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꿔라, 문학하는 주체를
십중팔구 너희들은 고급독자가 될 뿐일거다 일갈했던 어느 교수님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걸 비웃던 누군가는 잘 나가고 못 나가고를 떠나 작가가 되고, 겁먹었던 누군가는 우울한 직장인이 되고 그랬지만 그건 예언은 아니었죠. 성과는 아쉽지만 모두 열심히 살았습니다.
* 사회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 문학은)
문학에게 혁명이란 사명을 덧씌우는 건 종교적인 데가 있어요.
만병통치약(=해결사) 혹은 마지막 수송선으로 보는... 짐짓 이성적인 듯 문학의 대의를 논하며 비난하고 공격하는 자가 사실 가장 심하다는 게 아이러니.
그 저변엔 '구원'을 바라는 심리가 깔려 있어요. 문학 뿐이겠습니까. 정치학이든 경제학이든 과학이든 인간관계든.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성공의 길이 열릴 거 같은 심리도 '구원'을 바라는 현실적인 변형입니다.
자기계발서를 비웃지만 책은 늘 참고서처럼 이용되어 왔고 우린 이 심리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구원을 바라는 심리가 깔려 있죠. 일단 나부터라도 구하고 싶고, 나를 만족시키고 싶은. '자기 치유'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진리 추구니 역사적 사명이니 하는 거대 담론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미난 지점은 글쓰기가 사회와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에 속하기 때문에 혁명이니 참여니 하는 요구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거죠.
현실과 동떨어진 현학성과 지적 배출 같은 공허함을 왜 양산하느냐 하는 공격이.
지금은 구닥다리 취급당하는 초현실주의가 당시엔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건 흥미로운 일였죠.
시대마다 요구하는 바가 약간씩 달라질 뿐였습니다. 무수한 사상의 흐름, 문예 사조들도 그 역학에서 나온 거라고 봐요.
실존주의를 철학이라기보다 문학운동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건 그래서고요.
출판되는 순간부터 글은 전적으로 작가의 것이 될 수 없죠. 나를 떠난 글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흔히 하듯이.
나혼자 생각하고 쓰고 보고 끝낼 거면 그런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써도 되죠.
자기 죽고 나서 작품이 되든 화장실 휴지가 되든 상관 않는다면.
전쟁통에 남의 집 화장실 휴지로 쓰이던 이상의 글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건, 기적입니까, 행운입니까, 운명입니까. 아, 이 모든 추상적인 표현!
살아 남으면 이런 대우도 받는 거죠. 그래요.
카프카가 왜 자기 손으로 자기 작품을 처리하지 못했습니까. 일말의 소통을 바랐던 모든 사람, 작가들에게 저는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을 가집니다.
큰 테두리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죠. 무신론자도 무신을 믿는 거니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문학이 혁명이든 아니든 상관 않고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학이 자유롭길 바랍니다. 내 추구와는 별개로 내가 그러고 싶듯.
* 개인 대 개인이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 문학은)
독자/작가 두 진영 다 공감을 바라지만 쌍방에게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늘 딜레마입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거대 도매상까지 끼여 있으니 말예요.
팔릴 거 같고 통할 거 같은 말만 하고 써라! 열라 머리 굴리는 작가들...아, 딱해라.
저는 오늘도 절판된 책을 여러 권 샀지요. 저는 독자이면서 구조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책을 접할 때마다 합니다.
종말은 어떤 변화의 시작이 나타나기 전엔 말해지지 않죠. 그래서 저는 종말 소릴 들을 때 차라리 출발 신호로 독해합니다.
길게 늘인 과거와 미래 사이에 순간의 현재들을 어찌저찌 모아보고 말하기 바쁜 인간이 ˝종말˝을 말하는 건 오만같기도 하고요.
"고급 독자˝ 소리에 비웃거나 겁먹었던 이들처럼 "종말"을 말할 때의 사정도 딱 그 짝인 듯.
(먼댓글) 꿈꿔라 문학하는 주체를 http://blog.aladin.co.kr/inkriver/818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