盡心章句
45.
孟子曰 君子之於物也에 愛之而弗仁하고 於民也에 仁之而弗親하나니 親親而仁民하고 仁民而愛物이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물건에 대해서는 사랑하기만(아끼기만) 하고 仁하지 않으며 백성(사람)에 대해서는 仁하기만 하고 親하지 않으니 , 친척을 친히 하고서 백성을 仁하게 하고 백성을 仁하게 하고서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註. 愛之而弗仁 ... 仁之而弗親 : 愛, 仁, 親은 모두 사랑하는 것으로 仁에 해당하나 이것을 구분하여 말하면 愛는 아껴주는 것이고, 仁은 人道로 대우하는 것이고, 親은 친척으로 대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처자식을 사랑하는 따위를 이른다. 그리하여 愛보다 仁이 더 간절하고 仁보다 親이 더 간절하므로 親親을 하고서 仁民을 하고 仁民을 하고서 愛物을 하는 것이다. 齊宣王이 벌벌 떨며 죽으러 가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여 羊으로 바꾸게 한 것 같은 것이 바로 愛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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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왕에서 齊宣이란 낱말의 뜻을 찬찬히 곱씹어 봤다.
齊:
1. 제사(祭祀)
2. 제사(祭祀) 지내다
3. 서로 접하다
4. 사귀다
5. 미루어 헤아리다
6. 갚다, 보답하다(報答--)
宣: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은혜 따위를)끼치어 주다
2. 널리 펴다
3. 떨치다, 발양하다(發揚--)
4. 밝히다
5. 임금이 말하다, (임금이)하교(下敎)를 내리다
6. 머리가 세다, 머리털이 희끗희끗하다
7. 밭을 갈다
8. 쓰다, 사용하다(使用--)
9. 통하다(通--), 통해지다(通---)
10. 조서(詔書), 조칙(詔勅)
11. 임금의 말
12. 궁전(宮殿), 임금이 거처(居處)하는 곳
왕의 이름답다. 이름답게 행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행하는 아래 마음은 어떠한가.
盡心은 과연 전체로 올곧게 있으며 전달될 수 있는 것인가.
<에로스의 종말>은 그걸 의심하게 했다. 우리가 재단(裁斷)한 사유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진실하며 현실을 관철할 수 있을지. 나는 공감을 곧바로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어는 선언과 단언(斷言)의 성격을 지닌다. 앞서 나가는 말들. 그러다보니 그렇게 되는 말들. 경주(競走)하는 말들. 불화(不和)하는 말들. 말이 악하면 악한 인간으로 보이고, 유머를 잘 쓰면 유머스러운 사람이 되며, 말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이 모든 게 동시에 될 수도 있다. 상대에 따라서 더 많이도. 여기서 나도 자유롭지 않다.
언어로써 삶을 살지만 현실은 너무도 괴리스럽고 부조리하다. ˝안녕하십니까˝에는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 있는가. 그리고 또 이어지는 말, 말, 말. 실수와 번복과 터득... 다시 반복. 몸이, 사람이 기계 같이 느껴진다. 나는 거기서 愛物을 본다. 親愛가 아닌 不和하는 나를.
사랑은 재발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실패하고 다시 원점이 될 거라고 말해야 할까. 여지껏 재활용만 되어 왔는데, 재활용도 잘 하지 못했다. 다윈, 아인슈타인, 예수가 나타나도 전면적인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 인간의 욕망 근원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사후적으로 파악하기 급급하다. 나는 순수한 無作爲, 無目的은 없다고 본다.
˝위반˝(바타유, 사드)이 나타났을 때 에로스의 재발명은 더 소통 불가능, 도달 불가능으로 보였다. 가까울수록 멂, 낯섦을 극렬하게 느끼듯.
위반의 전시(展示)성은 아우라와 시뮬라크르의 관계처럼 에로스와 포르노의 혼재를 야기하는 작동 기제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강렬함 속에 쉽게 환상에 빠지듯. 주체의 문제 보다 인간 본성의 문제다.
불교에서 와 세속화 된 이심전심 (以心傳心)은 매우 어려운 경지이다. 알랭 바디우와 한병철이 꿈꾸는 `타자로서 만나 이루는 에로스`, `정치와 사랑이 만나 만드는 신비로운 공명`이 이 경지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부정성, 타자성은 불완전한 사다리 같다. 변증법을 말하면서도 대상화만 강조된 논점. 상태의 흔들림, 불완전성, 불안을 외부 사회(주로 소비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만든 인간 자체가 이미 그러하며 에로스도 그러할 수 있음을 고찰하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가 왜 주체의 죽음을 부르는가. 그것은 다분히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타자성`과의 만남,`부정성`의 획득이 아니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흔들림을 조성한다. 생성과 파괴는 에로스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겪는 상태이자 숙명이다.
일례를 보자. 종교 속에 개인성이 와해되었을 때 만들어내는 극단적 현실을 보라. 유대인에 대한 수천 년의 박해.
페미니즘이 단순히 시대적 요구인가. 이 혁명은 울분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인간은 늘 차별과 구분의 잣대 속에서 문명을 형성해왔는데, 충일한 에로스의 상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에로스의 종말>은 이론과 사유로 그쳐 있다. 현실적으로 돌파해 갈 예시가 충분하지 않다. 한병철은 이론을 예찬하면서 데이타 중심의 실증 과학을 불신하는 뜻을 밝히기도 했는데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정도는 철저히 제시해야 했다.
알랭 바디우와 한병철의 사유는 인간의 이런 현실적 추동 속성을 배제한, 초극하라는 이성적 함성만 가득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임을 진정 포기한 적이 없다. 사랑에도, 신에게도 경영상 위임했을 뿐이다. 마음의 평온을, 구원을 바라며.
`자본주의 사회 산송장`만큼이나 `정신적 산송장`도 지상에 가득하다. 사랑의 충실함에서 행복을 바라는 인간이여, 스스로 언어를, 정보를, 정신을 얼마나 떼어내고서 바로 설 수 있을지.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 더 더 쌓을 테지. 재발명 해야 하니까!
바디우, 한병철 당신들이 말한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인식의 본질은 결론적으로 인간의 선택적 취합이었다. 종합적이길 바랐던 무수한 이론들이 그랬듯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백지 어음이 되지 않길 바라며 계승되어 왔다. 현실을 말하면서 그것에 적극적으로 맞부딪히지 않고 이론과 관념에 치우친 재활용도 여전한데, 사랑의 재발명이라... 정말 난관이다.
에로스, 에고의 방황은 자신의 종말까지 건재하리라.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