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에 이르다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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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걸 동시에 가져와 보려는 시도는 정영문 소설 속에도 언급되고 있는 조르주 페렉 같은 작가들 소설에서 잘 볼 수 있다. 편집증적이지만 이걸 감당하는 작가의 고통은 사실적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응될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하고 결국 무용(無用)을 향해 나아간다.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많은 삶 끝에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듯이.

 

 

언젠가 이후로,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를 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하는, 그래서 사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그래서 어쩌면 말하기의 끝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거의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이런 글들을 쓰며, 삶을 허비하는 데 삶을 다 바치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조차 꿀 수 없는, 그럼에도 다른 삶은 꿈꾸고 싶지 않은, 남은 삶은 남은 삶을 허비하는 데 마저 다 바칠 것이 분명한 이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ㅡ 「개의 귀

 

오리무중인 생각들이 이어졌지만 이것들을 일일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점점 더 오리무중 상태에, 오리무중에 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리무중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한, 도술을 부려 세상과 담을 쌓은, 역사 속 중국의 누군가를 잠깐 생각했다.”

ㅡ 「오리무중에 이르다

 

 

작가도 독자도 숲이기도 하고 담이기도 한 글을 헤매다 문득 이상한 황홀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매하는 곳을 어렵게 알아내 동굴을 하나 주문했다(물론 동굴은 그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살 곳이었다). 며칠 후 동굴 하나가 왔지만 동굴로서 결함이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구 모양의 바윗덩어리로, 크기가 적당했지만 결정적으로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입구가 없었고, 그에 따라 입구이자 출구인 출구도, 입구와 별개로 있는 출구도 없었다. 그래서 출구를 통해 그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것은 동굴로 보기 어려웠다. 불량품이 틀림없었다. 사용 설명서도 없었다. 어쩌면 사용자가 알아서 그 커다란 바위에 원하는 크기와 모양의 구멍을 내 동굴로 사용하라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동굴이 아닌 바윗덩어리는 반품하고, 폭이 좁지만 바닥이 없는 늪을 하나 다시 주문했다(물론 늪은 그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살 곳은 아니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는 늪에서 살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늪에서 살 수는 없었다. 물론 늪을 주문해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사는 정신 나간 사람들을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쩌면 그들은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었다. 내게 늪은 이따금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었다). 다시 배송된 늪에는 잠든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카나리아 한 마리가 옆으로 누워 있었고 늪은 말라버려 늪에 빠져들 수도 없었다. 나는 늪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늪 역시 반품했다. 나는 이어서 바람을 주문했는데, 바람은 작은 밀폐용기에 들어 있었다. 바람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용기의 입구에는 바람의 세기와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조종 장치가 있어 원하는 바람이 일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회오리바람이 불게 할 수도 있었고, 화염처럼,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넘실거리는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었는데, 물론 바람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손을 대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바람 몇 개를 집안의 여러 구석에 풀어놓은 채로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아직 구석에 그대로 있는 바람들을 보고 만족해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광풍이 일게 해 집안에서 바람이 미친 듯이 불며 창문을 마구 흔드는 것을 집밖에서 볼 수도 있었다. 나는 몇 번 그 바람을 틀어놓아 집안의 물건들이 바람에 사정없이 날아다니는 것을 창밖에서 지켜본 후 집안에 들어오기도 했다. 바람들은 용기에 달린 조종 장치로 다시 용기에 담을 수도 있었다. 바람은 심지어 동물처럼, 혹은 식물처럼 길러 생장시킬 수도 있었는데, 무한히는 아니고, 어느 크기로까지만 자랐는데, 물론 바람의 먹이는 바람이었다……

ㅡ 「개의 귀

 

 

매력적인 캐릭터와 재미난 플롯을 짜는 것 못지않게 이런 서술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재능이 없다면 이런 서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얼핏 보면 요설이나 요령부득 투덜로 오해하기 쉽지만 문장의 얼개가 어찌나 단단한지 따라만 해 봐도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참으로 기이한 재능이다. 그리고 완강하다. 의미나 재미 따윈 알 바 없다는 듯 오리무중 호수를 글로 넓히고 있는 정영문 작가의 이상한 집념은 어떤 이들의 시선을 분명 잡아끈다.
 

점점 더 오리무중에 이르는, 혹은 이미 오리무중에 이른 것 같은 생각들 속에서 나는, 어쩌면 긴 끈을 입에 문 채로 호수를 헤엄쳐 건너가며, 호수 건너 불, 그 불을 향해 호수를 건너가는 손과 눈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호수가 불에 탈 리는 없지만 불타는 호수, 하면 불타는 호수가 펼쳐지고, 어느새 호수 건너 불을 향해 호수를 건너가는 손과 눈도 불타오를 것 같았다.

어쩌면 호수 중간에서, 혹은 반대쪽 호숫가에 이르기 직전에 기진맥진한 끝에 익사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과거에 일년 중 익사자의 날, 목매달아 죽은 자의 날과 같은 날들이 었었던 어느 종족이 있었는지 문득 궁금했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날, 원한에 사무쳐 죽은 자들의 날과 같은 날들도 있어도 좋을 것이었다.

익사에 대한 생각을 하자 익사의 황홀이라는 표현이 떠올랐고, 몸안으로 물과 함께 어떤 황홀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익사의 황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에도 내가 끈을 입에 물고 있게 된다면 끈은 잠시 내가 가라앉는 깊이를 재어주다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었고, 외투 호주머니 속에 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바깥으로 나가며,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 꼭 여름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ㅡ 「오리무중에 이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죽음까지 꼭꼭 챙기는 정영문 소설은 정말 그렇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관람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동참자가 되는 행위다.

 

 

Thrupence - Alethea( feat. Edward Vanz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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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6-06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영상의 반복된 음이 자꾸 오라고 손짓하는 느낌! 우울이 아닌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약간은 잠을 잘 수 있게 해 주는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하네요^^ 잘 들었어요.

AgalmA 2017-06-07 19:28   좋아요 0 | URL
정영문 작가 글이 좀 울적하게 하는 부분이 있어서 음악은 좀 밝은 걸로^^ 캐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