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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이것은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다. 철학에 관한 입문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축을 위한 철학』 브랑콩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이 책을 읽기 전 나의 접근법은 다음과 같았다.

 

철학이 건축과 만났다. 이 책은 사적 공간으로써 거주 수단을 넘어 서서 공공재로 일상을 담아내는 사회적 공간이 되고 있는 건축을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건축은 인문학의 기초 위해 세워져서 문화적, 역사적, 환경적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공공 건축에 한 평생을 바친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의 마지막 전시회와 다큐를 보고 난 이후, 건축에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가는 ‘자기 언어를 지닌’ 철학자여야 한다. 철학이 언어로 집을 짓는다면, 건축은 벽돌로 철학을 쌓는다. 『건축을 위한 철학- 세상에 단 하나뿐인』은 건축물이 제작된 사회적 맥락을 철학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읽고 나면, 이 책이 건축에 관한 책이 아니라, 철학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간극이 즐거운 독서를 방해하지만, 얇고 넓게 건축으로 달콤하게 코팅된 철학사의 기록을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건축가인 저자는 참과 거짓을 논증하는 기능에서 출발하여 선험과 경험이라는 철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비켜나서 철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는 철학은 시각적 상상에 대하여 탐색해야 한다고 본다. “시각적 이미지와 문장은 둘 다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을 표현하지만,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25쪽)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의 칸트, 낭만주의, 역사주의, 현상학, 해석학에서 분석철학까지 각각의 시대를 지배했던 철학 담론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철학과 건축을 연결하기 위한 고민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이어진다. “건축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플라톤의 존재론을 병치하고, 플라톤의 이데아의 영원성과 건축을 연결한다. 참과 거짓의 논증은 - 절대적인 참이나 거짓이 없고, 오로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강조한 - 소피스트의 극단적 상대주의에서, 우리가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사물의 작은 모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상과 연결한다. 역사와 정신의 제도공인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설계의 주인인지 유명론과 실재론에서 건축가의 위치를 묻기도 한다.

 

특히 칸트의 세 가지 순수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중에서 미학을 다루고 있는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건축과의 깊은 연관성을 다룬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의 추론 능력이 개인이 속한 집단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추론 능력은 보편적이며, 가능한 경험의 필요조건은 개인의 문화적·민족적·인종적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다고 가정한다.”(113쪽) 반면 계몽주의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는 합리적인 측면 보다는 감정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노골적으로 낭만주의자들이 과학을 신뢰하지 못했고,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한다.(129쪽) 역사주의자 헤겔은 -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하듯이 - 건축 또한 역사발전의 단계로 설명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상징적 건축, 그리스는 고전적 건축, 낭만주의 건축과 고딕은 낭만적 건축에 해당한다. 이는 신(神)의 생각과 사고의 순서와 동일하다.

 

짧고 빠르게 읽으면 이해불가의 책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축을 위한 철학』이 건축 이야기가 가미된 철학 개론서라고는 하지만, 한번으로 짧게 읽고 이해될 내용의 책은 아니다. 훗설, 하이데거, 니체, 소쉬르, 바르트,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로 이어지면서 현대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독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현상학과 해석학, 후기 구조주의로 들어서면 현대철학의 현란한 언어에 갇히게 된다. “언어 속에 거주”하는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상황과 사회로 내던져진” 현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객관적 세계와 독립적인 세계관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는 건축과 무관하지 않은 함의를 담고 있는 <짓기, 거주하기, 사고하기>(1951)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후기구조주의의 영향은 건축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저자의 죽음’은 “기능을 하지 않는” 건축으로 기능적 고려를 거부하는 피터 아이젠만과 같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앨런 소칼의 통쾌한 실험에서 얻어낸 통찰

 

난해함 속에서 위로와 웃음을 제공하는 것은 뉴욕 대학 물리학자 앨런 소칼의 정치적 행위다. 좌파인 소칼은 1996년 후기 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에 큰 타격을 준 ‘가짜 논문 사건’을 일으킨다. 저명한 후기구조의 학술지에 그가 발표한 “‘양자 중력’이라는 물리 이론의 자유주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논문”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논문이었다. 그가 대항하고자 했던 것은 합리적 사고와 논리적 분석이 불평등을 유지하는 신비화전략으로 보았다. 이 가짜 논문 사건은 현란한 언어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권력적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이 책이 ‘건축 이전에 철학’을 강조하고 있음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교양서 보다는 건축학을 비롯한 이공계 학생을 위한 ‘철학입문서’로 기획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때문에 저자는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철학의 표피를 걷어내고 디지털 기술에 따른 시각성이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나는 아직 후기구조주의가 하향세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441X

 

  

덧붙여 : 저자가 ‘건축’을 전공한 이공계 학자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전과 다르게 출판사의 의도가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책의 핵심 부분을 다른 색으로 도드라지게 표시해주는 ‘과잉 친절’이 몹시 거슬렸다. 내 심장 스스로 밑줄 긋게 하는 부분을 만났을 때 독자가 누려야 할 자유와 새로운 창작의 기쁨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수험생이 아니라면, 우리가 만나야 할 고딕 글자는 각자 다른 법이거늘, 꼭 동일한 부분에서 포인트를 찾아야하는지 모르겠다. 책은 text가 아니라 context다. 독자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체적 참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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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3-04-2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빠르게 두 편을 다 올리셨네요..저는 아직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책은 매력 있는데...암튼 진도를 빼야겠어요...^^
철학가와 건축의 만남,,
짓기, 거주하기, 사고하기!!!!

4월,행복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