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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
토요일에
서울세계불꽃축제가 있었다. 친구가 잘 보이는 포인트를 알려줘서 저녁을 일찍 먹고 밀린 일도 놔둔 채 나가려 했다. 그래도 모처럼의 기회인데 싶어
사무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1.
난 불꽃처럼 일하겠어!
2.
감기 기운이 있어서....
3.
뭐, 그닥~
4.
(이미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빈자리)
그래서
나 혼자 갔다.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치르러 나가는 기분.
너무
조용했다. 돗자릴 펴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한 팀이 그나마 분위기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이곳은 무언가 일어나기에도, 구경하기에도 퍽이나
동떨어진 모양새였다.
강변에
낮은 연기가 흐르고 있는 걸로 봐서 한 차례 불꽃놀이가 끝난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언제나 그랬다. 혼자 무언가 기다리는 기분.
시작은
놀랍고 대책 없이 계속되길 원한다.
펑.
펑펑.
펑.....뚜르르르르....펑.
딱.....뚜르르르르.....펑펑........
스마일
모양
물고기
모양
하트
모양
더!
더!
더!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불꽃은 끝나기 전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듯 쉼 없었다. 핸드폰으로 아무리 잘 찍어보려 해도 흐릿했다. 화면은 간교한
거울처럼 말하고 있었다ㅡ넌 절대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거야ㅡ효과를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흑백으로 설정했다.
그
불꽃은 대공포(對空砲)였다ㅡ기분 탓이야ㅡ실제와 화면을 번갈아보며 ㅡ 넌 왜 저 아름다운 빛을 전쟁의 빛으로 덮으려는 거야 ㅡ 화면을 바꾸듯 내
맘도 바꿔 보려 했지만 점점 식어갔다. 어느 해 팔레스타인 공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의자까지 준비해 웃으며 바라보던
사람들.
불꽃이
환할수록 밤은 깊어갔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얼마나 지나서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대 그리 길지
않았을거다.
2차
세계대전 때 보병대 설문 조사에서 군인의 4분의 1은 격전시 소변을 지렸다고 한다(참고로 대변은 12%). 신참 전쟁 특파원들도 자신이 총구
앞에 섰을 때 소변을 지릴지가 첫 궁금증이라고 한다.(스콧 스토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참조)
그렇게
어딘가에서 환호하면서, 또 어딘가에선 공포에 떨면서 우리는 치른다.
30분도
채 못 보고 건물에서 내려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1시간도 못 채우고 퇴근했다. 내 속에서도 무언가 자꾸 터지고 있었다.
늦은
밤, 거리도 축제 분위기였다ㅡ오늘 따라 왜 이렇게 시끄럽지ㅡ1시간 전까지만 해도 토요일인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두가
모두에게 뭐라고 소릴 지르고 있었고 나도 모두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갇히는 게 싫어 버스도 탈 수 없었다. 또 전쟁이군.
전화를
걸었다.
난
네가 기분 좋아지라고 그런 건데.... 나도 그래. 사람 얼굴 안 보고 다닌 지 꽤 됐어.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고 아는 체나 할 때 인사를
하게 돼.
주택가로
접어들기 전까지 내내 통화는 하울링이 심했고 수신 감도가 좋지 않았다. 토요일이 아닌 진짜 전쟁 때는 이보다 더 하겠지. 무료통화를 다 쓰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진짜 전쟁이 터진다면 그땐 똥오줌이나 다급한 통화로 끝나지 않을 테지.
누군가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죽는다.
이번
서울세계불꽃축제 공식 집계로 사망자가 있었다. 조명 설치 작업자가 강물에 빠졌다가 시신이 되어 발견됐다. 이 날만 투입된 비정규직이었다고 한다.
43세. 아이가 있지 않았을까....
공중엔
환한 불꽃과 환호가 가득한데, 누군가는 그렇게 검은 물속에 가라앉는다.
한밤에
나는 우두커니 기다린다. 불꽃은 또 어딘가로 갔다.
*
나는 이 글을 소설로 써 볼까 하다가 이렇게 버리고 싶어졌다. 태우지 못하는 게 분하다.
ㅡAgalma
p 89~90
˝(중략), 이에 비하면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그 어떤 나라도 오스트리아만큼 끔찍하게 파괴된 곳은 없습니다.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이처럼 파렴치하지는 않지요, 국민들은 기만당하고 온 나라가 훼손당해 소멸돼 버렸지요. 사람들은 수십 년간 몰취미하기 짝이 없는 것만을 설교하고 전파시켰지요, 통치자 중에는 지난 수십 년간 비열하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뒷거래를 일삼은 수많은 장관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주(州)를 소멸시키고 우리나라를 소멸시킨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들이 장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경치 파괴와 도시 파괴를 보편화하고 촉진한 사실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지요. 그러나 수십 년간 비열함과 몰취미가 극도로 만연해 있던 우리나라가 이제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짓누른 결과를 갖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권력을 쥔 사람들이 경치와 도시를 파괴하고 소멸시키면서 민족의 영혼마저 망가뜨렸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혼은 망가졌고 그들의 기질은 비열하고 야비해졌지요. 어디에서나 음흉한 분위기만 감돌지요, 당신이 어딜 가든 이렇게 음흉하고 비열한 사람과 부딪치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이전에 착하다고 여겼던 누군가와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이 몹시 비열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성격이 바뀐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전에 착했지만 그새 비열하고 야비해지고 말았던 거지요,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비열함과 야비함을 암시하면서 억누를 생각은커녕 노골적으로 드러내지요, 당신이 아주 우호적이며 개방적이라고 기억하는 마을을 찾아가 보면 그곳이 악의적인 마을로 변해 버려 개방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고 비열하게 의심만 일삼는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겁니다, 오스트리아 전체가 돈벌이에만 급급한 장사판이 되어 버려 모든 것이 흥정의 대상이고 모두가 사기당하고 있지요,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당신은 아름다운 나라를 여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벌이에만 급급한 상점을 돌아다닐 뿐이지요,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당신은 문화의 나라를 여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딜 가나 유치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서 황당할 겁니다. 이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분위기 때문에 처음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겁니다. 그것은 마치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어디든 널려 있던 동상들이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긴 형용할 수 없는 카오스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