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른바 '공돌이'들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고문학에 대한 공포 또는 혐오감은 매우 보편적일 것이다. 한자가 난무하고, 문장부호인지 헷갈리는 아래아와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괴상한 받침들이 수놓아진 우리의 옛글들에서, 마치 문과생들이 인티그럴, e, lim 등등이 마구 비벼진 수학공식을 볼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불편함과 낯설음을 이과생들은 경험했다. 그 결과, 그렇쟎아도 현대문학과조차도 별 상관없이 지내는 '공돌이'들에게 있어서 고문학은 그저 수천만광년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과도 같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전형적인 공돌이 전자인간도 거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무지에 의한 편협함은 한 조각의 앎에 의해서도 깨어지고 극복될 수 있는 법이다. 피상적인 정보만이 전부인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얼마나 자신있게 우리의 옹졸하고 좁아빠진 이해의 테두리에 가두어 왔는지, 그리고 그 견고해 보이던 조그마한 편협의 성이 그 세계의 아주 조그마한 일부만 가지고도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 그러한 '탈영토화'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이러한 우리 마음속의 옹졸한 성을 깨부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공돌이'들의 옹졸한 성들 중 가장 견고한 것 하나, 즉 '고문학에 대한 편협함'을 깨뜨리는 아주 재미있는 공성망치라 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최소한 연암 박지원과 그의 문학에 대해서 만큼은 팬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상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언어와 눈, 사고방식으로 재해석한 <열하일기>에 관한 것이다. 저자 본인이야 들뢰즈/가타리로부터의 '탈주', '재영토화'를 주장할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이 책 전체는 <천의 고원>의 약간 이질적인 고원으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들뢰즈/가타리스럽다. '리좀', '노마드', '홈 패인 공간' 등 책 곳곳에 이정표마냥 심어져 있어 신선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보일라치면, 아니나 다를까, 거의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들이다.

'몰적인 선분'에서 벗어나서 '지층'을 가로지르는 '탈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연암과 가장 어울리는 현대사상체계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저자가 신들린 상태에서 들뢰즈/가타리로부터 내려오는 영감을 축자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서, 이 책이 들뢰즈/가타리교 신자들에게서 정경으로 떠받들여 질 수도 있다는 우스운 공상까지 했을 정도다.

저자 자신의 목소리보다는 들뢰즈/가타리의 목소리가 더 크다는 비판을 함에도 불구하고, 연암과 들뢰즈/가타리라는 두 천재-거인의 틈새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그저 황홀해 할 수 밖에 없는 저자를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저자로부터 전해들은 연암의 기이한 일대기도 그렇거니와, 전체중 일부분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열하일기>의 몇몇 명문들만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감상하는 수많은 '살리에르'들을 문학적/사상적으로 초라하게 만들고야 마니 말이다. 그리고 연암의 비범한 생애와 작품을 염두에 둔 것같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 역시, 범인들에게 그 외에 다른 서술방식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튼 <열하일기> 전체를 읽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이 그 작품에 대한 '과장광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빠른 시일 내로 <열하일기> 완역본(원본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을 구하여 읽어 보는 것이, 전자인간이라는 공돌이가 연암의 세계에 깊숙히 함몰되거나 예전처럼 고문학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으로 돌아가거나 하는 최종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열하일기>의 완역본은 나와 있지 않는데다가 저자의 '과장광고'가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 것들이라서, 고문학에 대한 무관심을 다시 찾으려면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이나 무한의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게다가 <열하일기>는 '첨점'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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