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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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초반부에서 토마스는 ‘테레사와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를 고민한다. 12세기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했다면 20세기 토마스는 같이 사느냐 혼자 사느냐 문제로 씨름 중이다. 그는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 하는지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인생이란 완성작일 수 없고 무용한 초벌 그림이라고 한탄한다. 독일 속담을 떠올리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고,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말한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린 것은 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대상만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다˝, ˝완전히 홀로 남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유사한 인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테레사가 대상으로 나타남으로 인해 테레사가 있는 삶, 혼자 사는 삶,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사유라는 세 개의 의미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번 생을 처음 그리는 초심자 토마스는 소설 속에서 무수한 대상(여성), 의미장을 찾아다녔고 겪었다. 마치 한 번만 사는 허무를 그렇게라도 만회하려는 사람처럼. 우리도 공감하다시피 대개 인간이 이렇다.
(*의미장: 어떤 것, 특정한 대상이 특정한 양식으로 나타나는 영역)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저 생각은 한 번 뿐인 세계, 통합할 수 없는 세계,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지방 자치, 예술사, 물리학, 거실 등의 무수한 대상영역**들이 의미장 속에 무한히 맞물려 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에 다루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전전긍긍한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는 사실 너무 의미가 많아 방향을 잃은 상태와 같다. 우리는 이런 복잡함을 단순화하고 싶어 했고, 이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도 맥이 닿는다.
(**대상영역: 특정한 종류의 대상들을 포함하는 영역. 이 안에서 대상들은 서로 이어주는 공통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자연과학(물리학 기타 등등)도 대상영역 중 하나일 뿐이라 논박했다. 마침 같이 읽고 있는 《신의 입자》도 대단히 공격하고 있다. 뜻밖에 '신의 입자' 대항마를 만나다^ㄷ^);; 궁극의 입자를 발견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발견은 아쉽게도 협소한 결과 발표라 하겠다. 다음 표현을 보자.

˝퍼트넘이 크립키의 논증에 덧붙였듯, 나는 나의 입자와 동일한 게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어야 한다. 물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주에 입자가 분산되어 있을지라도!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입자는 내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다른 구성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우리는 우리 몸과 같은 게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크립키와 퍼트넘의 논증은 다만 우리가 입자와 논리적으로 동일한 게 아니며, 바로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우주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한마디로 물질적 일원론은 틀렸다. 무수히 많은 대상(예를 들어 인문로서의 우리)이 존재하며, 이 대상을 우리는 엄밀하게 지시할 수 있고, 그 논리적 동일성은 물질적인 성분과 철저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이유에서 틀린 것이다. ˝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그간의 철학, 자연과학 둘 다 전체를 굽어볼 전망이 불가능하다는 걸 간과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이념(헤겔)은 그 자체 안에서 나타날 수 없다. 절대이념이나 세계가 존재하려면 그 상위의 포괄이 있어야 한다. 이는 ‘무한 퇴행‘이나 ‘프랙털‘(자기 자신의 무수한 많은 복제로 이루어지는 기하학 형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나타날 의미장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속성이든 모두 가지고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이해관계에 맞게 해석한 세계만 알 뿐이다. 지금까지 모든 세계관은 틀렸다. ˝모든 세계관은 있지도 않은 것의 그림˝이었다. 저 위 토마스의 세계관에도 이 말을 전해 주고 싶다.

˝세계관이란 본질적으로 세계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에 가둔 세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자 전체를 마치 그림을 그리는 인간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처럼 강요하는 게 곧 세계관이다. ˝
하이데거 <세계관의 시대> 논문에서


하이데거의 저 표현도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가둔 어긋난 것이라고 말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논점은 이것이다. 그간 우리는 삶을 환상이나 물질 다발 취급하는 오류에 숱하게 빠져 왔지만 물질 대상과 똑같이 사실들-논리 법칙이나 인간의 지식-도 존재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 안에 나타난다는 ˝의미장 존재론˝(새로운 리얼리즘 접근법)이다.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가  하나의 대상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동일시하며 따르는 '물신숭배' 성격으로 서로 경쟁을 벌인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이에 대해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그 아래에 두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낄 <주체>를 찾는다는" 크 라캉의 분석은 아주 예리하다. 물론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종교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아간 의미탐색'이라는 긍정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논증에서 비약의 느낌도 받았지만 하이데거 <숲속의 빈터> 개념처럼 우리 인식의 특성이라 생각하며, (능력 부족한 나 대신) 많은 분야들의 논리 허점, 선입견을 깨는 도전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인물이나 정치 문제 혹은 예술 작품의 이해는 생물학이나 수학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완전히 자의적이거나 단순한 취향 문제도 아니다. 과학적 세계관은 우주, 곧 자연 과학의 대상 영역이라는 특권적인 사실 구조만 중시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의미는 건너뛰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우주에는 실제로 의미 문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전혀 다르다.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성의 왜곡된 인식에 기초한다. 과학적 세계관은 이해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거나 폐기하는 방법만 인정한다. 이런 종류의 방법은 분명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다. 우주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데에는 가설과 검증이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인간과 의미의 이해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 혹은 의미를 해석하며 접근하는 가운데, 이를테면 소통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방법을 쓰면서 의미의 이해에 다가갈 뿐이다. 정확히 이 점을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이자 유명한 해석학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상기시켰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숱하게 인용된 이 문장은 가다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에 수록된 것으로, 예술 작품 해석과 인간 세계의 이해는 우리의 자연 이해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진리 탐구가 가설과 검증이 없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게 자의적이라거나 완전히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인간을 일반화라는 방법을 써서 이해하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는가는 우리 인성의 표현이며, 우리 인성은 먹고 자고 짝짓기 하는 습관을 모두 더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성은 그 자체가 일종의 예술 작품이다. 바로 그래서 현대 회화와 연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화가이자 배우라는 암시를 담아내 왔다. 인간은 살아 있는 창의성이다. 창의성과 상상력과 독창성은 인성의 특징이다. 자연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인성을 무시하는 학문은 성립할 수 없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며 가장 독창적인 학자 중 한 명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시대정신은 자연과학의 그 어떤 사실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사실일 것이다. 이 정신은 시간과 무관하며, 이런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세계의 특징을 드러낸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 특징을 이해하도록 만들려 시도한다. 이 시도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 양식을 빚어낸다.
창작 과정과 표현 양식의 형성 과정은 과학과 예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게 아니다. 과학과 예술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의 언어를 빚어낸다. 이 언어로 우리는 현실의 서로 멀리 떨어진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이런 상이한 부분들을 서로 맺어주며 맥락을 만들어 내는 개념 체계는 서로 다른 예술 양식과 마찬가지로 이 언어의 다른 단어들 혹은 단어군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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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12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Agalma님께서 아침에 올려주신 글에 대한 리뷰를 쓴 후 이 글을 읽으니, 논점이 더 명료해지네요. 답글을 달기 전에 이 글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제 한계군요.ㅋ Aglama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이념(헤겔)은 그 자체 안에서 나타날 수 없다. 절대이념이나 세계가 존재하려면 그 상위의 포괄이 있어야 한다. ‘는 글을 읽으니 유클리드의 <기하>의 증명과정이 생각나네요. 5가지 기본 공리에서 출발한 그의 증명과정에서 연장선을 긋으면서 닮음, 비례를 활용하는 증명과정이 나옵니다. 이러한 과정은 아마도 그 자체 내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일종의 ‘확장‘을 통해 비유로써 표현하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기독교의 신(神)의 대표적 속성 ‘전지-전능(全知-全能)‘ 자체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완전성‘과 상충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안다면(전지) 굳이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미 될 것과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실체(그것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어떤 사물도 필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존할 수 있는 그런 사물=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던져봅니다.^^:
Agalma님께서 읽으신 책과 제가 읽은 책 내용 중 함께 생각할 부분이 정말 많았군요.^^: 재밌습니다.

AgalmA 2017-03-12 09:1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도 이 책 재밌게 읽으실 듯^^
기하학도 이 책에서 여기저기서 다루고 있어요. 특히 칸트부터 포스트모던까지 이어지는 구성주의 까는 게 참 재밌어요ㅋ ‘희다/검다‘ 양쪽을 다 아우르는 ˝대각선언어˝ ‘희검다‘ 설명도 재밌었죠^^ 참인 명제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지만 부적절해보이는 ‘희검다‘는 어쩔래! ㅎ
데카르트는 이원론에서 벌써 실컷 까였어요ㅎ; 사유 실체와 물질인 연장실체로 나눈 근거가 뭔가? 두 개의 실체를 전제한다면, 두 개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왜 스물두 개가 아니고 두 개인가?....
이 책에서 안 까이는 사람들이 없음ㅋㅋ
그래서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칭찬하는 사람들 책 찾아볼라고요ㅋ 얼마나 뛰어나면 이런 사람에게 칭찬을 듣나! ㅎㅎ

겨울호랑이 2017-03-12 08:39   좋아요 1 | URL
Agalma님 추천 도서로 담아 놓겠습니다^^:. 보아하니 이 책에서 비판받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야할 것 같네요..ㅋ 깊이있는 독서를 만들어 주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Agalma님 덕분에 즐거운 생각 얻고 갑니다^^:

호빵 2017-03-13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유클리드의 기하인가요? 첫 공리인가에서 계속 뻗어가는 것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비슷하게 접목되는 건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빨책으로만 들은 저로선 읽을 책 목록에 몇개가 함께 올라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