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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내가 처음 읽은 파묵의 소설은 《새로운 인생》이었다. 급변하던 터키의 시대상을 잘 그렸던 그 소설을 읽을 때 무엇이 나를 그토록 벅차게 만들었고, 그의 소설에서 매번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이번 《내 마음의 낯섦》을 읽으며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보자 장수 메블루트가 사람들에게 그러했듯.
"메블루트는 "보오오자아아." 하고 소리치면 걷는 동안 떠오른 어떤 그림들이 도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똑같이 떠오르고, 그래서 그를 위층으로 불러 보자를 산다는 것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p407)
"보오오자아아" 라고 소리칠 때마다
메블루트는 그의 마음속에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이 정말로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달콤한 상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감춰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자기 내부에 숨은 두 번째 사람을 밖으로 꺼낼 수 있다면 상상 속 세상을 걷고
걸어 생각을 거듭해 실제로 그곳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지금 메블루트는 이 세상들 사이에서 선택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공적인 관점도 맞고, 사적인
관점도 맞았다. 마음의 의도도 맞고, 말의 의도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광고, 포스터, 구멍가게 벌여 놓은 신문, 벽에 쓰인 글에서 눈길을 끈
모든 단어들이 오랜 세월 동안 메블루트에게 진실을 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도시는 사십 년 동안 그에게 이러한 신호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메블루트는 도시가 그에게 건네는 말들에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그가 말할 차례였다. 메블루트는 도시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p631~632)
메블루트가 사십 년 넘게 이스탄불 도시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보자"였다. 어떤 일을 하든 저녁엔 꼭 보자를 팔러 나갔던 그. 가난한 시절의 이러한 근면을 안다. 사라진 골목길 장수의 외침을 나도 기억한다. “재-애-첩”을 외치며 아침 국거리를 팔던 장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종을 새벽녘 성당 종소리만큼 맑게 조용히 울리며 지나가던 두부장수, 가위를 절그럭거리며 "고오물"하고 수레를 끌고 가던 고물장수, 겨울 한밤 방개 떡이나 찹쌀떡, 메밀묵을 구성지게 외치던 장수. 나보다 더 오래 산 분들은 더 많은 목소리를 기억하리라. 그 소리들은 마트에서 타임 세일이라며 갈급하게 고객을 모으는 소리와도, 녹음된 테이프를 틀며 돌아다니는 트럭의 소리와도 달랐다. 요즘은 큰 재래시장을 가도 호객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소비자는 어떤가. 도시에 사는 우리는 소란한 호객 행위보다 가격 할인 태그 보는 걸 더 선호한다. 도시 삶은 타인과 외부의 소릴 경청하기보다 내 욕구와 내 선택과 내 충족을 점점 더 추구하고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앉은 자리에서 거의 모든 물건을 사고 받고 누리는 것에 편리함을 넘어 익숙해졌다. 전 세계적 문화 풍조다. 이런 변화 속에서 세대 차이라는 말은 간편한 정리다. 우리는 이전 시대와의 단절들을 살피기 보다 살(아남)기 바쁘다. 이 소설은 악타쉬 家와 카라타쉬 家, 그들과 혼사로 맺어지는 에펜디 家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정치적 급변들과 환경 변화로 사라지는 많은 것들을 세세하게 담으려 했다. 우리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1994년 3월) “이십오 년 사이에 이스탄불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 추억들은 이제
메블루트에게 동화처럼 다가왔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네모난 돌이 깔려 있던 길들은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도시의 대부분을 형성하던 정원 달린
삼층집들은 거의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거리를 지나가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밤에도 계속 켜 놓아 그
소음 때문에 보자 장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텔레비전이 라디오를 대신했다. 회색의 빛바랜 옷을 입은 조용하고 주눅 든 사람들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그 거리를 시끄럽고 활달하고 개성 강한 인파가 차지했다. 메블루트는 이 거대한 변화의 규모를 매일 조금씩 경험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했으며, 어떤 사람들처럼 이스탄불에 찾아든 변화를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보다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려 했고, 항상 자신을 환영하고
좋아해 줄 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2009년 4월)
“메블루트는 사십삼 년 동안 이스탄불에서 살고 있었다. 처음 삼십오 년은 매년 해를 더할수록 도시에 대한 예속감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탄불이 생소해졌다. 막을 수 없는 홍수처럼 도시에 밀려드는 수백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새로운 집들, 고층
건물들, 쇼핑센터들 때문일까? 1969년 메블루트가 도시에 왔을 때 지어진 건물들은 게제콘두들뿐만 아니라 탁심과 시쉴리에 있는 사십 년 된
아파들도 이미 철거되었다. 옛날 건물에 살던 사람들은 도시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간을 다 채운 것만 같았다. 그들이 지은 건물들과 함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세워진 더 높고, 더 끔찍하고, 더 많은 콘크리트 건물에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했다. 30층, 40층짜리
새로운 건물들을 볼 때마다 메블루트는 자신이 이 새로운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로
온 메블루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노점 상인으로 살았고 그로 인해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악하지도 못해 늘 가난했다. 신이
부여한 운명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행복하길 바란 보통 사람이었다. 사촌 형 코르쿠트 결혼식에서 만난 사돈 소녀와 눈 한 번 마주친 걸로 3년간
연애편지를 쓰고 야반도주까지 실행했으면서 그 소녀(자미하)가 아닌 언니(라이하)를 데려온 걸 알아채고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식간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도시 독자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최선이었고 낯섦이었다. 얼굴도 안 보고 결혼했다는 옛날도 아니고 1982년인데! 명예살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메블루트의 순진함과 책임감이 더 읽히는 대목이었다. 사촌 쉴레이만이 자미하를 좋아해 언니를 먼저 결혼시키려 한 음모였다는 걸 알았음에도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행복한 결혼을 했으니 넘어가는 부분이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메블루트 연애편지 쓰는 걸 도와줬던 페르하트가 자미하와 도망쳐
결혼한 상황에서 메블루트가 하는 행동에서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우리 모두의 복잡한 삶과 마음처럼 메블루트에게도 여러 결이 있다. 거리
개들에게서 고양이를 구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 거리에서 살았으면서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파묵은 세상이라는 거칠고 무서운 힘을 개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거 같았다. 이스탄불 앞 보르포루스 해에서 사고로 양 2만 마리가 수장된 사건에서도 메블루트가 양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장면으로 그의 약자로서의 면을 부각했다. 메블루트는 젊었을 땐 영화관, 나이가 들어서는 선지자 에펜디를 비밀스럽게 찾아가며, 삶에서 멀어져 다른
세계를 꿈꿀 때 드러나는 ‘삶의 평온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묘지나 옛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그런 특징에 부합했다. 자신의 이름이
‘예언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긴 시’를 의미하는 메블리트와 비슷하다는 걸 듣고 ‘이 시를 음악으로 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메블드리한을 아들
이름으로 지어주고 싶어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는 불행한 사건으로 라이하와 페르하트가 사망한 뒤 고심 끝에 자미하와 재혼했지만 그의 깊은
사랑은 라이하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 괴리에 대해 그는 내내 고민했는데, 결국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운명’으로 정리했다.
쿠르드인 알레비 종파라 공산주의에 경도된 페르하트가 낭만적인 자본주의자로 변모해 공적인 관점과 사적인 관점이 명확히 나눠지지 않았듯이.
메블루트는 몰랐지만 라이하와 사미하가 그들의 시골 나무 아래에서 영어 공부를 했던 그를 처음 봤던 건 너무도 운명론적이거나 소설적이지 않은가.
소설이라 상관없는 걸까. 알고 보면 현실은 정말 그렇다는 파묵의 결론일까.
메블루트 중심 시점이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자기 시점으로 계속 이야기에 끼어든다. 세상에 주인공이 단 한 명이 아니듯. 메블루트가 거리에서 자기 존재 증명처럼 "보자"를 외치듯. 역자는
이를 두고 《내 이름은 빨강》처럼 “다성악소설”(p648)이라고 평했다. 남성 캐릭터들은 가부장적 사고에 고지식한데 터키 문화와 뗄 수 없어
보였다. 식당이나 결혼식장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자리가 나뉠 정도고 장례식에는 여성들이 참석하지 않으니 말이다.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쉴레이만의
청혼이 자미하에게 거부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라이하의 언니 웨디하가 터키 여성으로서의 삶, 며느리로서의 삶, 부모로서의 삶, 사람으로서의 삶의
부조리함을 한바탕 코러스로 말할 때는 거의 통쾌할 정도다(p514~516). 파묵은 쉴레이만의 아내 멜라하트를 비롯해 등장 여성들을
페미니즘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어느 정도 현실 반영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터키인, 터키라는 정치 사회적 배경만 담지 않았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있었을 때 메블루트는 거리에서 밥을 팔고 있었는데 손님이 방사능 오염을 두려워하는 걸 겪었다. 관청에 밥 수레를 압수당하고
어렵게 아이스크림 수레를 구한 메블루트는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6.4 항쟁 뉴스를 보고 탱크와 대치한 사람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밥을 파는 상인이라 여기며 신을 모르는 공산주의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1989~1990년 메블루트는 사촌 주선으로 식당 매니저가
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보스니아 내전이 있었을 때 그 자신이 변절한 공산주의자들을 욕했으면서도 가족 부양 때문에 직원들의 속임수를
묵인했다. 낙태 시대상을 보여주는 라이하 낙태 사망 이후 2001년 9.11 테러 때 메블루트는 끔찍이 사랑한 두 딸도 이른 결혼으로 보내야
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지류로 뻗어간 뒤 강 하류에서 모이는 삶처럼 불법이든 아니든 어디든 뻗어가고 끌어 쓰는
전기처럼 이 지구에서 무엇보다 닮았고 연결되어 있다. 세상 곳곳이 도시화되어 가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에 산 지 사십
년이 지나서야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있는 빛과 어둠이 도시의 풍경과 닮았다”(p629)고, 밤에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자기 머릿속을 배회하는
느낌이었다고, 거리의 모든 것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고 깨닫는 게 그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 전체를 걸
정도로 매혹당했던 자미하의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다른 삶을 살게 된 메블루트를 생각하며 이 책 제목이 "내 마음의 낯섦"인 것이
나대로 이해됐다. 거리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했지만 자기 마음에 대해서는 서툴렀고 낯설어했다.
"내 마음의 거울에서 자신을 볼 수
있도록 그를 쳐다보았다." ㅡ
자미하
자미하의 눈뿐 아니라 도시의 수많은 눈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된 메블루트.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터키 음식ㅡ보자(기장을
발효시켜 만든 것으로 걸쭉하며, 좋은 향기가 나고, 짙은 노란색의 알코올기가 있는 전통 음료), 라크(터키 특유의 술, 무색이지만 물을 타면
뿌연 우윳빛), 아이란(요구르트에 물을 섞어 희석한 터키 전통 음료), 홍합 돌마(홍합 껍질에 양념한 밥을 담고 레몬을 뿌려 먹는 음식),
시가라 뵈레이(밀가루 도우 안에 흰 치즈, 감자, 파슬리, 시금치 등을 넣고 담배처럼 말아서 튀긴 음식), 뵈렉(치즈나 달걀, 각종 채소, 다진
고기 등이 든 얇은 페이스트리를 튀기거나 구운 음식), 쾨프테(다진 고기에 각종 양념과 채소를 넣어 만든 완자를 굽거나 튀긴 터키 전통 요리),
되네르(쇠고기나 양고기 등 커다란 고깃덩이를 빙빙 돌리며 구워서 얇게 잘라먹는 대표적인 터키 음식), 시쉬 케밥(한입 크기로 잘라 양념한 고기나
야채를 꼬치에 끼워 구운 터키 요리), 아다나 케밥(다진 고기를 맵게 양념하여 불에 구운 음식), 메네멘(볶은 양파와 고추, 토마토를 넣고 끓인
후 달걀을 첨가해 만든 음식), 수죽(터키식 소시지), 괴즈레메(터키식 부침개), 호사프·콩포트(설탕에 졸여 차게 식힌 과일 디저트),
타욱괴으쉬(잘게 찢은 닭고기와 쌀가루로 만든 푸딩), 휜캬르 무할레비(우유와 쌀가루로 만든 단 푸딩), 웨이퍼(얇고 바삭하게 구운 과자),
병아리콩 수프, 고기가 들어간 리크(큰 부추같이 생긴 채소), 뒤륌(얇은 전병 같은 빵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 돌돌 말아서 먹는 음식),
귈라치(장미수를 넣은 달콤한 밀크 푸딩), 아쉬레(다양한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넣은 푸딩), 헬와(상갓집에서 조문객들에게 대접하는 음식) ㅡ처럼
파묵은 인물들의 다채롭고 개성적인 성격과 삶을 정성스레 차렸다. 무허가 판잣집(게제콘두)에서 시작해 아파트도 첫사랑도 많은 우여곡절 끝에 얻게
된 1957년 생 메블루트와 그 주변의 삶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베이비부머 세대 삶과 참 많이 닮았다. 이 소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고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모든 인류에 대한 헌사였다. 무엇을 잃고 얻었으며 무엇이 되고 되지 못했든 우리 삶의 무게는 같다.
“도시의 삶의 깊이는 우리가 감춘 것의
깊이에서 온다.”
“이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심장이 있고, 하나의 계량기가 있다.”
ps)소설을 다 읽고
내가 한국이라는 이 나라의 여러 도시와 골목을 헤매며 찍은 오래전 사진을 찾아봤다. 옹색한 달동네부터 풍경을 압도할 만큼 치솟도록 짓고 있는
빌딩들까지 소설 속 풍경과 다르지 않았고, 곳곳에 스며있는 빛과 어둠, 세월에 따라 낡아가는 ‘운명’도 변함없었다. 풍경 속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소설이 있는지도 필요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