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with 리아트리스 님
Q.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은?
A.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는 곧 소설을 읽는 이유와 상통하는데, 다름 아닌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함과 스릴 넘치는 재미, 기존의 재미를 다시 뛰어넘는 새로운 재미. 우리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궁극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책이라면 눈만 피로하고 책장을 넘기느라 손가락 관절만 아플 겁니다. 아무리 대단한 철학과, 감동과, 메시지와 문학적 진정성 같은 게 들어있다 하더라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책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책이라면 그냥 덮어버리죠.
또 추리소설에는 순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마구마구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건이 터지면 독자는 과연 범인이 누구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책 속의 탐정과 함께 호흡하고 단서를 수집하며, 나름의 추리를 펼쳐 나갑니다. 탐정과 두뇌게임을 벌이는 것이죠. 그렇게 놀라고, 긴장하고, 추리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며 책을 읽으니 자연히 소설에 몰입하게 됩니다. 더위를 잊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지요. 탐정과의 두뇌게임에서 이기든 패하든, 독자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고, 그 탐정의 다음 사건,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됩니다. 추리소설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내 인생의 추리소설' 5권을 꼽는다면.
A.
1)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죠. 이 소설이 유명한 이유는 그 대단한 반전 때문일 겁니다. 그때까지의 추리소설 상식이나 법칙들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논란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라스트의 반전 때문에 이 소설은 추리소설 매니아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며, 이후의 추리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함께 크리스티 여사 3대 걸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최후의 비극>, 엘러리 퀸 지음
크리스티 여사 다음으로 좋아하는 추리소설가,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비극 시리즈 중에서는 <Y의 비극>이 가장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비극’에 강하게 이끌렸답니다. 이유인 즉, 가장 좋아하는 탐정인 드루리 레인의 마지막 활약상이 담긴 소설이었기 때문이죠. 비극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으며, 추리소설 사상 가장 가슴 아픈 라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3)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최고 매력남, 말로의 매력에 진정으로 빠져버린 소설입니다. 챈들러의 문장은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단단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물이 되어 녹듯 문장은 짙은 허무와 슬픔으로 녹아내리며 아득한 향수를 자극합니다. 사랑 이야기가 전면에 녹아 흐르는 이 가슴 시린 추리 소설에 더없이 어울리는 문장들이죠. <안녕 내 사랑아>는 말로 시리즈 중 가장 매력적인 소설이며, 아름답고 애처로운 소설이기도 합니다.
4) <상복의 랑데부> /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 지음
사랑하는 연인 도로시를 기다리는 남자, 조니 마. 그러나 연인은 오지 않습니다. 도로시는 이미 죽었지요.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섯 명의 용의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조니는 다섯 번의 살인을 도모합니다. 사랑하는 도로시를 죽였을 것이라 짐작되는 다섯 명의 용의자들 모두에게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려는 것이죠. 도로시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복수의 집념에 한꺼번에 사로잡힌 비운의 사나이, 조니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이리시는 특유의 날렵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잔혹한 복수극을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아이리시의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5) <바늘구멍> / 켄 폴리트 지음
히틀러를 2차 대전의 승리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급 정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숨 막히는 도주와 추적의 파노라마. 그리고 그 속에서 전개되는 위험한 사랑! ‘바늘구멍’은 켄 폴리트의 대표작으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중에 쉽게 책장을 덮지 못하는 강력한 흡인력과 서스펜스를 갖춘 추리소설입니다. 특히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엘러리 퀸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표되던 고전 추리소설의 틀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현대 추리소설의 전형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의 작품을 어설프게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로 너무도 훌륭하게 추리소설의 역사를 새롭게 쓴 것이죠.
6) <이유>, 미야베 미유키 지음
최근에 가장 좋아하게 된 추리소설가,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미 여사의 대표작이며 역대 나오키상 수상작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걸작이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지, 그래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진실에 접근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한편, 현대사회의 고도성장에 따라 함몰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과 반성의 기회도 함께 마련합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정말 이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과연, 대단하다. 정말, 재미있다. 미미 여사의 역량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Q. '올해 여름, 필독을 권하는 추리소설'이 있다면?
A.
1)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두 천재가 격돌합니다. 한 명은 천재 수학자, 또 한 명은 그의 친구인 천재 물리학자. 한 명은 너무도 완벽한 답을 던지고, 다른 한 명은 그 답이 완벽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살인이라는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시키기 위해 천재 수학자가 선택한 완전범죄의 방법은 무엇이며, 또한 천재 물리학자는 어떻게 그 완전범죄의 비밀을 풀어 낼 수 있었을까요. 라스트에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독자는 가슴 저미는 충격과 뜨거운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2) <살육에 이르는 병>,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살아있는 여자는 사랑하지 못 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죽이고, 시체를 훼손하며 궁극의 사랑을 꿈꿉니다. 피가 낭자하고, 끔찍한 살육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아들이 살인자일 것이라 의심하며 지켜보는 엄마와, 살인자를 쫓는 전직 형사가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차를 보이며 진행되고, 마지막 반전을 향해 숨 가쁘게 교차되며 달려갑니다. 그리고 최후의 한 페이지에서 대반전이 펼쳐집니다. 그 반전으로 소설은 새롭게 시작되고, 다시 해석됩니다. 그 엄청난 반전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은 필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반전의 강도만 놓고 본다면 어떤 선배 추리소설들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대단합니다.
3) <시계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이 소설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대표작으로, 역시 라스트에 사건의 전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핵폭탄 같은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공포소설로 분류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긴장감 넘치고, 무시무시한 살인 장면들로 시종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살인귀’라는 전대미문의 공포소설을 발표한 작가의 저력이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독자는 책을 펼치는 순간 공포와 서스펜스의 이중 트랩에 꼼짝없이 걸려들며 여름밤의 무더위와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4) <사라진 이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아내를 살해하고 자수한 전직 경감 가지 소이치로. 맑은 눈빛에 온화한 성품을 지닌 그는 죄를 순순히 자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아내를 살해한 후 이틀 후에 자수를 했다는 것. 그리고 일 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는 것. 가지 소이치로는 공백의 이틀 동안 무엇을 했나? 그 이틀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일 년을 더 살기로 작정했나? 극이 진행되고, 챕터가 바뀌면서 다양한 직업의 관찰자들이 등장하고, 나름의 소신과 수단으로 사건을 풀어가지만, 의문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풀립니다. 가지 소이치로가 끝까지 지켜 내고 싶었던 눈물겨운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대중적인 재미와, 문학적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작입니다.
5)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이 소설은 대단히 매혹적인 추리소설입니다. 시종 서정시를 읽는 듯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소설은 매 페이지마다 은은한 빛과 향기를 발합니다. 그러나 스토리와 플롯을 살펴보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만큼이나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합니다. 책을 여는 순간 낯선 이국땅으로의 길고 험난한 여행이 시작됩니다. 따뜻한 감성으로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드는 동시에 냉철한 이성을 끊임없이 발휘하며 거미줄처럼 얽힌 서사구조를 따라가고 해석해야 하는 독특하고 멋진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Q. 내 인생의 '첫' 추리소설은?
A. 추리소설 한 권을 혼자 힘으로 깔끔하게 독파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홈즈와 루팡의 대결>이라는 문고판 추리소설이었죠. 모리스 르블랑이 쓴 소설이며, 마지막에 괴도 루팡이 명탐정 홈즈를 이기는 분위기로 끝을 맺어 어린 마음에 아쉬움과 배신감 같은 걸 앙금처럼 남겼던 작품이죠. 당시 엄마에게서 홈즈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당연히 홈즈는 어린 시절 저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죠. 하지만 이후 심심할 때마다 그 책을 반복해서 읽었고, 그렇게 열 번 정도를 읽게 되자 나중에는 루팡도 홈즈와 똑같은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악당도 멋있을 수가 있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우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죠.
Q. 재출간을 바라거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길 바라는 추리소설/작가가 있다면?
A. 해문에서 출간된 빌 밸린저의 <사라진 시간(가장 긴 시간)>을 읽고, 당연히 작가와 작품에 반해버려 밸린저의 다른 작품을 찾았지만 국내에 출간된 소설은 <사라진 시간> 단 하나가 전부였습니다(그나마 품절이라 이제는 구하기 힘듭니다). 밸린저가 쓴 소설들이 얼마나 많고, 그의 대표작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어째서 그의 작품이 국내에 이다지도 소개가 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서 간혹 밸린저의 소설이 언급될 때마다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됩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와 손톱>, <빨간 머리 남자의 아내>, <침대 속의 시체> 등이 어서 국내 출판사의 옷을 입고 번듯하게 출간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한 작가, 그 유명한 관 시리즈를 탄생시킨 일본 신본격추리소설의 기수, 아야츠지 유키토. 아야츠지 유키토는 밸린저 못지않게 다작을 하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데뷔 초창기에는 일 년에 장편을 두세 편씩 써내면서도 특유의 재미와 완성도를 잃지 않아 독자와 비평가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 왔죠. 그러나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아야츠지 유키토의 소설은 한즈미디어에서 출간된 <십각관의 살인>과 <시계관의 살인> 두 편이 전부입니다. 곧 <암흑관의 살인>이 출간된다고 하는데, 기실 제가 출간을 희망하는 소설들은 그의 초기작들입니다. <수차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인형관의 살인> 같은 초기 관시리즈와 <무월저 살인사건>, <암흑의 속삭임>, <살인귀>같은 호러/미스터리 소설들이 어서 출간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 자기 소개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블랑으로 시작해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을 거쳐, 지금은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코에 열광하고 있는 자칭 추리소설 매니아, 리아트리스입니다. 추리소설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궁극의 재미와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장르 같아요. 그래서 한번 빠져들면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