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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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자기 구축의 과정이라는 것. 종교, 특히 기독교의 속죄 메커니즘은 그걸 정확히 파악했고 죽는 순간까지 종부성사로 만족시키며 죽은 후에는 천국까지 보장해 준다. 지옥행은 계약자의 잘못으로 인한 보험 손실처럼 말한다. 종교는 자기 구원의 안정된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희망을 송두리째 내다 버리는 행위 같은 진화론에 대해 창조론자들이 분노하는 게 이해된다.

인류에겐 다른 존재 방식도 있다. 종교의 말씀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게 언어의 연금술을 통해 자기 구원을 찾는 행위가 있다. 연금술은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과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적 부활로 확대된다(“너희들 스스로를 죽은 돌에서 살아 있는 현자의 돌로 변신시켜라.”).

푸코가 자기 배려라는 표현하며 분석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아니다. 고정불변의 형상으로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자기 바깥의 활동(놀이, 창조)을 통해 스스로를 생각하고 행복과 평화를 얻는 형성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신을 관조할 때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의 흥미로운 사례들을 살펴보자. 서기 42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재론으로, 1888년 말~1889년 초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로 자신의 책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재차 분석했던 일, 후기 인상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1867~1947)가 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계속 손봤던 행각, 존재하지 않는 책을 설명하는 조르조 망가델리 새로운 해설과 파솔리니 석유, 말라르메 의 메모지와 문장들의 재배치로 책을 낸 자크 셰레의 말라르메의 》, 1927년 프란체스코 모론치니가 자코모 레오파르디 시집 《노래》에 대한 평과 주석, 시의 수사본, 시의 수정사항과 메모와 초안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여준 것  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 반영[*]이면서 획일성을 거부하는 재창조 과정 속에 주체이자 저자가 지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매우 역설적이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쓴 자기 반영에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스스로의 존재 속에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성향)와 욕망으로 정의한 스피노자의 해석도 포함된다. 아감벤은 창조 행위의 잠재력에서 이 표현을 썼다. )

 

어떤 잠재력을 관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작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관조를 통해 작품은 해체되고 무위적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에 의탁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화가, 시인, 사상가는(일반적으로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창조 활동과 작품의 저자라는 이유로 주권을 지닌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름 없이 살아간다. 언어가, 시선이,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매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관조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험을 시도하고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삶의 형태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다.(p218~219)

 

(신비, 잠재력)과 글(서사, 창조행위)에 대한 핵심적인 설명이며 창조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다. 아감벤의 의견과 그가 쓰는 개념(저항, 무위, 잠재력)들을 이해하고 동참해야 접근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는 윤병언 번역가의 말에 동의한다.

노발리스는 철학에 대해 하나의 회상이라고, 아감벤은 문학에 대해 잃어버린 신비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노년의 아감벤이 강연 속에 남긴 말들은 그리고 책이 된 이 언어들은 내게 신비와 침묵 사이에 만들어진 오솔길을 보여주고 있다. 문맹자를 위해 시를 썼다 말하는 세사르 바예호나 수용소에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 증언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 글을 썼다고 말하는 프리모 레비를 예로 들었듯이 아감벤 또한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향해 가는 철학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호모 사케르를 읽을 때는 감지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도 그의 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역사를 탐구하는 일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사실상 동일한 행위라면, 작가 역시 하나의 모순된 과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변함없는 자세로 오로지 문학, 불의 상실만을 믿을 줄 알아야 하고 그가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대가를 치러야 가능한 일이지만, 망각의 바닥에서 사라진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빛의 조각들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p18)

 

마지막으로 그가 학자연한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글로 갈음하며 이 리뷰를 닫아야 할 거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이 되지 않으려면.

 

철학의 말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철학이 어떤 지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일종의 무지에 대한 의식에서, 즉 모든 종류의 앎과 기술의 유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삶과 지식 분야에 느닷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스스로의 한계와 충돌하도록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강렬함이다. 철학이란 모든 지식과 학문 세계에 공표된 하나의 예외 상태를 말한다. 이 예외 상태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진실이란 이름이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한 명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이다. 우리는 진실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단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p109)

 

 

※ 조르조 아감벤 <글 읽기의 어려움에 관하여>(2012년 12월 로마의 중소 출판사 도서 박람회에서)와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2010년 베네치아의 치니 재단에서) 강연 내용은 사사키 아타루 저작과 공통된 관점(독서의 불가능성, 문맹에 대한 고찰과 기독교로부터의 책의 탄생과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noesis, 생각하는 행위)는 생각의 생각이다(noeseos noesis)". ㅡ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지성은 잠재력 외에는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지성이 생각하기 이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ㅡ 아리스토텔레스《영혼에 관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들의 예들이 대부분 인간의 기술과 지식의 영역에서(문법, 음악, 건축, 의학 등등) 발견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인간이 ‘능력’의 차원에서, 즉 능력과 무능력의 차원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원천적인 차원에서 무능력과 일치한다. 인간이 무언가로 존재한다거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축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결핍 상태와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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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1-2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유는 메타-씽킹이군요. ^^

AgalmA 2017-01-31 09:59   좋아요 2 | URL
조르조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이중적 해석‘을 재미나게 풀어놓고 있죠. <형이상학>에서는 사유를 하나의 행위로, <영혼에 관하여>에서는 하나의 잠재력으로 말하고 있는데,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드러남으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 할 텐데요. 드러난 사유 활동을 통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자유롭고 무위적인 잠재력도 같이 발견됩니다.
이건 질베르 시몽동의 표현과 맞닿지 않나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두 단계의 존재, 즉 무분별하고 무인칭적인 요소와 개인적이고 사적인 요소 사이의 변증법에서 기인하는 두 단계의 존재˝.
무인칭적인 잠재력과 개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상태, 이 두 상태의 끝없는 순환과 공존의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아감벤은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