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잘하는, 신간 열풍이 좀 지나가면 읽는 버릇으로 성동혁 <6>을 읽다가, 문득 기록을 남기다.

어떤 독자성. 독특한 발성과 구조성. 시의 특성이 원래 그렇지만, 그는 언어의 형태론적으로 더욱 그렇다. 살아있는 형태 없이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란 참....슬픔이 시각이 아니라 통각인 것과 비슷할까. 김행숙 시인이 성동혁에 대한 시평에서 ˝통각의 가능성˝이라고 말할 만하다.

할 말이 많아지면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딴 짓을 한다. 하던 일을 미뤄두고 갑자기 시집을 펼쳐든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게 밀고 당기게 된다. 인력(引力)과 척력이 괜히 쌍이 아니다.

푸른 색 커버의 책이 맘에 드는 게 많지 않다. 푸른 색 자체로 있는 건 없고 거의 흰 색이 같이 배치된다. 그래서 책장이 흰 색 반, 푸른 색 반이 되어 버렸다. 커버에 블랙이 많이 섞인 책은 확실히 그 내용도 블랙적이다. 잭 블랙적인 영화라는 말이 있듯이. 그게 무슨 말이야! 좋다는 말을 여러 가지 변칙적으로 쓰는 습관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힘들게 사는 노력도 가지가지....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에서 책상은 양탄자로 불렸다. 급기야 모든 어휘 체계를 바꾼 주인공의 삶은 뒤죽박죽 되어가는데 정말 눈물겨웠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가봐....중고서점에서 요즘 <주역>을 살까 망설이고 있다.

이젠 하다하다 온라인 책장을 색상 별로 꾸미는 취미까지...웹 생활을 강력히 점검해야 할 때인 건 확실하다. 이걸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지난 달 빨간 컨셉 책장일 때 찍어두지 못한 게 아쉽다. 20살 10월 22일의 나를 기록해두지 못한 것과 같다. 이래서야 기록탐닉증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기록뒷북증? 기록느슨증? 뭐라 붙이든 누구든 거북하게 만들 것이다. 우린 진화상 결이 맞지 않으면 피하거나 공격하게 되어 있다. 그 놈의 진화! 그 놈의 DNA! 그러니까 유유상종은 협동성이고, 아웅다웅은 경쟁성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인식관련, 뇌과학, 진화론 책이 집중적으로 아웅다웅 내 주머니를 털어가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수수께끼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는 진지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행동함으로써 손해가능성을 최소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를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상대방은 우리가 비협조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적대적인 인종 집단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기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바람과 생각이 명확히 전달되도록 행동하지만, 다른 집단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그 각각의 집단은 상대 집단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집단들은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집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각기 상대가 자신들을 이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애덤 모턴 <잔혹함에 대하여> p56

 

얻을 게 있는 만큼 우리 거리는 정해진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가장 가깝지.
이 생에서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지키지, 돌이키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ㅡAgalma






그 방에선 물이 자란다



세수를 할 때마다 흘러가는 기도를 아끼자 더 흘려보내기엔 세면대의 구멍이 작아
물속에 얼굴을 넣었다 빼도 나는 물의 미간을 그려 내지 못한다

거울을 보면, 숨이 차고
젖은 아스피린과 가 보지 않은 옥상이 보인다
오래 마주치기엔 서로 흐르고

대신 나는 이가 투명해. 표정을 잃을 때마다 사라지는 다리
골반까지만 반복되는 거울

잠시 엄마와 월요일이 사라진 것을 메모했다
그때는 아가미가 생겼다

침대는 누우면. 눈썹이 쏟아지고
돌고래의 문장을 배워 본다
지느러미가 생기면
파도의 단추를 모두 채워 주고 싶다

스위치를 켜면. 물이 우르르 밝다
오늘이 짙고 밤이 숨차고
창문을 상상한다
방의 동공이 크다



ㅡ 성동혁 <6>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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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5-10-23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실물 책장이 흰색에 가까운 옅은 아이보리 빛인데 책장의 한 칸은 청명한 푸른빛이 도는 책들만 모아서 꽂아두었어요^^ 다른 책들은 대개 내용상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모아두지만 그 칸만큼은 아무런 연관 없이 오직 색깔입니다. 얼마나 조화롭고 예쁜지 그 칸에 있는 책들은 빼고 싶질 않아요ㅎ / 어쩐지 숨이 막혀오는 느낌의 시를 읽고 이런 눈치 없는 댓글을 달자니 염치가 없네요ㅎ

AgalmA 2015-10-23 18:39   좋아요 1 | URL
눈치없는 댓글이라뇨~ 전혀요. 각자 느낀 소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사실 대화잖아요 :) 성동혁 시집 물고기님자리도 좋아하실 듯~
저도 흰색에 가까운 아이보리^^ 저는 월넛 빛깔이 싫어요. 고급스러움보다 괴기스러움을 자주 느껴서;; 이케아 선반도 자꾸 늘어나고 이러다 제가 집밖으로 튕겨져나가는 거 아닌가 싶게 꾸역꾸역 책이 느니;;
전 시만 겨우 따로 모으고, 다른 책들은 구매순, 읽는 순으로 여기저기 포진해 있어요. 이따금 산사태처럼 책 무너지는 소리를 안타깝게 듣곤 하죠...
푸른빛 도는 책만 두는 공간이 있다니! 많이도 안 바라고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 제게만이라도 살짝 알려주시면 안됩니까^^?

물고기자리 2015-10-23 18:35   좋아요 1 | URL
저도 월넛 싫어요^^ / 알려드리곤 싶은데 하필이면 제일 예쁜 푸르름은 내용이 꽝인지라..ㅋ 색들의 조화를 포기하지 못해 꽂아두고 있는 거죠 ㅎ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 뭐 이런 색(!)들이 꽂혀있고요^^ 푸르름 사이에 드문드문 완벽한 흰색을 추가했어요. 그래야 푸르름이 더 돋보이더라고요ㅎ

띠지의 색에 푸르름이 섞였다고 우기며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도 꽂아놓았고, 이번에 산 책 중엔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의 녹색위 붉은 꽃이 포인트가 되어 같이 꽂아두니 좋더라고요ㅎ 쓰고 보니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사실은 흰색책만 꽂아 놓은 칸도 있습니다ㅋ 예쁜 커버를 만들지 못 하는 책들 때문에 가끔 속상해요~ㅎ

AgalmA 2015-10-23 19:22   좋아요 1 | URL
김화영 <행복의 충격>은 뭔가 기대를 불러 일으키네요! 이언 매큐언은 전작 탐구하고 싶은 작가라 언젠가 그 작품은 꼭 만날 거 같고^^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어찌 보면 촌스러운데 책내용 생각하면 잘 어울리죠^^ 커버 질감도 너무 딱딱하지 않고 손에 촥 감기는 맛도 있고~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도 어찌 보면 꽃무늬가 촌스럽기도 한데, 가끔 보면 산뜻해서 좋아요. 책장 사이에 화병 끼워둔 기분이랄까^^
가끔 표지가 이쁜 걸 책장 앞에 액자처럼 꺼내놓기도 하니 표지는 정말 중요한 인테리어!
흰색책이라면 타부키도 모으시겠군요^^ 저도 타부키 모으기 시작했는데, 시집 같기도 하고 이상한 나라의 카드 같기도 하고ㅎ 이쁘다기보다 특이해서 이 책들은 가로로 쭉 놓고 싶어요. 도서관 잡지진열대처럼 한 권씩만 두는 책장을 한 벽면에 짜고 싶기도 해요...네, 먼 꿈이죠;;
문학동네 이 선집 시리즈 좋아합니다. 페렉 책도 맘에 들고^^

긴 댓글 수고하시게 만들어서 어쩌죠. 감사할 따름 :)

물고기자리 2015-10-23 19:05   좋아요 1 | URL
<캘리포니아>의 손에 잡히는 느낌은 정말 최고였어요^^ / 타부키 보고 왔는데 저런 깔끔함 너무 좋아요 ㅎ 물론 내용이 더 좋겠지만요ㅋ

AgalmA 2015-10-23 19:09   좋아요 1 | URL
저도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국내 책커버 질감 대회 있으면 1등으로 생각하고 있음요^^ 타부키는, 타부키는...전작 필독 작가로 제 독서목록에 등극^^ 보르헤스와 페렉 이후 이런 흥분 처음이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