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초은하단과 행성 > 조선엔 자생적 근대화 능력 없었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통계학을 통한 조선후기의 경제사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할 만한 가치의 책임엔 틀림없겠다. 비록 내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의도적 무관심으로 일관한 시기가 길었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접해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읽기에 다소 불편했음에도 나름의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편저자의 자격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는 공동연구의 대표자나 이 연구를 수행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창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편저자에게 대중적인 명성을 안긴 것도 어찌 보면 다소 불미스럽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였으니 이로써 책의 취지와 대략적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당시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할 말은 없다. 다만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해 본 편저자와 이 연구소의 시각과 주장 등은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내용들이 많긴 했지만 그런 선입견을 버리도록 노력하면서 책을 읽었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일괄하는 핵심으론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과 자생적 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한 질타로 정리할 수 있겠다.

19세기 조선은 이전 시기의 안정기를 거쳐 인구수의 감소, 물가의 폭등, 실질임금의 하락, 장시의 감소, 시장의 분열, 산림황폐화에 따른 농업생산성의 하락 등 다양한 경제적 측면에서 침체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비숙련노동자의 임금이 숙련노동자의 임금을 압도하는 등 비시장경제적 면모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개항을 통해 외부세력들과의 접촉을 통한 신문물의 이식이 이루어지면서 혁파되기 시작했고 식민지기에 비로소 근대적 경제체제가 성립되었다. 결국 일본이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유포시켰던 조선사회정체론이 학술적으로 유효성을 입증 받은 셈이다.


이 책은 장기 프로젝트의 1년차 결과이므로 이후의 연구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책 자체는 식민지근대화를 직접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진 않는다. 그러나 내재적 근대화론에 거대타격을 가할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와 연관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서구적 근대화를 유일모델로 설정하고 있다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이 책이 다루는 것 그리고 일반적인 식민지근대화론은 결국 경제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라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근대화를 거칠게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 진전과 경제적 영역의 산업화 증대로 구분했을 때 후자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경제 발전이 있은 연후에야 정치 발전이 가능하다는, 교과서적인 차원에선 상당한 비중으로 통용되지만 그 실증적 전거는 모호하고 이데올로기적 혐의도 짙은 이런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면, 그래서 정치영역을 일단 제외할 경우 경제와 사회 영역에 있어서 식민지근대화론은 나름의 학술적 증거들을 보유하고 경시 못할 토대를 구축했음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 측면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로 장착될 이 책의 의의 역시 상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시점에선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자생적 근대화론의 가능성 등에 특별히 개진할 만한 소회는 없지만, 다만 데이터의 절대부족으로 인해 어느 정도나 신빙성 있게 이 연구들을 대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물론 이 정도의 자료발굴과 가공도 쉽지 않았고 그런 면에서 이 연구가 격찬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모든 논문에 있어서 데이터의 부족과 과도한 가정 추측의 존재, 시론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연구자들 스스로의 잦은 고백은, 이 연구들의 결과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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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사람에 의해 자신의 삶이 나아지고 있음을...

 

 

...상당히 깊이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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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가 아닌 이국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언어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모국어로 2시간 내에 쓸 수 있는 내용을 번역하기 위해 5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현실은 가끔씩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ㅡㅡㅋ...그게 아니라 성격이 나쁜 탓인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짜증은 고스란히 쓰고 있는 내용의 주제인 나폴레옹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왜 태어나서 나를 귀찮게 하냐고 따지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행동이겠지만, 나 역시 이타적이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사람인지라...(너무 자의적인 해석인가?!ㅡㅡ^... 나중에 좀 더 연구해 봐야겠다...) 지금으로선 뭐든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임이 더 큰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듯... 꼭 나폴레옹 그가 아니었어도 어느 누군가가 혹은 어느 사건이 이 순간에 나를 괴롭힐 것임이 자명하거늘...

됐다... 잡담은 그만하고...ㅡㅡㅋ..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그가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하나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영웅이란 없다고 결론내렸다는 것은 이미 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며,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전문가 또한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그에 대해 어찌어찌하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레포트를 매개로 잠시, 그리고 아주 살짝 그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 보며 머리 속을 맴도는 한 가지 의문은 그가 왜 황제가 되었을까하는 점이다...

왜 그는 제1통령이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채 종신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황제라는 명칭과 지위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역사책은 그가 야심이 많고 기회주의에 순종하는, 그리고 그 능력만큼은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말은 맞는 말일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7개 왕국과 30개의 공국의 지배자 자리에 그의 형제 친척들을 앉히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공화주의자 음악가 베토벤으로부터 '속물'이라는 소리를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환경적 요인은 잠시 배제하고 결론을 낸다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이건 너무 상투적인 결론이 아닌지...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국민들은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 국민의 범위가 어디까지 적용되는지야 알 수 없지만 능력중심의 체제를 확립한 그가 당시 능력있는 중산계층으로부터 호응을 얻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엘바 섬에서 돌아왔을 때도 국민들은 그를 지지했으며, 그 지지 덕분에 다시 한 번 황제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물론 말그대로 백일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이렇게 사랑을 받는 순간에 오히려 욕심을 버렸더라면 그는 정말 괜찮은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텐데...하는 아쉬움... 그가 마지막에 언급한 세 마디 중에 <프랑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는 정말로 프랑스를 사랑하고 프랑스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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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더위에 관하여

 

 

 

 

* 사실 이 글은 언젠가 했던 주장의 재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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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부스>라는 영화는 어디 있는지 모를 저격범에 의해 공중전화 부스에 갇힌 남자(콜린 파렐)의 수난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서 주목할 장면. 남자가 공중전화를 지나치게 오래 쓰자 화가 난 여자들이 ‘기도’를 데려온다. 기도는 방망이로 전화부스를 두들겨 깨고,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그런 남자에게 저격범은 “내가 해결해 줄까?”라고 재차 묻고, 남자는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기도는 저격범이 쏜 총을 맞고 몇 걸음 걷다가 즉사하는데, 신기한 것은 여자들의 반응이다.

“나쁜 자식, 죽이기까지 하다니!”는 흔히 있는 반응이라 쳐도, “저 자식이 쐈어요. 내가 봤어요” “권총을 갖고 있었어요”라고 경찰한테 말하는 건 전화만 걸고 있던 남자로선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이 직접 봤다는데 “내가 총이 어딨냐”고 아무리 우겨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에겐 만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지만, 사람은 거기에 자기 마음을 더해서 사물을 바라본다. 족구를 하다가 아웃이냐 세이프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일이 흔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십년쯤 전 내 여친이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냈을 때, 옆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본 나와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이 180도 틀린 것도 내 생각처럼 “일부러 거짓말 하는 것”만은 아니었을거다. 다시 얘기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믿는만큼 보고, 자신의 신념을 눈을 통해 재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꼭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작년 여름이 오기 전, 언론에서는 ‘십년만의 더위’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막상 작년 여름의 더위는 십년 전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밤 12시에도 30도를 넘는 불볕더위, 에어콘이 동이 나고 사람이 죽기까지 했던 그 더위에 비하면 작년의 더위는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94년 7월에는 밤에 30도를 넘는 ‘열대야’ 현상이 27회나 있었던 반면, 작년 여름에는 단 세 번에 그쳤다는 통계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올 여름은 정말 덥다”며 손사래를 쳤고, 심지어 ‘94년보다 더 더웠다’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십년 전 기억을 잊어버린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만, ‘십년만의 더위’를 소리높여 외친 매스컴과 거기에 세뇌당한 사람들의 습성이 더 큰 이유이리라.


여름으로 치닫는 4월, 올 여름은 “백년만의 무더위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그러냐고 물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그런단다. 작년은 십년만의 더위, 올해는 백년만의 더위?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해마다 더위를 강조하는 게 혹시 에어콘 회사들의 농간은 아닐까? 십년만의 더위로 작년에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니, 올해도 비슷한 전략을 펴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봄이 실종되고 5월부터 9월까지 근 5개월간 여름이 지속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올 여름은 정말 덥다”는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최근 우리나라의 여름은 늘 더웠다. 백년만의 더위 운운에 현혹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지어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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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36번째: 곱창

 

 

 

 

일시; 4월 7일(목)

마신 양: 겁나게 많이...


술을 매일 마시면 사람이 지친다. 못해도 이틀에 한번은 쉬어 줘야 한다. 지난 목요일은 원래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나처럼 술의 길로 접어든 사람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 때문에 천안에 온 친구가 나더러 한잔만 하잔다. 그의 차를 타고 우리 동네까지 왔다. 곱창을 먹자고 했다.


내가 아는 곱창집 중 맛있기로 유명한 ‘황소곱창’에 갔다. 원래 그 집은 길 안쪽에 있었는데, 상암동에 월드컵 경기장이 지어지면서 도로를 넓혀야 할 일이 생겼고, 그 바람에 곱창집 앞의 건물이 헐리는 바람에 차도로 나와버린 것. 입지가 더 좋아졌으니 안그래도 사람이 많던 그집은 아예 발디딜 틈이 없어져 버렸다. 식탁마다 꽉 들어찬 손님들, 바쁘게 뛰어다니는 종업원들, 그들을 부르는 손님들의 고함소리,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돈을 잘 벌면 기분이 좋아야 하거늘, 그집 사장(여자다)은 늘 죽상이다. 내가 갔을 때도 종업원들을 야단치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다. 손님들한테 밝게 웃는 적은 한번도 없고,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밀어도 잠시 째려보다 확 낚아챈다. 사람들 대부분이 친절한 맛없는 집보다 불친절한 맛있는 집을 택한다는 걸 지나치게 믿는 것일까. 주인이 그러니 종업원들도 별 차이는 없다. 곱창을 시킬 때면 잽싸게 달려오지만, 물을 더달라거나 참기름을 더달라고 하면 알았다고 해놓고 오지도 않는다. 아니, 종업원을 부르는 것도 무진장 힘들다. “여기요”를 아무리 외쳐도 바쁜 종업원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나보다. 그런 걸 감수하면서 묵묵히 곱창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 진리는 창자 속에 있는 것일까.


소주 한병씩을 나누어 마셔 알딸딸한 기분에 난 내가 아는 미녀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와 2차로 소주를 마셨다. 미녀와 마셔서 좋았긴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좋은 시간을 추억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게 영 속상하다.


* 참고로 나와 술을 마신 친구는 “왜 여기가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일 뿐, 그 집 곱창에 특별한 맛은 없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내게 그 곱창집의 존재를 처음 알려줬던 친구인데, 입맛이 변했나?


** 자석의 N극과 N극은 서로 밀어낸다. 곱창은 많이 먹으면 장에 부담이 되어 설사를 유발한다. 난 그 친구와 염통, 곱창, 그리고 양짓머리를 먹었고, 나중에 그 집의 별미인 볶음밥을 먹었는데, 미녀를 만나러 가기까지 무려 4차례나 설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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