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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평점 :
2500페이지 안팎, 총 다섯 권, 모두 읽는데 10개월... 에릭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1990년대까지의 200여년 간을 네가지 시대, 즉,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구분하여 마르크스주의자 특유의 전투적 인간애를 바탕으로 풀어 쓴 책들이다.
아무리 방대한 분량이라고 하더라도 읽는데 10개월이나 걸리다니, 너무 게으르다는 힐난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10개월 동안 '시대' 시리즈만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 시리즈는 지난 10개월 동안 내 독서생활의 중심이었다. 500여 페이지짜리 '시대' 시리즈 중 한 권을 끝내면 조금 가벼운 책들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한 두 달 후에 다음 '시대' 시리즈를 도전하고... 하는 식으로 10개월 동안의 내 독서 리듬은 '시대'의 중력이 지배했다. (참고로, 내가 읽은 순서는, <극단의 시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였다.)
그 분량때문에 숨이 막히는 '시대'는 진도 나가기에 있어서도 그리 녹록한 책이 아니다. 한 페이지를 모두 채워버릴 듯한 긴 호흡의 문장, 그 긴 문장 사이사이로 끊임없이 사고의 연속성을 훼방하며 끼워진 하이픈들 - 한 페이지에 수십개에 달하는 경우도 있음, '성문종합영어'에 실리면 안성마춤일 듯 고색창연한 문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낯선 지명과 인명 등, 읽기 힘든 책의 요소를 고루 갖춘 원저의 난독성에다가, 군데 군데 눈에 띄는 오역 - 바비롤리 경을 모차르트의 '관리자'라 해석하는 식의 - 과 무리한 직역 등 번역의 부분적인 실패, 페이지에 가득 구겨 담은 빽빽한 활자 등을 생각해 볼 때, 이 책 한 페이지를 읽는 데는 다른 책 두 페이지를 읽는데 필요한 노력과 시간이 투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다가 독자들이 그 시대의 사실들에 대해 상당정도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건들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논증에 치중한 서술방식은, 19세기 20세기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읽고 있는 현위치를 큰 지도속에서 파악하기 힘들게 하고, 심지어는 그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독자들이 이러한 부분을 만난다면, 조금이라도 이해의 끄트머리를 잡기 위해서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고통스럽게 반복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500여 페이지짜리 '시대' 한 권은 다른 평범한 책 두 권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결국 '시대' 시리즈의 완독은 십수권의 책을 읽는 것에 해당하는 과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장의 롱테이크같은 시선이 시리즈를 압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의 미덕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것은 현대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디스토피아가 형성된 과정과 현실사회주의가 망가지고 결국 무너진 과정, 그리고 그것들이 변증하는 바람직한 세계에 대한 청사진 등을 민중의 관점에서 고찰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혁명, 산업 발달, 노동계급, 여성운동, 전쟁, 사상, 예술 등 해체된 채로 이해되기 쉬운 역사의 요소들을 하나의 거대한 줄거리에 녹아들게 하여 커다란 통사관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의 미덕에 의해 역사는 연도와 사건들의 자잘한 파편에서 도도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로 변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