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새가 눈에 띄면, 열심히 쫓아가던 사냥감을 버리고 어김없이 새를 향해 짖어대는 사냥개 스패니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정당하게 불만을 터뜨릴 수 있고 당연히 불만을 터뜨려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사람처럼) 나는 모든 것을 쫓았다..... 나는 별다른 수가 없어 큰 욕심 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다니며 다양한 저자의 책들을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을 읽는 기술이나 질서도 없고, 기억력과 판단력도 부족해 작은 이익밖에 얻지 못했다.
로버트 버턴 <우울의 해부>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머리말 중 p 11

 
....여러 번 얘기했지만 다시 또, 로버트 버턴 <우울의 해부> 완역본 국내 출간 좀!



1. 쓰는 것은 사는 것에 대한 반성

세상엔 수많은 글이 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글도.
누군가의 기억을 강탈한 글, 문장들을 자신의 글 속에 승화시키려는 노력보다 포획하기 바쁜 글, 사람들의 허점을 이용해 교묘히 조작하고 조립한 글, 선동이나 동조에 급급한 허영의 글....
글 쓰는 자는 사랑에 빠진 자이지만 또한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범죄자이기도 하다.
바벨탑과 최초의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진 걸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고층건물과 웹으로 진화했을 뿐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현상 너머에는 분명히 인간의 욕망이 있고 각자 의미를 가져온다.

조지 오웰은 글쓰는 동기로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을 거론했다. 이는 아주 단순히 요약된 형태이다. 더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동기에 얽매일 때 글은 글쓰는 자에 갇힌다는 점이다. 목적에 의해 글은 순수를 잃는다. 나는 글의 순수를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목적에 경도된 글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이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고 했을 때, 예술적인 글쓰기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나 속으로 되물었다. 실제로 초현실주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중에게 외면 당했고, 근근이 이어져오고 있다. 목적은 정말이지 끝끝내 올바를 수 있을까. 목적은 수많은 이들의 동기-출발점으로 작용할 뿐이지 않을까.

책은 선점과 독점의 편력사이다. 전리품처럼 필수품처럼 모든 이가 골고루 나눠 갖기 위한 게 아니라면, 같은 책은 존재 이유가 없다. 그래서 글 쓰는 자는 매순간 달라지기 위해 도주적, 분열적, 증식적, 탐욕적이다. 글 쓰는 자는 점령하려는 폭군이거나, 그것을 피하려는 은둔자 둘 중 하나를 주로 택했다. 욕망 속에선 서로 다르지도 않다. 폭군과 은둔자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의 유비(類比)를 또 생각하게 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습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확인된 앎을 비교해가며 내 앎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로버트 버튼이 우울하게 술회하고 있는 저 문장처럼 내 영토는 아주 보잘 것 없다.
그래서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나. 어제는 10년 넘게 안 사람의 이름이 기억 안 나 휴대폰 전화부를 한참 뒤져야 했는데, 이니셜만 있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 에세이에서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고 말하며, ˝내 작업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고 문장을 마쳤다.
그가 말하는 `개별성`과 `정치성`은 문제 지적과 포괄적인 지향을 담고 있겠지만 나는 또 의문을 던진다. 글은 자신과의 투쟁, 자기와 세계와의 투쟁이 쟁점이었다고 볼 때 `좋은 글은 개별성을 지워야만 한다`는 건 타당한 표현인가. 그가 비판한 전체주의와 왜 같은 문장을 쓰는가.
또, 그가 거론한 모든 것을 이용한 `정치적` 목적의 글과 열광도 나는 많이 봐 왔다.
이렇듯 글은 쓰인 것의 반대를, 부정을 늘 함께 가져온다. 글 쓰는 자는 자신이 쓴 글에 의해 바로 고발되고 배신 당한다. 책만 칭송하는 무신론자가 책의 언어만 믿고 현실의 언어는 의심하며 책의 언어는 존경하면서 현실의 언어는 천대한다면, 그 자신도 비웃음 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글을 쓰기도 전에 나는 범죄자가 될까 봐 두렵다. 나도 모를 어떤 갈취가 있지 않나 싶어서다. 자신의 언어에 도취해 확신하는 자의 사상을, 어조를 의심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뒤따른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하는 지도.
그렇다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일을 희망하는 어설픈 회개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태어난 건 내 책임이 아니지만, 나는 사는 동안 내내 묻는다. 왜 하느냐고. 조지 오웰이 밝힌 글쓰기의 네 가지 동기가 이 물음에도 해당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으로 이리 저리 고른다면 쓸모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면피를 반성과 혼동해선 안 되리라. 우리의 어떤 목적도 순수하지 않으며 항시적인 정답일 수 없다. 회피하기 위해 단지 취향이자 취미이고 오락이라 말할 때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읽기와 말하기와 글쓰기의 최선은 성취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다.

글에 대해, 책에 대해, 목적에 대해, 윤리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는 여러 날이다.

 

기억과 예술의 공통점은 선택의 요령, 즉 세세한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런 결론은 예술, 특히 산문에는 칭찬의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기억에는 모욕적인 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당연하다. 기억에는 전체적인 그림이 담기지 않고 세세한 것이 주로 담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라이트가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확신, 또 우리가 모든 생명체에 그럭저럭 살아가게 허락한다는 확신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기억은 알파벳 순서로도 정리되지 않는 도서관, 어떤 작가의 전집도 갖추지 못한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 38~39


3세기 초 중국에서 황실 도서관의 책들은 저명한 궁중 학자들의 합의로 결정된 네 가지 느슨하고 포괄적인 표목ㅡ 정전이나 고전, 역사서, 철학서, 그 밖의 문학서ㅡ 하에 정리되었고, 각 표목에 속한 책들은 각각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 회색으로 장정되고 구분되었다(이러한 색 구분법이 초기 펭귄 클래식과 에스파냐어 아우스트랄 컬렉션에도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런 분류법에 따라, 책들은 제목의 철자나 발음 순서로 정리되었다.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55

 

 

2.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제게 책임감을 부과한 선물들, 감사드립니다.

춥고 울적하기 쉬운 날들, 치열하지만 행복한 책읽기, 글쓰기가 모두와 함께 하길.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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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31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실력ㅋㅎ고마워요..몇년간 카폐친구들과 쌓은 스킬인듯...푸하하.
기쁠땐 막...즐거워하면 좋은데 참..이런것도 당심답단..
생각을하고가요!

2015-11-08 2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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