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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ㅣ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평점 :
어느 해 겨울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겨울의 한기를 한껏 느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당연하지! 다른 작가인데. 페터 회 그 소설처럼 한스 라트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도 읽기와 재미가 한 몸 같아 속도감이 굉장하다.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여서 더 그런 것 같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전개, 빠른 장면 전환, to be continue 같은 엔딩을 볼 때 시리즈와 영화화도 계산에 넣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예감이 빠른 독자라도 문장 유머에 흥미를 느끼며 따라가게 될 것이다.
인생 파산 직전의 주인공이 신을 만나 가족과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스토리로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개다.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 중 하나인 프랭크 카프라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이 소설에서 직접 언급되고 있으며, 그 내용을 살짝 변형한 서사도 있다.
“신이 없더라도 우리는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볼테르)란 제사(題詞)처럼 이 소설의 신은 인간의 믿음이 미약해진 만큼 위력을 잃어버린 신이다. 인생의 실패자가 된 듯한 야콥과 자신이 만든 인간에 의해 실패신이 된 듯한 아벨은 불확정적인 이 삶의 비밀스러움을 함께 풀어 보고자 하는 대등한 관계다. 사람 사이에서 나를 고민하듯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실존을 고민하는 신이라...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내 세계로 들어온 걸 환영해.” 아벨이 말한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도 절대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단 하나의 결혼 생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십억 명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인간들이 맺는 수조, 수천 조의 관계를?”
야콥과 아벨의 대화 속에는 술과 커피가 간접 광고처럼 무수히 등장하는데, 작가 자신이 집필할 때 필요로 하는 것들의 반영이 아닐까 싶었다ㅎ 카페인 중독으로 사망한 걸로 추정되는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쓸 때 아벨이 커피를 끓여 도와줬다는 우스개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신 아벨이 서커스 광대인 것과 좋아하는 영화도 코미디인 것, 스토리 여러 연결들을 보건대 유머와 코미디가 삶과 소설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여기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차원 이동 등으로 겹겹의 삶을 바라보는 장치는 요즘 보편적인 창작 기법으로도 여겨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지성의 최신을 증명하는 역할보다 우리의 상상을 하나둘 점검해가는 도구인지도 모른다고. 신이 있다고 해도 없다고 해도 우리는 신을 죽이고 믿는 두 행위를 모두 할 존재들이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나와 세계를 그렇게 만들듯 신을 더 강하게도 약하게도 한다는 것.
아벨이 부드럽게 웃는다. “지금 우리 둘이 앉아 있는 이 행성은 눈 한 번 깜빡하는 동안 우주 공간에서 15킬로미터 가까이를 이동해. 이건 나의 지혜로움으로 밝혀낸 것이 아니라……” 그는 다음 말을 즐기듯이 강조한다. “과학이 알아낸 지식이지. 이제 뭐가 좀 더 기묘하게 느껴지나? 내가 마법으로 자네 잔에다 커피를 더 따른 게? 아니면 우리 둘이 이 순간에도 세계와 함께 거의 분속 2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이 시커멓고 무한한 우주 공간을 내달리고 있는 게?”
신을 끝없이 의식하는 무신론자나 신을 강매하듯 하는 유신론자나 멀리서 보면 둘 다 우스운 광경이다. 중요한 건 신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것. 인간 외에 신을 바라는 타 종족을 나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삶이 평탄하고 단순했다면 우리가 신을 원망하고 의지했을까. 하루살이에겐 신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있든 없든 우리가 있든 없든 세계는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아득해지고는 한다. 신보다 세계를 더 우위에 두는 생각일까. "세계의 넘침"에 대해서 현재 나는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한다.
하인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럼 그것 말고 믿을 게 뭐가 있소? 감정만큼 구체적이고 생생한 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이 지식이 아닌 사랑과 행복, 우정 같은 걸 동경하는 거 아니겠소?"
신이 천재적인 서커스 곡예사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비록 힘은 없지만 선량한 신이 있다는 건 신이 아예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강림절 달력 같다. 창문 하나하나마다 하나의 운명이 들어 있는 그런 달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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