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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추천합니다.

 

대중들, 제프리 슈나프 지금, 매슈 튜스 엮음, 양진비 옮김, 그린비, 2015. 3.

 

 

 

 

 

 

 

 

 

 

 

 

 

 

대중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함의한다. 보통선거, 의무교육,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19세기) 초기 대중은 의식있는 참여적 존재였다면, 지금의 대중은 자본에 의해 기획된 수동적 객체로 전락했다. 스탠퍼드 인문학 연구소는 지난 2000년부터 대중 프로젝트에 착수해서 이 책을 발간했다고 한다. 또한 신뢰로운 출판사 그린비 프리즘 총서 18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기획이라고 판단된다. 대중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후 대중이 나아갈 방향성을 탐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 하승창 지음, 휴머니스트, 2015. 3.

 

 

 

 

 

 

 

 

 

 

 

 

 

 

 

87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에 시민단체가 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슈와 함께 한 시민단체의 25년을, 시민운동가 하승창이 정리했다. 저출산, 고령화와 함께 도래하고 있는 저성장 시대에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통찰이 필요한 시기에 살펴보아야 할 분야의 책이다. 90년대 참여하는 개인은 활발한 시민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다시 한번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민운동은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학의 열쇠, 로버트 M. 헤이즌 · 제임스 트레필 지음, 김영훈 그림, 이창희 옮김, 교양인, 2015. 3.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면서 과학 분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과학사회과학을 전공한 나에겐 외국어만큼 낯설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새롭게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 든다. 과학의 19개의 가 통찰의 수단이 되길 기대해본다. 원제는 Science Matters. “과학 앞에서 작아지는 보통 사람들이 읽으면 딱 좋을 최적의 과학 입문서라는 책 소개를 믿어보자면 우리에게 과학에 한걸음 다가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과학에 대하 지적 호기심을 인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도전하고 싶은 책이다.

 

과학과 인문학,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지음, 김동환 · 최영호 옮김, 지호, 2015. 3.

  

  

 

 

 

 

 

 

 

 

 

 

 

 

자기계발 열풍과 함께 삶과 무관한 불온한 인문학이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수단이 되고 있다. 진정한 인문학은 무엇일까? 인문학은 어떤 상황에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인문학을 시작하기에 앞서 정신과 몸의 일원론적으로, 혹은 이원론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문제 제기한다. 전공을 넘어선 통섭의 연구가 인문학을 상생하게 할 것이다. 저자는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과 상부상조하는 공동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면서 몸과 정신을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신체화한 인문학에 호기심이 당긴다.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창비, 2015. 3.

 

 

 

 

 

 

 

 

 

 

 

 

 

 

진중권의 미학 강의와 평론도 좋지만, 이 책에서 살펴보게 될 예술가들이 더 매혹적이다. ‘사진가 구본창, 건축가 승효상, 배우 문성근, 미술가 임옥상, 소설가 이외수,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미디어아티스트 박찬경. 이들을 한권의 책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대된다. (비판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횡무진 한국 사회 이슈를 분석하는 논객 진중권도 좋지만, 대중과 미학의 거리를 좁혀왔던 미학자 진중권은 더 좋다. 그의 정치적 판단과 해석에 매번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진정성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를 통해서 한국 거장들에 대해서 깊게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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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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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2008. 8.

 


 

    

월러스틴이 주장해 온 세계 체제는 근대 세계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의해 팽창되어온 하나의 전일적인 체제를 의미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보편적 보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더 이상 보편성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만큼, ‘보편성에 대한 혐오는 도처에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만능성을 보편적 진리로 내세웠다. 근대 서구 기독교 문명은 비서구를 미개로 규정하고, 서구적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등치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권, 민주주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성전(Great war) 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문명과 정체성을 폐쇄된 봉인된 실체로 보았던 사무엘 헌팅턴 조차 (문명의 충돌에서)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은 서구적 개념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보편 문명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서구적 생각일 뿐이다. 이는 대다수 아시아 사회의 특수주의(particularism)를 볼 때, 그리고 하나의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강조로 볼 때 서로 맞지 않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가치가 세계적 차원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 정부도 서구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이 비서구 사회에서 발생할 때는 서구의 식민주의나 강제의 산물일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럽적 보편주의에서 월러스틴은 16세기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는 문명화 사명,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55)를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로 내세우면서 세계 각 지역에 개입해 온 과정을 비판한다. 유럽이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로 내세우는 문명, 인권, 민주주의 등이 특수한 보편인 유럽적 보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적 보편주의’ - 다양한 보편들의 연대

 

월러스틴의 문제의식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일체의 거대서사 및 보편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옥시덴탈리스와 오리엔탈리스트를 거부하면서 보편적 보편주의를 획득할 것이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은 유럽과 백인을 보편적 기준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잘못 대응할 경우 유색인 역시 자기중심주의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파농은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개인이나 공동체는 없다고 보고, 각자의 폐쇄적 공간으로 퇴각하려는 상대주의 역시 비판한다. 월러스틴 역시 특수한 보편이 절대적 보편의 자기 모순적 주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특수한 보편주의를 넘어선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안한다. 다양한 보편들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과학적인 것과 인문학적인 것을 단일한 인식론으로 재통합해야 한다. 공동체의 외부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보편의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무라고 말한 바흐친의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월러스틴은 보편적 가치의 역사적 필요성을 세계체제 차원에서 연역하고, 보편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역사적·윤리적 조건들에 관해 사유하게 한다. 우리는 유럽적 보편주의뿐 아니라,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해서도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월러스틴은 분과학문을 통합하여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 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과 보편적 과학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보편적 보편주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서는 우리의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교사 역시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세가지 차원에서, 즉 진리추구에서는 분석가로서, 선과 미의 추구에서는 윤리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진선미를 통합하는 데 있어서는 정치가로서 활동(139)해야 한다.

 

 

 주1> 에드워드 사드의 헌팅턴 비판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문명을 실체로 규정한 점, 둘째, 서구 대 비서구라는 냉전의 사고 방식이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로 대표되는 유럽 북미 문명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강우성(2008), ‘역사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묻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저, 김재오 옮김’, 영미문학연구회, 안과밖 25,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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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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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더불어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 아름다운 글자

 

한자의 탄생,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한문에 해박한 중년의 수학 선생님이 계신다. 말씀도 많이 하지 않지만, 가끔 하시는 이야기도 한학자처럼 고전적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을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요즘 아이들이 견뎌낼 수 있을까? 졸음 쏟아지기 딱 좋은 조건이다. 예상외로 반전이 있다. 선생님은 꽤 인기 있는 수학 선생이다. 수학 원리를 한자로 풀어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참 좋아한다. 요란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교실에 번진다.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없어도 아이들 눈빛이 맑아진다. 한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수학을 향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글자마다 고유성(개별성)을 지닌 갑골 문자는 각자의 형상에 알맞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글자마다 조형이 될 수 있었던 기원이 있다. 유사할 수 있어도 동일한 글자는 없다. 시간에 따라 글자의 쓰임이 바뀌고, 쓰임은 글자의 외양을 다르게 만들며 분화했다. 글자에 쌓인 의미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문자와 문자가 서로 다치지 않으며 의미의 호환을 이룰 수 있었다. 거북 뼈에 새겨진 글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사유 방식과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글자를 도구가 아닌, 철학으로 바라보게 하는 까닭이다. 시간을 분절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용되지 않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멸하거나 정체된다. 태양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에 관한 글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태양은 생존과 생산에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문자는 시간을 붙들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갑골 문자는 상형, 전주, 가차를 거쳐 왔다. 소멸하는 시간은 글자로 물화(物化)되어 새겨지면서 축적되었다. 인간의 사유 과정이 주체적 위치를 상실(22)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문자는 인간을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 유산은 문자를 통해 켜켜이 쌓여왔다.

 

이 책의 미덕은 갑골 문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자를 근현대의 문학·철학·미학과 연결하는데 있다. 사상가의 주장을 갑골문자 해석에 차용하는 방식이 놀랍고 재미있다. 꼬리 미()를 보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자신의 아내이자 작가인 주텐신의 나는 법을 배우는 멍멍을 떠올리며 꼬리 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적인 감수성을 풀어낸다. 과도한 주관, 헤밍웨이와 보르헤스까지 들어가면 꼬리 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로 표현한다.

 

저자는 야만인의 신화 형성 과정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를 차용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선공이야기를 가지고 언어의 변천사를 설명한다. 수선공의 수선 과정은 이미 형성된 문자를 새로운 요구에 맞게 고쳐 쓰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공구를 가지고 원래 있던 사물을 다시 쓸 수 있게 수선하는 과정, 처음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게 고쳐내는 것,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지만, 용도에 적합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 손에 어떤 도구(글자)가 있는지의 한계 상황이 지배한다. 글자는 완제품의 형태가 될 수 없는, 어딘지 부족한 상태로 계속 만들어지고,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아인슈타인이 추구한 대리석 무늬 속의 세계는 부호 세 개로 구성된 투명하고 확고한 세계다. 이와 반하여 나무 무늬 속의 세계는 짐작하겠지만, 수선공이 머무는 세계로 우연을 통해서 끝없이 변주되는 세계다. 글자의 세계는 부서지고 못이 박히고, 박힌 못이 빠지고, 빠진 흔적에 나무 조각이 덧이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매끄럽고 완벽한 빛의 세계가 아니라, 부서지고 고쳐 쓰는 불안한 어둠의 세계다.

 

보르헤스는 인간 세계에 완벽한 사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 세계의 사물에 일일이 대응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는 개념과 창조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생각들을 재빨리 찾아서 신나게 표현할 수 있는 사전은 존재하지 않는다.(122) 나의 생각이 타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미끄러질 때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내면을 채운다. 결국 우리는 차선책으로 언어를 존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한가로운 구경꾼, 진정한 문인, 발터 벤야민은 탕누어가 꿈꾸는 진정한 학자인 듯하다. 암울했던 삶과 비운의 죽음 속에 밀봉되어 있는 벤야민의 글은 반세기 이후에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고대의 중국 글자를 대했을 때 벤야민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한 저자의 상상은 유쾌한 농담처럼 받아들여진다. 벤야민에 대한 저자의 연모는 나 또한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여기에 직접 인용한다.

 

벤야민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 가장 애석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애석한 인물은 폐병으로 마흔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체호프이고 그 다음이 반 고흐다. 고흐는 자신을 완전히 불태이고 나서총으로 자진했다.) 그는 좌익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내 게슈타포의 추적과 박해에 시달려야 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가난과 병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194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절망적인 자살을 선택하게 됐다. 마흔여덟의 나이, 당연히 그의 사상도 가장 성숙했을 시기였다.”(160~161)

 

 

저자 탕누어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는가?

 

빠르게 쓰기 위한 목적의 간편화가 진행되면서 표음&표의 문자. 과연 표음 문자는 부호화에 투항한 것일까? “어떤 세속의 권력도 문자를 통제할 수 없다.”(286)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질량이 가볍고 부호가 투명하며 운동 저항력도 적은 완벽한 언어 기록 도구”(50)가 되면서, 언어가 자주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6천종의 서로 다른 말들이 매달 두 종씩 사라진다는 데이비드 크리스털(언어의 죽음)이 맞다 하더라도 언어 역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사멸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사유방식이 변화하듯, 언어 역시 인간과 함께 변화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출발이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기 위한 기록에서 시작되었다면,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21세기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는 연대의 힘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국어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탕누어의 말대로 보호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331)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을 떠올린다. 집안의 특수한 유전자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린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아버지는 명랑한 표정으로, 세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고 답한다. 그 아버지가 탕누어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탕누어는 시간을 회귀하여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 문자와 현대를 접합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가져오는 고전만 보기에도 인간의 시간은 매우 짧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저자 탕누어의 책과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일로 채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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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과 경칩을 거쳐 봄이 왔습니다.

봄 눈도 내리고, 꽃샘 추위로 다녀가겠지만, 이미 와버린 '봄'을 어쪄겠어요.

모두... 좋은 봄이 펼쳐지기를..바라며 신간도서 추천합니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윌컴퍼니, 2015. 2.

 

취미로 그림을 시작했을 때, 화가 선생님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따라 그리게 했다. 좋은 작품을 그리다 보면, 자신만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모사를 하다 보니, 무엇을 그려야할지, 어떻게 그려야할지 결정하지 못했던 막막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저자 카롤린 라로슈는 작품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미술사의 이해를 돕는다. 노암 촘스키는 세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고 했다. 예술은 축적된 문화의 결과물이다. 이 책을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술사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 200여 점의 화보 때문이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2.

 

한때 바르트에게 위로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실연의 상처로 바닥이었다. 우연히 철학자 강신주의 강의를 듣고,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을 다시 읽게 되었다. 오래전 내게는 수사학으로 가득했던 책이었다. 탈구조주의를 공부하고 난 다음 읽게 된 책은 변주되는 기호로 가득했다. 바르트 철학은 끝없이 변주되는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바르트가 준비했던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에 초대받고 싶다.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존 던 지음, 강철웅, 문지영 옮김, 후마니타스, 2015. 2.

 

타는 목마름으로외치던 절박했던 민주주의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사회만의 상황은 아니다. 시대에 대한 고민을 함께해온 후마니타스가 내 놓은 신간 민주주의의 수수께끼는 민주주의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한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어떻게 나아가게 될 것인지를 이해하는 자료로 의미 있을 것이다.

 

 

 

 

 

 

 

 

 

 

 

 

 

 

쓰고 태워라, 샤론 존스 지음, 김민준 옮김, 자음과모음, 2015. 2.

 

제목만 보면, 넘쳐나는 사적인 글을 없애야한다는 말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은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온전히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통해서 나를 한권의 책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형, 태희원 지음, 이후 옮김, 2015. 2.

 

얼마 전 흥미롭게 보았던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자폐적 자아를 가진 한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도 좋았지만, 키이라 나이들리 역시 인상적이었다. 영화 외적으로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나이들리가 한국 여배우였다면 소속사에서 기어이 양악 수술을 하게 했을 거라는 우스게스러운 상상을 했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성형은 자기관리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타자의 시선이 완성되는 곳이 자기 몸이다. 성형이 자기완성 프로젝트이자 의료 자본주의의 끝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포섭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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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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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항대립 속에 존재하는 21세기 서울,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2014. 12.

 


 

 이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면적 605.28,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분석은 끝이 없다. 서울에 대한 분석은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모든 기제에 대한 분석을 동반한다. 서울과 서울 아닌 곳, 둘로 나뉘지는 21세기 한국은 서울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거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속에서도 서울만의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명사 서울은 보통명사의 속성을 갖는다.

  

  

서울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이후, 지식인 산책자들은 경성 곳곳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가져왔다. 작년 딱 이맘때 출판된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민음사, 2014. 1.)는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http://blog.aladin.co.kr/educaso/6918092) 서울의 밑 낯을 보는 일은 '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다.

 

 

넘쳐나는 서울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의미 있다는 것은 과잉 개발의 건조한 도시가 여전히 진화하는 생물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해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경제학 교수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류신과 다른 시점에서 서울에 접근한다. 시간과 공간, 구조와 개인의 교차점에서, 보편과 특수의 총체로서 서울을 바라본다. 경제학자의 인문학적 기술은 사이사이 분석을 요구한다. 낭만적 키워드나 (‘그땐 그랬지식의 어법을 사용하는) 추억의 말랑말랑함은 아니란 이야기다. 경제학과 민족지학이 결혼해서 한집에 사는 느낌이다. 류동민 교수의 감수성과 문체는 그가 얼마나 문학에 천착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재는 구체적으로 저자의 관점을 드러낸다. 4개의 장을 구성하는 소제목은 좀 더 서울을 명확하게 한다. 배제와 물신, 남겨진 공간 & 사라진 공간, 등고선의 은유, 높이 날고 싶은 은유가 서울의 키워드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매번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를 이번에는 참신하게(??) 지방에서 진행하자고 하여 전주에서 열렸다. 학회 참석한 교수님과 연구자들은 거의 여행자의 복장과 태도였다. 청명한 공기에 대한 찬사, 한상 번듯하게 차려진 음식에 대한 칭찬, 느린 삶의 방식에 대한 부러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아파트값에 대한 감동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결론은 그래도서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서울은 여전히 성공한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몇 배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번 벗어나면 재진입이 어려운 공간이다.

    

 

몇몇 공간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다. 스타벅스의 영업 방식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지 않은 스타벅스 컵 사이즈에 대한 논란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을 보면, 고급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스타벅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스타벅스 관계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스타벅스의 사이즈가 tall, grande, venti라는 것에 문제 제기를 했다. 스타벅스에는 아메리카노 short 사이즈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카페 short 사이즈와 스타벅스 tall 사이즈가 같다는 것. 나는 왜 한번도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냥 스타벅스 방식을 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한 것이다. (이는 IKEA의 한국 상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값싼 가구를 좋아할 것이라는 분석은 정확했지만, 인터넷 정보력은 세계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 구매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만만한 소비자는 아닌 모양이다.^^)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도 여섯 가지를 결정하도록 만듦으로써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곳(39)”이 스타벅스다. 우리 동네 카페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레드, 블루, 엘로우 중 선택하라고 한다. 그야말로 선택 과잉이다.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버버리를 입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반백의 노인들이라면 모를까,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의 도움 없이 오늘날의 한국 카페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다.

    

 

대립이항의 분리 속에 존재하는 서울, 한국은 서울 아니면 모두 지방이다. KTX는 모두 서울에서 출발하고, 서울로 향한다. 서울은 지방을 외부로 분절되어 있고, 강북과 강남이 내부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도 무수한 대립 항이 존재한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해결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61)

 

아파트가 여전히 부의 상징인 점은 한국 사회의 매우 특이한 점이다. 다른 선진국은 개발 초기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교외 전원주택으로 상류층이 대거 이동해왔다. 한국은 산업사회를 넘어선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부자들이 아파트를 선호한다. 모 아파트 광고에서 이민정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데려다 준 선배에게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키자, 선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파트의 브랜드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 취향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준다. 그 이후에도 아파트 광고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보여주는 자격증이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을 벗어나면 주변 외곽일 거라는 기대를 깨고, 이제 서울은 일터, 제주를 삶터로 닦아가는 상류층이 늘고 있다. 제주도 땅값을 뒤흔드는 그들은 시공을 포갤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과 바다를 넘어 제주도를 제2의 서울로 만들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재현하는 저자의 어려움이 컸던 만큼, 읽는 독자의 감동은 컸다. “중의적이고 불투명한 글”, 그래서 발생하는 미학적 가치는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문맥 사이 호흡도 길어지고, 말랑말랑하는 문장 속에서 맑스 경제를 떠올려야 한다. 때때로 저자가 읽은 문학과 영화가 곳곳에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서울을 연구의 대상으로 변주했듯, 서울에 대한 개별적 경험은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총체적으로 만난다. 잠시 서울에 머물고, 오래오래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서울을 현재로 호출한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매번 서툰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설레임 속에서, 언젠가 사람이 떠나도 장소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명징한 확신을 한다. 서울은 그렇게 과거이자 현재로, 분석의 장소이자 느낌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공간 실천을 행동을 불러오는 특수성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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