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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의 세계 ㅣ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건축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는 지난여름 그와 보낸 마지막 날로부터 시작된다
"이리 나와 봐, 벌집이 생겼어!"
그가 밖에서 외칠 때,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한낮의 빛이 들이닥쳐서 여러 가지 무늬가 바닥에 일렁였고
"어쩌지? 떨어뜨려야 할까?"
그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벌집은 아직 작지만 벌집은 점점 자란다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그가 말했지만 큰일이 무엇인지는 그도 나도 모른다
한참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벌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그것들이 벌집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육각형의 방은 조밀하게 붙어 있고 그의 목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
"하지만 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종한댔어"
돌아온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쯤 여름이 끝났던 것 같다
여름의 계곡에 두 발을 담근 두 사람이 맨발로 산을 내려왔을 때,
늦은 오후에 죽어 가는 새의 체온을 높이려 애썼을 때,
창을 열어 두소 외출한 탓에 침대가 온통 젖어 어두운 거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었을 때,
혹은 여름날의 그 어느 때,
마음이 끝났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뜨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때는 아름다운 겨울이고
나는 여전히 친척의 별장에 있다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ㅡ 황인찬
Abelardo Morell - Camera Obscura Image of the Grand Tetons in Resort Room (1997)
§ 종로와 소설과 원형
황인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접하며 문득 홍상수를 떠올린다. 그를 홍상수 시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건축」은 홍상수 감독의 서사 구성이나 호접몽 특징과 유사하다. 일상을 이야기하면서도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남겨두는 그런 거 말이다.
황인찬 시인의 대부분의 시들은 자조와 회고성을 띄는데, 「건축」은 그의 시 세계 건축 구조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일상은 기본 리듬으로 작동하고, 꿈과 죽음과 환상이 주재료이며 동률의 필수 재료이다.
이 시집의 특장이라 할 수 있는 종로 연작시를 보며 종로에 대해선 나도 여러 시도를 하고 싶던 게 겹쳤다. 글이든 영상이든. 오래전부터 청계천, 명동, 인사동 등 종로는 서울 창작자들에게 터전이자 노스탤지어 역할을 해왔다.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 많아 퇴색되어 보이긴 하지만 종로는 홍대가 뜨기 전까지 문화 중심지였다.
내가 홍상수 감독 영화에 관심을 둔 것은 눈여겨보던 종로 일대 숨은 풍경을 잘 담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도되지 않은 것이 아직 많다. 계속 바뀌어가고 있는 이 풍경만 담아도 얼마나 할 말이 많은가. 언젠가 정성일 평론가가 ㅡ인과응보처럼 자기를 씹을 많은 이들을 염두에 두고 찍은ㅎㅡ 첫 영화로 《카페 느와르》를 찍고 나서 술회를 밝힐 때 영화 속 풍경이 이젠 많이 바뀌었다며 영화의 좋고 나쁨을 떠나 보존적 가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 영화에서도 종로 풍경이 꽤 담겨 있다.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에서는 고가도로가 있던 옛 청계천 전자상가 풍경을 잘 보여줬다. 글을 쓰는 순간은 누구나 사건 순간을 전하는 기자가 되는 셈이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과 시의 경계를 깨고 싶어 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는데, 황인찬 시인은 이 부분에서도 뛰어나다. 시와 소설의 장점을 각각에서 잘 수렴하고 있다.
그런데 세간에서 상찬하는 이 시 세계가 신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황인찬 시를 "포스트모던"이라고 말하는 건 외형상에 따른 단순한 평가 같다.
두 번째 시집『희지의 세계』 마지막 시 「인덱스」마지막 문장은 인덱스란 뜻과 뉘앙스처럼 이렇게 끝난다.
"이제부터 평생 동안 이 죄악감을 견딜 것이다"
황인찬 시에서 계속 목도되는 것은 모던한 스타일 뒤에 정제되어 있는 원형성(原型性)이다. 우화 같은 카프카의 소설 저변이 그러하듯이.
통상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황인찬의 살아있는 세계엔 말라 있는 것들이, 저편 세계는 젖어 있는 것이 가득하다. 그 중간쯤에 일어나는 불, 문학의 세계가 있다.
바슐라르 식으로 물, 불, 공기, 흙의 질료로 그의 시 경향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기 직전의 새와 물속에서 금속같이 느껴지는 손 같은 그런 것.
하지만 이런저런 분석 노력이 나는 귀찮지. 도무지 너무 귀찮지. 시인이 그렇게 쓰든 안 쓰든 무슨 상관인가. 그러고 싶으면 그리 쓰면 된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가 그렇듯 사실 독자의 몫은 그냥 듣는 역할이다.
오늘 비가 오거나 해가 뜨거나 우리는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게 삶이며 일상인데 문학이라고 다른가.
도무지. 도무지....
기어이 무너질 것을 짐작하는 이들은 죄악감에 싸여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