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을 들여다보려는 단 한 번의 노력을 해야 할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겠다........말 그대로 내가 어제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 한다."(《불안의 책》, p31)
소아르스가 자신이 "언제까지나 회계사무원으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고,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p32)이라고 자조했듯이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같은 심정이다. 언제나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는가. "삶에 동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p35)이라고 페소아이자 소아르스는 말했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일까. 친밀과 공감대를 얻을 수 없었기에 차라리 철저히 거부했고, 자신만의 고독과 몽상과 영혼을 부르짖은, 모두가 삶의 조건으로 거론하는 미덕의 이면을 파헤쳤던 소아르스, 루소, 알렉시. 진짜 삶이 그런 이들도 있었지만 세상의 많은 작가들은 다들 사생아나 천애 고아인 듯이 굴었고 썼다. 페소아의 異名 소아르스는 자신이 이미 양친의 사망으로 고아이지만 사회적으로도 모두가 고아라고 말했다. 합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과학 맹신 세태에 종교라는 의지처가 무력해진 시대 탓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신앙이 주는 위로를 조금도 누릴 수 없는 고아로 태어났다"(《불안의 책》, p386) 루소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사춘기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 실제로 평생 고아였던 거나 다름없었다. 유르스나르도 어머니가 산욕열로 사망하고 아버지와 방랑생활을 하며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들의 유년을 획일화해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내가. 그러나 그것은 이들 작가의 고백체, 자기 자신에 대한 천착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육론 《에밀》을 쓴 저자였기에 비난을 더 피할 수 없었던 루소는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사실이 볼테르에 의해 폭로되자 《고백록》, 《대화: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를 써 자신의 진정성,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사람들에게 교육에 대해 사상에 대해 논하던 사람이었던 터라 사회의 심판과 냉대는 굳건했다. 소아르스는 물고기와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입 때문에 망한 이들이라고 했는데 루소도 어쩌면 그런 케이스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타인에 의해 고립된 루소는 그의 사망으로 미완성 유고작이 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나 자신은 무엇인가’를 탐구 주제로 써 내려갔다. 그는 《고백록》을 통해서도 당시 누구보다 자신을 치열하게 까발린 작가이기도 했다. 페소아는 세상과의 단절을 스스로 원했던 작가였는데, 평생 70개가 넘는 다양한 정체성의 가상 인물을 통해 ‘나’를 분리하며 자신을 탐구했다. 그의 미완성 유고작 《불안의 책》 속 수백 개의 단상들은 그것을 반영한다. ‘부조리와 역설’이 진정한 작가의 임무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책에는 상반된 의견이 많다. 초반엔 신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처럼 말하고 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신을 깨부순 세계를 원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작가의 어떤 페르소나인지도 불분명하고 여러 편집본도 있는 터라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자유를 획득했다. 유르스나르 《알렉시·은총의 일격》에서도 주인공 알렉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물이다. 그는 편지로 아내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쓰는 자의 자유 형태인 독백이자 일기이자 편지인 이들의 글 속에는 세상의 요구에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한결같은 자기애, 자유의지가 담겨 있다.
“자신의 성향을 따르는 것은, 또한 성향이 우리를 이끌어 선을 행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은 미덕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덕은 의무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때 그 명령을 행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성향을 억제하는 것에 있으며, 바로 이것이 내가 세상 사람들보다 잘할 줄 몰랐던 것이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95)
"인간의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104)
루소가 그토록 주장했던 인간의 자유에 대해 유르스나르의 단편 「알렉시」만큼 잘 표현한 소설도 드물다. 아직도 동성애는 누군가의 허락과 용인이 필요한 일탈로 간주되고 있다. 「알렉시」에 영감을 준 앙드레 지드 「코리동」은 처음에 익명으로 발표되었다가 1924년에 저자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알렉시(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1929년에 출간되었다. 유르스나르는 이 소설에서 “동성애” 단어나 독자가 기대할 만한 외설스러운 장면을 한 번도 쓰지 않으면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관습, 통념 등 모든 것들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의 성적·감정적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동성애자 남성과 두 번 결혼한 유르스나르를 생각할 때 주장이나 옹호보다 객관성에 더 가까웠다.
“결국 삶 역시 생리적인 비밀일 뿐이니까. 어째서 쾌락이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단 말이오. 통증 역시 감각이지만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데. 우리가 통증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지, 그저 받아들이는 게 아닌지 따져봐야 하잖소. 그리고 그게 아니라 해도,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라 해도, 난 쾌락이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오.”(《알렉시·은총의 일격》 p31)
“난 친구들을 사랑하는 게 행복했고, 친구들도 날 사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소. 사랑은(용서하오, 그대) 그 이후 내가 다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오. 사랑을 느낄 수 있으려면 너무도 많은 미덕이 필요하다오. 어린 시절의 내가 그토록 부질없는 연모의 감정을, 거의 대부분 거짓이고, 심지어 관능을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은 그런 감정을 신뢰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소. 하지만 아이들에겐 사랑이 순수의 일부라오. 자기들이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요.”(《알렉시·은총의 일격》 p34)
소아르스, 루소, 알렉시 모두 속박을 견딜 수 없어하고 불안과 몽상 속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이들이 가족처럼 혹은 페소아의 다른 이명들처럼 느껴졌다.
"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과거에 느꼈어야 마땅하기에 정말로 느꼈다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예감 같은 건지도 모르겠소. (설사 관습에 순응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내가 우리의 과오를 범하지 않은 시절의 기억까지도 오염시킨다는 거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난 지금 불안하오.”(《알렉시·은총의 일격》 p23)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늘 쾌락과 고통이 지극히 가까운 감각이었소. 어느 정도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같으리라 생각하오.”(《알렉시·은총의 일격》 p30)
“온갖 커다란 충동에 냉담해진 내 영혼은 이제 감각적인 대상들의 영향만을 받는다. 이제 내게는 감각밖에 없으며, 고통이나 기쁨은 오로지 감각에 의해서만 이승에서 나를 자극할 수 있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112)
“자기 영혼 속에 틀어박혀 자만심을 더 고집하게 만드는 외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비교와 편애를 단념함으로써, 자만심은 내가 자신에게 선한 사람임에 만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만심은 다시 자기애가 되어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가 나를 평판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p135)
“무능하고 예민한 나는 나쁘든 좋든, 고귀하든 천하든, 난폭하고 강렬한 충동은 다룰 수 있지만 내 영혼의 본질로 파고들어 지속되는 감정과 계속 이어지는 정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은 항상 다른 무엇이 되려 한다. 영혼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못 견디듯 스스로를 못 견디고, 불안은 점점 커지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불안의 책》, p25)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내 감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불안의 책》 p202)
“아무도 사랑한 적 없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나의 감각들, 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 귀 기울일 때 받는 느낌, 그리고 세상의 소박한 것들이 과거(과거는 냄새를 통해 참 쉽사리 기억된다)의 일들을 상기시키며 내게 말 걸어오는 방식인 향기 등이다.”(《불안의 책》 p271)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타고난 감수성의 혼란스러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의 총체가 바로 나라는 존재다”라고 말한 소아르스의 고백처럼 이들의 공통적인 사태는 그들의 타고난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겠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수많은 이명으로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되려 한 페소아이자 소아르스나, 외부의 영향과 타격에 대응하기 위해 역경에 무감각해지게 만듦으로써 자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기 안에서 평온을 찾으려 한 루소나, 자신과 갈라설 수 없어 자신이고 성 정체성으로 더욱 자신이었던 알렉시는, 책임과 의무보다 자신의 천성을 택했다.
소아르스는 회계사무원이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을 썼다. 루소는 아무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는 글을 썼다. 훌륭한 음악가가 되지 못한 알렉시는 타인이 원하는 인간이 되지도 못하겠다고 편지를 썼다. 그들의 글은 진정 자신만을 위한 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히 자신만을 위해 쓴 그 글이 내게 힘이 됐다. 인간이기에 가지는 끝없는 불안과 고통을 다스리는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우리의 모든 계획은 공상”이라고 말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장자크 루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작가의 다른 책은 많이 읽지 못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내겐 너무 추상적이다. 나는 그들의 책을 더 읽을 것이다. 이 순간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 그리고 쓸 것이다. 그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