬줄의 중간을 유유히 파고 들어가 새치기하곤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남의 불편은 나의 안락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의 고통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퍼스트 클래스의 안락함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결국 작은 공간 버스는 이기주의자들의 천국이 된다.

 

아,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작은 공간 버스에서만의 현상이 아닐 것이다.

지구위나 천체 사이에서나 같은 우주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좁은 버스나 드넓은 세계나 같은 인간관계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보통사람들보다 두 배나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통계물리학의 진리처럼 보편적인 현상이다.

단지, 버스에서의 이기주의자들이 세상에서는 처세에 능한 자들로 불리우는 것이 다른 점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다른 점은 또 있다.

나의 모든 불평에도 불구하고 버스안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공간이다.

버스안의 좌석점유가 포화상태에 이른 연후에야 비로소 못가진 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버스의 이기주의자들은 다른 빈 자리가 전혀 없을 경우에는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기주의자들은 못가진 자들이 넘쳐나고 있어도 자신의 빈 자리를 양보하는 일이 없다.

이것은 마치 버스 승객이 자신의 옆에 있는 빈 자리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이 자리는 내것이니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세상의 이기주의자들은 서서 가는 승객으로 버스가 가득할 때조차

이상하게도 자신의 옆자리에 대한 소유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인다.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마저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다.

 

이쯤되면 하나의 법칙이 도출될 수 있다.

버스나 세상이나 이기주의자들이 잉여를 갖게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버스의 통계역학에서는 포화이후에 결핍이 등장하는데 반하여

세상의 통계역학에서는 포화상태가 절대로 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통계역학은 열평형상태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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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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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리고 책 표지에 커다란 막대사탕 하나만이 달랑 그려져 있지만, 실상 이 책은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체의 '가공식품'에 대한 책이다. '모두를'이라는 추상적인 말 보다는 '내 아이를'이라는 피부에 와닿는 말이, '가공식품'이라는 알쏭달쏭한 말 보다는 '과자'라는 구체적인 말이 잠재적 독자의 시선을 끌고 책의 판매부수를 올릴 것이라고 저자와 출판사는 생각했겠지만...

저자는 한 유명 과자회사의 중견간부였던 사람으로 제과업계에 종사한다는 점에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시시때때로 과자를 즐기는 대단한 과자광이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해 마지 않던 일본의 한 과자회사 사장이 돌연하게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가공식품 매니아에서 가공식품에 대항하여 싸우는 혁명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 처럼, 가공식품을 타도하기 위한 선동의 도구 내지는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쓰기에 이르른다.

'무엇을 할 것인가'나 '나의 투쟁'에 비유하기는 했어도, 이 책은 그리 뛰어난 문학작품은 아니다.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이 개종 이후 자신에게 찾아 온 '은혜'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길을 따르라고 '간증'할 때, 가장 알기 쉬운 언어로, 그러나 가장 간절하게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의 어투도 '안티가공식품교'로 개종한 과거의 '가공식품교도'의 '간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도 호소력이 있다.

사실을 말하건대, 그리하여 나 역시 그의 '간증'에 감화되었다. '안티가공식품교도'로서, 나는 매 끼니마다 식탁을 마주하며 이번 식사에서도 '설탕', '트랜스지방산', '식품첨가물' 등이 삼위일체화된 가공식품 사탄의 시험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매번 장을 볼 때마다 '가공', '정제', '백설탕', '쇼트닝', '마가린' 등 악의 주문이 포장지에 인쇄된 먹거리에 '영원히 재고로 남을찌어다'라는 저주의 독설을 퍼붓곤 하게 되었다.

가끔 내가 너무 오바한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공식품 공포증'에 걸리게 되었지만, 이 책에 적혀 있는 사실관계를 냉정히 인식한다면 당장에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때깔좋은 가공식품들을 모두 불살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당뇨병의 전단계인 '인슐린 저항'을 불러 오는 정제당, 그 해로움 여덟 가지를 하나하나 상당한 분량의 칼럼으로 설명한 트랜스지방산, 단 하나의 분자로도 위험하다는 식품첨가물 등 저자가 지목하는 세 가지 위험요소 그 하나하나도 이미 큰 충격이지만, 20세기 초에는 매우 드물던 질병들 - 암, 심혈관 질환, 당뇨병 - 이 가공식품이 보편화되는 것에 발맞춰 전체의 50%이상을 차지하는 현대인의 주요 사망원인이 되었다는 점, 바로 그 사실만으로도 가공식품에 대한 증오는 돌이킬 수 없이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색을 하며 가공식품의 죄목을 조목조목 심문하던 그는, 그래도 한동안 몸담았던 식품업계에 최소한의 면죄부를 주고자 했던 것인지, 식품업계가 인체에 해롭다는 점을 알고도 정제당, 나쁜 기름, 첨가물 등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소비자들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업계는 소비자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역시 소비자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단, 소비자가 겪고 있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 책과 같은 수단을 통해 해결하여 가공식품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리면서 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가공식품은 미워하되 식품업계는 미워하지 말자는 것이며, 소비자가 똑똑하기만 하면 시장의 원리에 의하여 나쁜 가공식품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좋은 지방과 나쁜 지방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출 때, 제유업계에 강력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이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논하던 사람이 진지하게 내놓은 해결책으로는 다소 허황되고 뜬금없지 않은가? 이런 경우야말로 국가 내지는 소비자단체의 힘이 개입하여야 하는 경우가 아닐까?

책은 흔히 사고를 전환시켜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들 한다. 이 책은 몸을 전환시켜 인생을 바꾼다고 할 만하다. 나쁜 가공식품을 없애기 위한 해결책이 썩 개운치 않지만, 독자의 식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건강한 몸을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다시 '안티가공식품교도'로 돌아가서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요절'말씀을 암송해 본다.

'요컨대 모든 문제는 정제당과 나쁜 지방, 식품첨가물로 귀결된다. 그것이 바로 가공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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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8-22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다시 돌아오셨군요!

전자인간 2005-08-22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yeshot21 2005-08-3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리뷰 한번 잘 쓰시네요.

전자인간 2005-08-3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노마디즘 1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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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은 무엇인가? 왜 <천의 고원>이란 책에 대한 해설서(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규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해설서가 맞다.)의 이름이 <노마디즘>인가? 그 힌트는 '천의 고원을 넘나드는 유쾌한 철학적 유목' 이란 부제에 있다. 즉, <천의 고원>에서 펼쳐지는 여러 철학적 고원들을 '유목주의(노마디즘이란 말은 번역하면 유목주의에 해당한다)'적인 방식으로 유쾌하게 풀어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적 고원'은 뭐고, '유목주의'는 또 뭔가? 그에 대하여 들뢰즈와 저자 이진경이 의도했던 충분한 대답을 하기에는 '이 글의 여백이 너무 모자란다' 또는 '내 능력이 충분치 않다'.

책을 읽고 나면 동의할 것이다. 이 책은 낯설고 심오하며 괴이하기까지 한 무수한 개념들의 '리좀'임을. ('리좀'이 뭐냐고? @_@) '탈지층화', '추상기계', '기관 없는 신체', '탈영토화', '일관성의 구도',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리토르넬로', '전쟁기계', '포획장치', '매끄러운 공간 및 홈 패인 공간' 등등... 들뢰즈와 가타리가 우리를 한가운데에 던져 놓는 여러 고원에는 이처럼 묘한 개념들이 외계 행성의 동물원처럼 기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개념들의 홍수에 매몰될 걱정은 그리 많이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지은이가 1500여 페이지에 걸쳐 그 하나하나를 세심하고도 다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 차례 거듭되는 복습을 통해서, 때로는 '동사사독'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통해서...

이 책은 '수유 연구실 + 연구공간 너머'에서 열린 '노마디즘 세미나'에서 지은이가 직접 강의했던 내용을 두 권으로 편집해 펴 낸 것이다. 그런 만큼, 지은이가 바로 앞에서 설명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구어체에 가까운 쉬운 문체가 특색이다. 하지만 지그재그를 그리며 술술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이 가끔 암초를 만난 듯 지리하게 한 곳에 멈추어 버릴 때가 있는데, 다름아니라 <천의 고원>을 인용할 때이다. 무척 짜증날 만큼 난해한 원전의 단락에 걸려서 한참을 힘겹게 사유하다가, 이해하기를 포기하거나 이해를 잠시 보류한 후에 지은이의 설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머리속의 고정관념들과 톱니가 어긋난 채로 이질적으로 존재하던 들뢰즈의 언어가 '매끈한' 도가니에서 창조적인 '클리나멘'을 유지한 채로 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이해인지 지은이의 솜씨좋은 최면술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런 지적인 감응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분명히 유쾌한 일이다.

<노마디즘>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전자인간은 <천의 고원>에의 도전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만용을 얻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전자인간같은 독자를 들뢰즈의 세계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세계로 한 발 디디게 한 것은 그 자체로도 비싼 값(정가로는 두 권 합쳐서 56000원)에 값하고도 남는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이다.

그러나 지은이가 밝혔듯이, 읽는 사람들의 사유방식, 행동방식에 근원적인 감응을 불러 일으키는 '책-기계'로 작용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쓰임새다. 특히 그는 12장과 13장 등 정치적인 함의가 농후한 고원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등의 책을 통해 맑스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전도사 역할을 해 왔던 지은이의 이력에서 볼 때 당연하다 할 수 있는 부분이다. 90년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거치면서 현실적 한계를 드러낸 맑스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코뮨주의 (commune-ism)'에의 돌파구 중 하나를 그는 들뢰즈에서 찾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모든 고원들은 그 하나하나가 '리좀'의 일부로서 '탈주'를 자극하는 고원-기계로 볼 수 있겠지만, '운동권 출신' 저자의 속내와 아마도 들뢰즈, 가타리의 의도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향한 '잰쟁기계'를 생성하는 창조적 감응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천의 고원>의 부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자본주의와 분열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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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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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른바 '공돌이'들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고문학에 대한 공포 또는 혐오감은 매우 보편적일 것이다. 한자가 난무하고, 문장부호인지 헷갈리는 아래아와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괴상한 받침들이 수놓아진 우리의 옛글들에서, 마치 문과생들이 인티그럴, e, lim 등등이 마구 비벼진 수학공식을 볼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불편함과 낯설음을 이과생들은 경험했다. 그 결과, 그렇쟎아도 현대문학과조차도 별 상관없이 지내는 '공돌이'들에게 있어서 고문학은 그저 수천만광년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과도 같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전형적인 공돌이 전자인간도 거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무지에 의한 편협함은 한 조각의 앎에 의해서도 깨어지고 극복될 수 있는 법이다. 피상적인 정보만이 전부인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얼마나 자신있게 우리의 옹졸하고 좁아빠진 이해의 테두리에 가두어 왔는지, 그리고 그 견고해 보이던 조그마한 편협의 성이 그 세계의 아주 조그마한 일부만 가지고도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 그러한 '탈영토화'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이러한 우리 마음속의 옹졸한 성을 깨부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공돌이'들의 옹졸한 성들 중 가장 견고한 것 하나, 즉 '고문학에 대한 편협함'을 깨뜨리는 아주 재미있는 공성망치라 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최소한 연암 박지원과 그의 문학에 대해서 만큼은 팬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상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언어와 눈, 사고방식으로 재해석한 <열하일기>에 관한 것이다. 저자 본인이야 들뢰즈/가타리로부터의 '탈주', '재영토화'를 주장할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이 책 전체는 <천의 고원>의 약간 이질적인 고원으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들뢰즈/가타리스럽다. '리좀', '노마드', '홈 패인 공간' 등 책 곳곳에 이정표마냥 심어져 있어 신선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보일라치면, 아니나 다를까, 거의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들이다.

'몰적인 선분'에서 벗어나서 '지층'을 가로지르는 '탈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연암과 가장 어울리는 현대사상체계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저자가 신들린 상태에서 들뢰즈/가타리로부터 내려오는 영감을 축자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서, 이 책이 들뢰즈/가타리교 신자들에게서 정경으로 떠받들여 질 수도 있다는 우스운 공상까지 했을 정도다.

저자 자신의 목소리보다는 들뢰즈/가타리의 목소리가 더 크다는 비판을 함에도 불구하고, 연암과 들뢰즈/가타리라는 두 천재-거인의 틈새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그저 황홀해 할 수 밖에 없는 저자를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저자로부터 전해들은 연암의 기이한 일대기도 그렇거니와, 전체중 일부분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열하일기>의 몇몇 명문들만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감상하는 수많은 '살리에르'들을 문학적/사상적으로 초라하게 만들고야 마니 말이다. 그리고 연암의 비범한 생애와 작품을 염두에 둔 것같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 역시, 범인들에게 그 외에 다른 서술방식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튼 <열하일기> 전체를 읽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이 그 작품에 대한 '과장광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빠른 시일 내로 <열하일기> 완역본(원본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을 구하여 읽어 보는 것이, 전자인간이라는 공돌이가 연암의 세계에 깊숙히 함몰되거나 예전처럼 고문학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으로 돌아가거나 하는 최종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열하일기>의 완역본은 나와 있지 않는데다가 저자의 '과장광고'가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 것들이라서, 고문학에 대한 무관심을 다시 찾으려면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이나 무한의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게다가 <열하일기>는 '첨점'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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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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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페이지 안팎, 총 다섯 권, 모두 읽는데 10개월... 에릭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1990년대까지의 200여년 간을 네가지 시대, 즉,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구분하여 마르크스주의자 특유의 전투적 인간애를 바탕으로 풀어 쓴 책들이다.

아무리 방대한 분량이라고 하더라도 읽는데 10개월이나 걸리다니, 너무 게으르다는 힐난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10개월 동안 '시대' 시리즈만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 시리즈는 지난 10개월 동안 내 독서생활의 중심이었다. 500여 페이지짜리 '시대' 시리즈 중 한 권을 끝내면 조금 가벼운 책들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한 두 달 후에 다음 '시대' 시리즈를 도전하고... 하는 식으로 10개월 동안의 내 독서 리듬은 '시대'의 중력이 지배했다. (참고로, 내가 읽은 순서는, <극단의 시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였다.)

그 분량때문에 숨이 막히는 '시대'는 진도 나가기에 있어서도 그리 녹록한 책이 아니다. 한 페이지를 모두 채워버릴 듯한 긴 호흡의 문장, 그 긴 문장 사이사이로 끊임없이 사고의 연속성을 훼방하며 끼워진 하이픈들 - 한 페이지에 수십개에 달하는 경우도 있음, '성문종합영어'에 실리면 안성마춤일 듯 고색창연한 문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낯선 지명과 인명 등, 읽기 힘든 책의 요소를 고루 갖춘 원저의 난독성에다가, 군데 군데 눈에 띄는 오역 - 바비롤리 경을 모차르트의 '관리자'라 해석하는 식의 - 과 무리한 직역 등 번역의 부분적인 실패, 페이지에 가득 구겨 담은 빽빽한 활자 등을 생각해 볼 때, 이 책 한 페이지를 읽는 데는 다른 책 두 페이지를 읽는데 필요한 노력과 시간이 투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다가 독자들이 그 시대의 사실들에 대해 상당정도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건들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논증에 치중한 서술방식은, 19세기 20세기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읽고 있는 현위치를 큰 지도속에서 파악하기 힘들게 하고, 심지어는 그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독자들이 이러한 부분을 만난다면, 조금이라도 이해의 끄트머리를 잡기 위해서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고통스럽게 반복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500여 페이지짜리 '시대' 한 권은 다른 평범한 책 두 권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결국 '시대' 시리즈의 완독은 십수권의 책을 읽는 것에 해당하는 과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장의 롱테이크같은 시선이 시리즈를 압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의 미덕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것은 현대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디스토피아가 형성된 과정과 현실사회주의가 망가지고 결국 무너진 과정, 그리고 그것들이 변증하는 바람직한 세계에 대한 청사진 등을 민중의 관점에서 고찰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혁명, 산업 발달, 노동계급, 여성운동, 전쟁, 사상, 예술 등 해체된 채로 이해되기 쉬운 역사의 요소들을 하나의 거대한 줄거리에 녹아들게 하여 커다란 통사관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의 미덕에 의해 역사는 연도와 사건들의 자잘한 파편에서 도도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로 변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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