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아비뇽 연극 페스티벌 무대에서 관객 대상으로 진행된 대담이다. 팟캐스트 인문학 특강 같다고 보면 된다. 
몰랐는데 알랭 바디우는 ˝연극은 몸으로 이루어진 사유˝(p94)라고 칭송하는 대단한 연극인이었다. 희곡, 오페라 집필도 하고, 젊은 시절에 몰리에르 <스카팽의 간계> 주연을 맡기도! 운동권 지식인들이 이런 경향이 많긴 했지만 철학자로만 알고 있던 터라 신선했다. 연극 속 극적 사랑, 연극계의 열정을 아는 바라, 알랭 바디우가 ˝사랑 예찬˝을 할 만 하겠군 했다. 
대담은 고전과 연극을 예시로 들며 설명해서 어렵지 않다. 해제가 거의 3분의 1이라 본문은 100페이지 조금 넘는다. 본문을 잘 따라가면 개념 이해는 쉽다. 가까이 가기에 두려운 철학(그/그녀)이 아니다^^; 무엇보다 주제가 사랑이니 집중될 수밖에 없다ㅎ!

1. 철학에서 사랑을 규정한 `낭만적 개념`, `계약적 개념`, `회의적 개념` 중 지금 시대는 `회의적 개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사랑을 욕망과 섹스로 덮어버린 재난 지경이라고나 할까. 나는 라캉의 `결여의 욕망`도 `회의적 개념`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런 철학적 사랑 개념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사랑은 연애 or 결혼이라는 관계 등식으로 굳어져 있다. 불확실한 속성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기 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확실한 사랑만 찾는다. 
온갖 법칙에 불구가 된 사랑의 상황들을 고쳐 보자는 게  바디우의 사랑 담론이다.


2. 바디우가 사랑에 가지는 낙관의 기원은 플라톤 `사랑ㅡ>진리(이데아)`다. 플라톤의 이 논리를 그저 외우기만 해 오다가 바디우의 설명을 들으니 쉽게 잘 다가왔다. 너무 속성으로 배워 미안할 지경. 바디우 씨 감사~
열정을 불신하는 철학자들의 우정 예찬과 빈번했던 동성애(*생물학적 동성애를 말하는 게 아님)는 `회의적 개념의 사랑`과 `진리 추구로서의 사랑`이 묘하게 얽힌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3.`노아의 외투`(필리프 쥘리앵 <노아의 외투>, 한길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항마로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지 못한 게 의아스럽다. 
`노아의 외투` 는 창세기에서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웃음거리로 만들려던 아들과 외투를 덮어 가려주었던 아들의 이야기다. 전자는 `반항하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 아들이고, 후자는 아버지의 `결여를 메우려는` 아들이다. 후자는 계승, 동맹적 관계로 볼 수 있을 텐데,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적 아들을 더 지지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자아를 강조하고 타자화를 양산해내는 시대가 그걸 더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 이론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에 있어 나르시시즘, 이기주의가 가장 골칫거리인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4. DNA 특성들, 행동심리학이 인간에 대해 많은 걸 드러내주고 있는 상황에서 바디우의 이 사랑 담론이 어느 정도나 힘이 실릴까 싶지만, 파편화된 현대의 사랑을 다시 재발명 해보려는 마오주의자의 철학이 위안과 힘을 준다. 말만 했다하면 ˝헤어지세요!˝만 외치는 어느 철학자보다 낫군. 헌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사랑이 상품화되어 만남 사이트가 광고되는 현실, 좋은 대상을 만나기만 바라는 보험 심리, 이렇게 모두가 사랑을 협소하게만 생각하고 자기충족만 추구하는 상황이라면 그 관계는 더 나아갈 수 없다. 
바디우가 사랑의 위기를 진단한 이 난국 속에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은 어떤 해법을 말할까. ˝종말˝이란 단어가 매우 불길하지만, 바디우가 강조한 공동체적 사랑 ˝박애˝는 당연히 등장하겠지. 그리고 68혁명이 ˝섹슈얼리티와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시도˝(p107)했듯 그럴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을까.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갈망, 이것도 사랑의 어떤 모습 같다.
<에로스의 종말>이여, 어서 내게 오라~ 이 세계를 진리의 눈으로 보게 하라~ 삶을 긍정하기 위해.



ㅡAgalma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ㅡ 아르튀보 랭보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 ㅡ 페르난두 페소아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할 것" ㅡ 알랭 바디우가 하이퍼-번역(자신의 철학적 관점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한 플라톤 <국가> 속 소크라테스의 말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지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 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의적 모랄리스트들은 가족이라는 체제 안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염세주의의 정당화, 다시 말해 사랑이란 결국 종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술수이자 기득권을 확고히 물려받기 위한 사회적 계략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만을 보려 할 것입니다.

*역자 주) 지점(point)은 양자택일의 형태,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관련된 선택과 장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는 주체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간격두기와 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점` 개념은 주체의 선택과 장소를 동시에 가리킨다.(`선택이 있는 곳에 장소가 있다`) 지점을 다루는 것은 결국 영원한 진리의 국지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고기자리 2015-10-26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란 상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궁금해하는 감정이 유지될 때 가장 뜨거운 것 같아요. 내 편의나 필요대로 지레짐작하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말이죠. 알고 싶은 욕망을 사랑의 한 모습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책에 대한 갈망 역시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AgalmA 2015-10-26 20:27   좋아요 1 | URL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많은 문학과 예술 경우 사랑의 뜨거움에서 자멸하는 게 많아 정작 사랑의 진짜 승화를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런 면이 있긴 하죠. 문학과 예술이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 특성상 극적인 전개와 갈등이 주요 요소이기도 하고, 그것이 다시 현실로 반영되는 순환을 만들기도 하죠. 단적으로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당시 많은 이들이 자살했죠. 이건 위 본문에서 말한 `낭만적 개념`에서 진행되어 `회의적 개념`으로 도착한 사랑이기도 한데, 환상 속에서 사랑을 실현하려고 할 때 실패와 좌절은 당연할 겁니다. 환상과 현실이 맞아 떨어지긴 지극히 어려우니까요. 나 혼자도 아닌 두 사람이 그러긴 더 어렵죠. 그래서 바디우는 (어떻게보면 이상적일 수도 있지만) 모든 `지점`을 거치는 두 사람의 사랑을 말한 거고요. 이걸 한정된 방식으로 구현하긴 어렵죠.
그러고보면 참 재밌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꾸지 못해 환상에 빠지지만, 또한 환상이 결코 주지 못하는 걸 이 현실에서 구할 수도 있다는 것...

책에 대한 사랑, 물고기자리님이 확실히 동감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2015-10-26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7 0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