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쪽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예감에 모든 것에 조금씩 다 나태했다. 평소 육체 건강 염려보다 정신 건강 염려에 나는 더 신경쓴다고 생각하지만 병이 오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그리되듯이.
잠들기 전 꺼내든 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들》 첫 문단을 읽고 뜨끔했다.

불행만큼 인간이 전념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 만약에 어떤 악의적인 창조주가 오로지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우리를 지상에 놓아두었다면, 그 과제를 달성하려고 열성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위로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널리고도 또 널렸다. 우리 육체의 연약함, 사랑의 변덕스러움, 사회생활의 불성실, 우정의 손상, 습관의 둔화 작용 등등. 이런 지속적인 고난 앞에서야, 우리가 더 큰 기대를 품고 기다릴 만한 사건은 오로지 우리의 사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ㅡ 1장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에밀 시오랑과 비슷하면서도 덜 시니컬하고 차분하다. 에밀 시오랑이 한밤에 쓴 고통에 대한 글이라면 알랭 드 보통은 낮에 쓴 그것 같다고 할까. 정확성을 위해 생각 전개에 살짝살짝 브레이크를 거는 느낌이 전해진다.


고독과 절망의 대가로 불렸던  밀 시오랑(1911~1995)이 종말과 고통에 대해 쓴 글을 살펴봤다.

 

 

그 마지막 순간 인간의 삶이 너무나 높은 강도에 도달한 나머지 후회, 갈망, 사랑,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느꼈던 모든 것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기를! 그러한 혼란 속에서는 하잘 것 없는 의무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부 모순의 압력으로 존재 자체가 와해될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없음이 승리하고 비존재가 화려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종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가장 특이한 점은 자신의 고통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이며,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독점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 안에 농축되어 있고, 나만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잔혹한 고통, 제 몸의 살점이 찢겨 떨어져 나가며 죽어 가는 고통, 흉악한 범죄와 같이 용납할 수 없는 고통을 확인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고통이 어떻게 닥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어떻게 고통의 목적과 같은 허튼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내게 주는 가늠할 수 없는 충격은 내게 남은 용기를 앗아간다. 고통이 삶의 동물성, 비합리성, 저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은 고통이 있음을 알려줄 뿐,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존재 자체와 마찬가지로 정당성이 없을 것이다. 존재에 당위성이 있는가? 아니면 순수하게 내재적인 이유가 있는가? 존재란 오로지 있음뿐인가? 없음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존재는 무를 향해 가고 있으며, 있음은 없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없음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현실이 아닌가? , 이것이 세상 차원의 한 가지 역설이다.

고통이라는 현상에 깊이 매료되기도 하지만, 나는 고통을 예찬하는 글을 쓸 수 없다. 지속적인 고통은진정한 고통은 지속적이다시작 단계에서 제아무리 우리를 정화시켜준다 하더라도 결국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고 파괴하며 무너트린다. 탐미주의자나 아마추어 예술가들은 고통을 하나의 여흥으로 생각하고 쉽게 열광한다. 그들은 고통이 가진 무서운 파괴력과 독성자아를 분열시킬 정도의도 모를 뿐 아니라, 고통이 가져다주는 지혜도 알지 못한다. 그 지혜를 얻으려면 아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고통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깊은 구렁텅이 위에 매달려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의 고통은 바로 그것이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통의 독점

 

 

『랭트랑지장』신문이 보낸 ‘지구 전멸 상황에서 뭘 할 것인가‘ 란 질문에 루스트는 ˝루브르, 사랑, 인도(india)˝를 말했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길 좋아한 그가 루브르와 인도를 말한 건 굉장히 뜬금없게 느껴진다. 답변을 증명할 새도 없이 그는 넉 달 뒤 감기로 사망한다. 병이 나면 계획은 전면 포기되거나 수정되지. 하지만 나는 매일 나태의 사치 속에서 오늘을 원망하며 싸운다.

오늘도 시작부터 그리되고 있다. 건강검진받기로 한 날. 네 번이나 예약을 바꿔서 이젠 전화를 건다면 바틀비처럼 굳은 목소리로 ˝안 하고 싶습니다˝를 말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건강검진 4시간 전, 나는 이러고 있다. 예전 건강검진 때도 3시간 자고 갔던가. 그때는 갔고 이번엔 안 갔다. 중대함도 선택의 문제이고, 그것이 이성적인지 감정적인지 본인조차 정확히 가르기 어렵다.

지구 전멸 상황이 왔을 때 나는 무엇을 필사적으로 바꿀 것인가. 쓰고 있는 글의 문장? 멋지기 보다 끔찍한데.
유언은 쓰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짧은 게 좋은 거 같다. 자살자들은 대체로 그렇다고 한다. 아예 유언장이 없는 경우도 많고.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같은 책을 쓸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셸 슈나이더가 지성들의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며 쓴 《죽음을 그리다》죽음보다 삶과 문학에 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이 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몽테뉴는 말이란 절반은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절반은 말하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에게 속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수상록에서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에게 속한다는 건 자신이 되는 것 또는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죽는 것이다.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미셸 드 몽테뉴 편(1592913일 사망)

 

 

곧 하겠다? 바로 그것 때문이야. 곧 하겠다는 말. 그래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거야. 곧 행복해질 거라고 하니까.” 라고 심술궂게 말했다.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임마누엘 칸트 편(1804212일 사망)

 

 

인생은, 계산할 때 보면 실패의 총합일 뿐이다.

감정은 자기 자신에게서 끝난다. 우리는 서로 헤어진다.

결론: 헤어진 후에도 가끔 서로 만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플로베르가 1862년과 1863년 사이에 수첩에 쓴 글이다. 감정교육이란 결국 실망을 느끼게 하는 교육이다.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교훈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은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은 한 마리의 짐승과 같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일이 있을 때 죽음이 찾아오면 거추장스럽다. 188058, ‘죽음을 상징하는 짐승이 얼마 전부터 플로베르 주변을 맴돌다가, 마침내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죽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셸 슈나이더 죽음을 그리다귀스타브 플로베르 편(188058일 사망)’
 

 

예전엔 매우 공감했던 에밀 시오랑과 미셸 슈나이더 그리고 지성들의 글을 다시 접하니 단정과 허점과 모순이 많이 보였다. 사변은 불가피하게 이런 인상과 결과를 낳는다. 과학 실증 주의자들은 매우 싫어할 글이다. 내 글도 마찬가지겠지. 내 심정도 내게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 나는 언제나 1분 전의 나를 후회한다. 먼저 오는 후회는 없고 언제나 먼저 가는 '나'가 있다.





 

 

 

 

진저리나는 삶에 대해 읖조리며 노래할 줄 아는 The Czars가 여기에 어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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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2-01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그 지금 봤어요, ‘Agalma가 뽑은 Best서문‘ 좋아요.
전 에밀 시오랑은 너무 재미없게 읽어서, 저런 구절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이 페이퍼 마지막 구절의 깨달음 너~어~무 좋은 것 아닙니까, 췟~(,.)

AgalmA 2016-12-02 02:0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컴 가까이하기가 힘들어서 모바일로 1차로 쓰고 나중에 시간 여유있을 때 웹에서 태그나 기타 사항을 추가해서 늦게 발견하신 듯^^

에밀 시오랑은 그때의 내 감성과 딱 맞아 떨어질 때 시너지가 생기는 작가 같아요. 그래서 호불호가 있는 작가란 생각도 하고요^^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라잖아요ㅎㅎ; 깨달음 같은 게 왔다고 생각될 때는 순간이고 그걸 잘 실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