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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문학동네, 2015. 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모두 챙겨본 것은 평론가 이동진 덕분이다. <아무도 모른다>(2004) 이후, 히로카즈의 영화는 조금씩 가벼워지고, 높여간다. <환상의 빛>(1995),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는 모두 죽음을 모티브로 한다. 관객으로서 불편함이 조금씩 덜어진 것은 영화 주제의 변화에 있다. 애초에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죽음을 향한 포커스가 삶으로 옮겨졌다. 죽음은 기억하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실패조차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 이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이번에 출간된 히로카즈 책, 『걷는 듯 천천히』는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를 연상하게 한다. 아직까지 자동차가 없다는 저자의 삶이 읽히는 제목이다. 이 책은 2011년부터 니시니폰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 중심이 된 첫 에세이집이다. 일상을 가볍게 그리고 있지만,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는 배경을 만들어준다. 오디션 프로를 연출할 당시, 오디션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때 저자의 자세는 걷는 듯, 천천히.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는 늘 그렇게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속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바라볼 때, 남들이 보지 못한 이면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대상은 예술이 된다.
현란한 언어, 철학 담론에 갇힌 글이 아니라서 참 좋다. ‘천지유정(만물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의 사유 방식을 갖고 있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따뜻한 마음으로 읽다 보면, 눈가가 촉촉이 젖어 온다. 나의 사적 경험과 감독의 생각이 빚어내는 천지간 슬픔이 베어 나온다. 저자의 아버지 상중에 도착한 타임캡슐 편지, 15년 전 아버지가 써두었던 편지다. 한 통의 편지로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가 만난다. 가령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아버지로 분한 오다기리 조가 한 이야기에서 말이다. 이렇게 툭하고, 눈물샘을 자극한다.
“세상에는 쓸데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 막혀서 못 살아.”
히로카즈의 영화를 본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영화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장소를 확장한다. 현재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문제투성이의 주인공이 문제에 직면한다. 감정이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평범한 인간이 커다란 올바름과 작은 고통 사이(216쪽)에서 흔들린다. 영화뿐 아니라, 문학 또한 그러하다.
각각의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한 장을 채운다. 히로카즈의 GV에 초대받은 듯하다. 좋은 영화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 감독에 대한 배우의 신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히로카즈의 질문에 케 로치 감독이 다음과 같이 답했듯이.
“괜찮았어요. 많은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았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부서지더라도 회복할 자신이 있었습니다.”(153쪽)
『걷는 듯 천천히』는 히로카즈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읽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