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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손들이 서로를 통과하길 바랐다
차라리 적대시하길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더욱 분명히 그리고 있었다
그곳은 내 마음의 세계가 아니라 線의 세계였다
현실 속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림은 다만 나를 스쳐 지나가는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이 기차를 타고 오래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지만
나는 곧 내릴 역이 임박한 걸 감지한다
Bonobo - Break Apart
"사실 그래. 그러고 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게 없네."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과 불안도 안겨 준다고 생각하네." "그건 어째서?"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한때 뿐이거든. 나중에 늙어서 죽기 마련이야. 또 그 까닭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 사랑하게 되는 걸세. 만일 아름다움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처음에는 매혹되지만 나중에는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을 걸세. 언제나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연약하고 변모하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기쁨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 아니겠나?" "그렇긴 해." "그러기에 나는 밤 하늘에 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는 줄 아네. 어두운 밤에 치솟는 푸른 불꽃은 가장 휘황찬란할 무렵에 작은 혼선을 그리면서 꺼져버리거든. 그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마련이지. 기쁨과 불안은 이렇게 서로 짝지어 다니면서 그것이 순간적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것일세.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해. 허지만 어떤 경우에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래?" "말하자면 두 사람이 서로 뜻이 맞아 결혼을 한다거나,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정을 느껴 사귀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 그것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네." 크눌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검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얼굴로 이와 같이 말했다. "그건 옳은 소리야. 그러나 그것 역시 어떤 경우나 마찬가지로 한 번은 끝장이 나기 마련이지. 세상에는 사랑이나 우정을 짓밟아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야 물론이지. 그러나 그 재앙이 닥쳐오지 않으면 모르거든." "그런데 이건 알다가도 모르겠네. 안 그런가? 나는 여태까지 연애를 두 번 했네. 모두 진정한 사랑이네. 두 경우 다 죽으면 죽었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모두 깨어졌네. 그래도 나는 이렇게 피둥피둥 살아있거든. 그리고 고향엔 친구가 한 사람 있네. 평생토록 우정이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서로 헤어진 지가 벌써 오래되었네." 크눌프는 말이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 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슬픔을 맛보지 못했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그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어 시시각각으로 애정의 가교(假橋)로 왕래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서 불꽃 이야기가 가장 감명 깊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치솟는 매력에 가득 찬 불꽃ㅡ, 솟아오르기가 무섭게 곧 꺼져버리는 그 광경은, 아름다울수록 빨리 사라진다. 모든 인간관계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이 점에 대해서 크눌프에게 말했다. 크눌프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응, 그래"하고 대꾸할 뿐이었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별로 보람이 없네. 인간이란 생각에 따라서 행동한다기보다 오히려 마음내키는 대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거라네. 그리고 우정이나 연애 같은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과 같을 걸세. 결국 인간은 각기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네. 타인의 침범을 불허(不許)한단 말이야. 사람이 죽는 경우도 예외일 수 없지. 사람에 따라서 하루, 한 달, 혹은 일년쯤 울고 불고 하겠지. 그러나 결국 다 잊고 말거든. 그리하여 죽은 사람만이 관 속에서 고향도 친지도 없는 젊은 직공처럼 혼자 누워있기 마련이 아니겠나." "이 사람아, 그 기분 나쁜 소린 집어치우게. 우리는 ‘인생은 결국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종종 말해 오지 않았나. ‘악하고 원수가 되는 대신에 착하고 친절을 베풀면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인생이다‘라고. 만일 지금 자네 말을 긍정한다면, 사람은 도둑질을 하든 살인을 하든 똑같이 된단 말이야." "아니지. 그건 이야기가 다르네. 자네가 만일 사람을 만나는 대로 무조건 쳐 죽여 보게. 그리고 노랑 나비에게 독이 든 나비가 되라고 호통을 쳐 보게. 자네는 남의 조소거리가 될 걸세."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세.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면 올바르고 성실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겠나. 황색도 청색도 결국은 다 사라지고 선도 악도 속절없다면 세상엔 선하고 값진 것이 있을 수 있겠나 말일세. 인간은 누구나 숲 속의 짐승들처럼 본능 그대로 살아가도 무방하지 않겠나." 크눌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떻다고 할까? 필경 자네 말이 옳을 걸세. 모든 일들이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그 점에 대하여 고민하는 모양일세. 그러나 일이 그렇게 외부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에도 죄가 성립될 수 있거든. 우선 나 자신이 그것을 긍정하니 말일세. 그리고 선을 행하면 마음이 편하고 양심이 흐뭇해하는 것을 보니 선은 역시 올바른 것임은 사실이야." 나는 그의 표정에서 이런 이야기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때때로 철학적 사색을 하며, 어떤 인생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중단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때 그가 나의 미숙한 답변이나 항변에 싫증이 나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기 멋대로 사색하다가 지식과 말로 이룰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책, 특히 톨스토이의 것을 많이 읽었는데, 진리와 궤변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긍정하였다. 그는 영리한 어린이가 어른에 대하여 탓하듯 학자를 경멸하였다. 즉 학자들이 자기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별로 두드러지게 옳은 일을 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지적 기교를 총동원해도 수수께끼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 . . "...........그제야 비로소 나는 고향집 앞에 서 있으면서도 부모 형제와 친구들을 전혀 생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하여 나는 실망과 비애와 수치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네. 그렇다고 새삼 그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네. 그때는 이미 꿈에서 깨어났으니 말일세." 크눌프는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영혼과는 완전히 구분되네. 사람은 둘이서 같이 걸어갈 수도 있고, 말할 수 있으며,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지만, 두 영혼은 마치 꽃과 같아서 각각 어느 일정한 곳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할 수 없네. 가까이하려면 뿌리를 뽑아야 할 테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그러므로 꽃은 그 향기나 씨앗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네. 그러나 그것은 꽃이 하는 일이 아니고 바람이 하는 일이지. 바람은 마음대로 내왕할 수 있으니 말이야" 하며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내가 방금 이야기한 꿈도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을 걸세. 나는 헨리에트나 리자베트에 대해 못할 짓을 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한동안 사랑하면서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한 까닭에 나한테 그렇게 비슷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타난 것일세. 그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어. 나는 부모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부모는 나를 아들로, 나아가서는 자기의 분신으로 생각할 걸세. 그러나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남일세. 이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영혼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부모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를 내 청춘이나 혹은 변덕스러운 마음의 소치로 돌릴 수도 있을 걸세. 그런 경우라도 부모는 나를 끔찍이 사랑할 걸세.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에게 눈과 코뿐만 아니라 이성(理性)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물려줄 수 없는 걸세. 영혼이란 사람마다 새로 제공해 주는 거라네."
ㅡ헤르만 헤세 <크눌프> 2장 크눌프의 추억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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