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product/1190/31/cover150/8984073520_1.jpg)
| | |
|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새가 눈에 띄면, 열심히 쫓아가던 사냥감을 버리고 어김없이 새를 향해 짖어대는 사냥개 스패니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정당하게 불만을 터뜨릴 수 있고 당연히 불만을 터뜨려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사람처럼) 나는 모든 것을 쫓았다..... 나는 별다른 수가 없어 큰 욕심 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다니며 다양한 저자의 책들을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을 읽는 기술이나 질서도 없고, 기억력과 판단력도 부족해 작은 이익밖에 얻지 못했다. 로버트 버턴 <우울의 해부> ㅡ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머리말 중 p 11 | |
| | |
....여러 번 얘기했지만 다시 또, 로버트 버턴 <우울의 해부> 완역본 국내 출간 좀!
1. 쓰는 것은 사는 것에 대한 반성
세상엔 수많은 글이 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글도.
누군가의 기억을 강탈한 글, 문장들을 자신의 글 속에 승화시키려는 노력보다 포획하기 바쁜 글, 사람들의 허점을 이용해 교묘히 조작하고 조립한 글, 선동이나 동조에 급급한 허영의 글....
글 쓰는 자는 사랑에 빠진 자이지만 또한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범죄자이기도 하다.
바벨탑과 최초의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진 걸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고층건물과 웹으로 진화했을 뿐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현상 너머에는 분명히 인간의 욕망이 있고 각자 의미를 가져온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777/20/cover150/8984314234_1.jpg)
조지 오웰은 글쓰는 동기로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을 거론했다. 이는 아주 단순히 요약된 형태이다. 더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동기에 얽매일 때 글은 글쓰는 자에 갇힌다는 점이다. 목적에 의해 글은 순수를 잃는다. 나는 글의 순수를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목적에 경도된 글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이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고 했을 때, 예술적인 글쓰기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나 속으로 되물었다. 실제로 초현실주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중에게 외면 당했고, 근근이 이어져오고 있다. 목적은 정말이지 끝끝내 올바를 수 있을까. 목적은 수많은 이들의 동기-출발점으로 작용할 뿐이지 않을까.
책은 선점과 독점의 편력사이다. 전리품처럼 필수품처럼 모든 이가 골고루 나눠 갖기 위한 게 아니라면, 같은 책은 존재 이유가 없다. 그래서 글 쓰는 자는 매순간 달라지기 위해 도주적, 분열적, 증식적, 탐욕적이다. 글 쓰는 자는 점령하려는 폭군이거나, 그것을 피하려는 은둔자 둘 중 하나를 주로 택했다. 욕망 속에선 서로 다르지도 않다. 폭군과 은둔자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의 유비(類比)를 또 생각하게 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습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확인된 앎을 비교해가며 내 앎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로버트 버튼이 우울하게 술회하고 있는 저 문장처럼 내 영토는 아주 보잘 것 없다.
그래서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나. 어제는 10년 넘게 안 사람의 이름이 기억 안 나 휴대폰 전화부를 한참 뒤져야 했는데, 이니셜만 있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 에세이에서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고 말하며, ˝내 작업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고 문장을 마쳤다.
그가 말하는 `개별성`과 `정치성`은 문제 지적과 포괄적인 지향을 담고 있겠지만 나는 또 의문을 던진다. 글은 자신과의 투쟁, 자기와 세계와의 투쟁이 쟁점이었다고 볼 때 `좋은 글은 개별성을 지워야만 한다`는 건 타당한 표현인가. 그가 비판한 전체주의와 왜 같은 문장을 쓰는가.
또, 그가 거론한 모든 것을 이용한 `정치적` 목적의 글과 열광도 나는 많이 봐 왔다.
이렇듯 글은 쓰인 것의 반대를, 부정을 늘 함께 가져온다. 글 쓰는 자는 자신이 쓴 글에 의해 바로 고발되고 배신 당한다. 책만 칭송하는 무신론자가 책의 언어만 믿고 현실의 언어는 의심하며 책의 언어는 존경하면서 현실의 언어는 천대한다면, 그 자신도 비웃음 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글을 쓰기도 전에 나는 범죄자가 될까 봐 두렵다. 나도 모를 어떤 갈취가 있지 않나 싶어서다. 자신의 언어에 도취해 확신하는 자의 사상을, 어조를 의심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뒤따른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하는 지도.
그렇다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일을 희망하는 어설픈 회개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태어난 건 내 책임이 아니지만, 나는 사는 동안 내내 묻는다. 왜 하느냐고. 조지 오웰이 밝힌 글쓰기의 네 가지 동기가 이 물음에도 해당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으로 이리 저리 고른다면 쓸모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면피를 반성과 혼동해선 안 되리라. 우리의 어떤 목적도 순수하지 않으며 항시적인 정답일 수 없다. 회피하기 위해 단지 취향이자 취미이고 오락이라 말할 때조차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읽기와 말하기와 글쓰기의 최선은 성취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다.
글에 대해, 책에 대해, 목적에 대해, 윤리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는 여러 날이다.
| | |
| 기억과 예술의 공통점은 선택의 요령, 즉 세세한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런 결론은 예술, 특히 산문에는 칭찬의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기억에는 모욕적인 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당연하다. 기억에는 전체적인 그림이 담기지 않고 세세한 것이 주로 담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라이트가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확신, 또 우리가 모든 생명체에 그럭저럭 살아가게 허락한다는 확신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기억은 알파벳 순서로도 정리되지 않는 도서관, 어떤 작가의 전집도 갖추지 못한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ㅡ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 38~39
3세기 초 중국에서 황실 도서관의 책들은 저명한 궁중 학자들의 합의로 결정된 네 가지 느슨하고 포괄적인 표목ㅡ 정전이나 고전, 역사서, 철학서, 그 밖의 문학서ㅡ 하에 정리되었고, 각 표목에 속한 책들은 각각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 회색으로 장정되고 구분되었다(이러한 색 구분법이 초기 펭귄 클래식과 에스파냐어 아우스트랄 컬렉션에도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런 분류법에 따라, 책들은 제목의 철자나 발음 순서로 정리되었다. ㅡ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55 | |
| | |
2.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제게 책임감을 부과한 선물들, 감사드립니다.
춥고 울적하기 쉬운 날들, 치열하지만 행복한 책읽기, 글쓰기가 모두와 함께 하길.
ㅡ Agalma
![](http://image.aladin.co.kr/product/6384/28/cover150/8901204770_1.jpg)
![](http://image.aladin.co.kr/product/6382/21/cover150/8931009739_1.jpg)
![](http://image.aladin.co.kr/product/6382/24/cover150/8997379739_1.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120/pimg_7598491531346570.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120/pimg_7598491531346571.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120/pimg_759849153134657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