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혹은 순실이 누구인지 평소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우리는 신경 쓰며 살지 않는다. 자신이 관계되기 전까진. 살인 사건의 문제 해결보다 시체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말로우의 선택에 나는 공감했다. 히치콕은 인간의 이런 특징을 잘 잡아낸다. 《이창》에서는 주인공이 다리를 다쳐 움직이기 힘든 사진작가이기에 가능한 풍경들을 보여 줬잖은가.
치콕 《해리의 소동》은 인간의 부조리, 양심, 인간애 등등을 블랙코미디로 보여 준다. 시체와 무의미한 무덤 파기는 무덤덤하게 표현되는 반면, 버몬트의 멋진 가을 풍경과 클래시컬한 음악은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히치콕 타이틀이 무색하게 망작으로 평가되긴 했지만.

 

 

 

 


미셸 우엘벡과 조르주 페렉의 세태 묘사는 어딘지 비슷했다. 심리와 대사 가득한 프랑스 영화들의 특징처럼. 최근 한국 영화들이 조폭과 비리와 치정과 애국 4가지 키워드만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영악한 제재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겐 성향 문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그토록 경멸했지만 러시아 문학 자장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겉과 다르게 애증이었을지도. 부유층의 삶을 누리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망명의 삶을 살아야 했고 아버지가 극우파 러시아인에게 살해까지 당했으니 미워할 수밖에. 무위의 선은 있지만 당위가 없는 미움이 있던가.


˝192×년 4월 1일(언젠가 한 외국 비평가는 전체 독일 소설을 위시해 많은 소설들이 날짜로 시작하는 데, 오직 러시아 작가들만 ㅡ 우리 문학 본연의 정직함으로 인해 ㅡ 마지막 숫자까지는 쓰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구름이 자욱하나 환하게 밝은 어느 한낮, 4시 즈음에 베를린 서부 지역의 타넨베르크 거리 7번지 근방에 아주 길고 샛노란 이삿짐 트럭이 멈춰 섰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재능》 첫 문장

˝세상에, 나는 이 모든 것 ㅡ 상점, 유리창 너머의 물건들, 상품의 둔탁한 얼굴, 그리고 특히 거래 의식, 느끼한 인사치레의 교환, 전과 후 ㅡ 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소박한 가격의 낮게 드리운 속눈썹......, 할인의 고상함......, 상업 광고의 인류애...... 이 모든 것은 선의 역겨운 모방으로, 선량한 이들을 교묘하게 유인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알렉산드라 야코블레브나가 내게 고백한 바에 의하면, 단골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면 정직함의 포도주, 상호 호의라는 달콤함에 취하는 독특한 세계에 정신적으로 전이되어, 상인의 불그스레한 미소에 빛나는 황홀한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들어간 상점의 종류는 구석 위 탁자 위에 전화와 전화번호부, 수선화가 꽂힌 꽃병, 커다란 재떨이가 놓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규정될 수 있었다. 그가 즐겨 피우는 러시아산 필터가 있는 궐련은 거기 없어서, 담배 가게 주인의 자개단추가 달린 얼룩덜룩한 조끼나 호박 빛깔의 대머리만 아니었다면 그는 빈손으로 나왔으리라. 그렇다, 내게 억지로 맡겨진 상품으로 인한 지속적인 초과 지출의 은밀한 보상 형태로 나는 자연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뭔가를 받으리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재능》


위 문장은 물질 만능주의를 다룬 조르주 페렉 《사물들》 서술과 닮은 듯 달랐다. 조르주 페렉의 인물과 문장들에서는 무기력한 도취가 느껴졌다면 나보코프의 그것에서는 지긋지긋해하는 증오의 냄새가 가득했다. 각각의 개성이자 재능.


오늘 국회에서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 퇴진 운동을 촉구하는 기자 회견하는 걸 봤다.
나보코프의 저 문장을 변용해 말하면, 우리에게 억지로 맡겨진 대통령으로 인한 지속적인 초과 지출과 피해의 확실한 보상 형태로 우리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다. 확실하면서도 고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맥빠지는 어떤 답안이다. 하나의 답은 무수한 답 중 하나일 뿐이고, 답과 해결 사이에는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히치콕 영화 속 평범한 마을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슨 신념으로 사는지 내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첫 문장과 뒤 문장의 모순 상태처럼 계속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 나는 증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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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6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16-11-16 0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해리 혹은 순실이 누구인지 평소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우리는 신경쓰며 살지 않는다. 자신이 관계되기 전까진.”


“ 히치콕 영화 속 평범한 마을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나는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 무슨 신념으로 사는지 내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첫 문장과 뒷 문장의 모순 상태처럼 계속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 나는 증오스럽다.”



매우 공감합니다..^^

최순실 비리 -> 한국 경제에 손해 -> 내 세금.. 내 돈... 내 미래


이번 같은 경우... 보편적인 공감이 가능한 문제죠...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니까요..


어느 곳이나 방관과 외면이 존재하지요.. 그러다가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 싶으면 그 때 서야 일어납니다.. 역사의 모든 현장에서 비슷했죠.. 식민지.. 전쟁.. 홀로코스트.. 용공조작.. 혁명.. 처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몇 명 잡혀가고 죽임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그러다가 학살이 일어납니다.... 학살 또한 나와 관련 없으면 침묵합니다.. 그러다가.. 그 범위가 확대되어 자신에게 옵니다.. 그 때서야..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리죠..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 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AgalmA 2016-11-17 16:10   좋아요 3 | URL
촛불집회 초기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 때도 시청 앞에 줄기차게 갔었는데, 무력감과 함께 피로감이 상당했어요. 많은 분들이 그러 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일도 사람들의 피로감이 무관심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고요. 죄책감도 피로감으로 변질되었던 게 아닌가 싶고요.
지금이야 정유라 건부터 해서 교육, 경제, 정치 뭐 하나 최순실 일가와 안 엮인 게 없으니 모두가 분개해 일어나게 되었지만, 이 일도 장기화 될 때 어찌 될 지....

커피소년 2016-11-18 08: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아고.. 공감 100% 좋은 글 감사드려요.. 특히.. 마지막 문장이요..ㅎㅎㅎㅎ

[그장소] 2016-11-17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두가 다리를 다친 이창의 주인공들 인 까닭일까... 그러면서 각각 맡은 역은 다르게 소화하는 ! ^^

AgalmA 2016-11-17 23:01   좋아요 2 | URL
플래시 터뜨리며 소리지르는 걸로 범인을 위협할 수밖에 없던 주인공처럼 우리도 딱 그 짝입니다. 다들 역할 잘 소화하고 있는 건지...악당들은 어디서든 참 잘 하고 있는 듯;

[그장소] 2016-11-17 23:09   좋아요 2 | URL
음음, 악당들은 참 잘한다는 말에 .. 한숨 나지만 .. 맞네요 .. 정말 !^^;;
그들에겐 기준이랄게 딱히 없어서 ..한 방향 시스템이 아니니까 그럴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자기좋은 쪽으로 어떻게든 유리하게 끌고가려고하니까요 ..

AgalmA 2016-11-17 23:29   좋아요 2 | URL
저녁에 어머니랑 통화하며 서로 탓~ 저 인간들처럼 어머니도 좀 사기치는 기술도 있고 그랬음 저도 배우고 그랬을 거잖아요! 내가 안 되면 너라도 좀 잘해야지! 하며 서로 실실 웃으며 서로 사기는 못 치고 당하기만 한다고 비웃어줌-ㄱ-;;;

[그장소] 2016-11-17 23:31   좋아요 2 | URL
이걸 웃어요 ..말아요? 못났네~ 못났어 ! 근데 그게 좋은거라는 걸 아니 .. ㅎㅎㅎ
우리가 무한도전처럼 평균 미달자면서도 많은 애정을 받는 위치까지 가려면 진짜 ..도배 잘하는 기술이라도 ( 자격증?) 있어야 지 ... ( 응?) 푸흣~!! ( 우리 웃는게 웃는게 아니라죠~^^ㅋ)

AgalmA 2016-11-17 23:43   좋아요 3 | URL
웃어요, 말아요 여기 또 있음->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군밤 알밤 타령~
http://www.dzgol.net/board_news/27403454

<jtbc 뉴스 원문>
[기자]
두 번째 키워드입니다. < 수능에 나온다면 >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내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수능 날이라 그런지 오늘은 고전 작품을 고전 인용해 야당을 비판했는데요. 먼저 들어보시죠.

[이정현 대표/새누리당 : 고전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군밤을 바위에다가 심어서 알밤을 따먹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실현 가능성이 있다. 정말 군밤에서 싹이 터가지고 알밤을 따먹을 걸 기대를 하지 도대체 (야당) 이 사람들의 말을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 겁니까.]

그런데 저 말이 맥락을 잘못 인용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앵커]
아마 이정현 대표 입장에선 야당이 요구조건을 계속 바꾸니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 같은데, 고전 인용은 그 때문에 한 거잖아요.

[기자]
그런 것 같아 보이는데요. 일단 이정현 대표가 인용한 고전은 고려가요 ‘정석가‘의 일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삭삭기 셰몰애…‘ 이렇게 시작하는 건데 뜻이 뭐냐면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다˝는 뜻인데요.

좋은 땅도 아닌 모래땅에 생밤도 아닌 구운 밤을 심어봐야 싹이 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하고 이만큼 이별하기 싫다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문학 작품으로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결국 이정현 대표는 ‘영원한 사랑‘을 강조한 구절을 야당을 비판하는 데 썼다는 지적입니다.

[앵커]
‘정석가‘요? 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하여간 이성대 기자는 이런 것까지 공부해야 될 것 같군요. 그럼 어떤 게 이 상황에 적절할까요?

[기자]
만약 이정현 대표가 의도한 대로 야당이 자꾸 입장을 바꾸고 거짓말만 한다, 이런 식의 비판을 하고 싶다면 ‘정석가‘가 아니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믿는다˝ ˝외손자가 제사 지내준다는 말을 믿으라˝는 식의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요.

가뜩이나 오늘 수능시험 국어가 어려웠다는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정치권의 이런 사례들 때문에 수험생들이 앞으로 이런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을 남을 비판할 때 쓰는 거로 혼동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분명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