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

움베르토 에코 중세와 위스망스 거꾸로를 곁눈질로 보다가 그 종합은 차후 또 때가 있겠지 싶어 이 글에선복종만 생각했다.

 


일단 미셸 우엘벡의 본심이 매우 궁금하다. 아마 차후 작품에서 파악되리라 짐작해본다. 그간 미셸 우엘벡 소설의 주인공들이-다분히 우엘벡의 삶과도 유사한-자멸에 가까운 은둔자의 길을 고집했다는 걸 생각해보면,복종』의 결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주인공 프랑수아와 실존작가 위스망스의 개종에 우엘벡 자신의 고민은 섞이지 않았을까. 이슬람교를 "가장 멍청한 종교"라고 발언해 소송까지 간 논쟁적 은둔자 미셸 우엘벡도 이 주는 달콤함에 사실 흔들리고 있진 않을까.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는 한 인간으로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유명한 예수 수난상에서 위스망스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이었고, 이 점에서 위스망스는 그의 종족인 다른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사실 자신의 죽음 자체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인간의 유일하고 실제적인 관심사, 그들의 진짜 근심은 바로 가능한 한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p341)




 

우엘벡은 인간을 괴롭히는 불가항력적인 힘들-국가자본주의성적 욕망에 대해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싸워왔다. 그리고 그 패배는 주인공들의 은둔으로 귀결되었다.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히피문화와 관련해 뉴에이지 종교를 신랄하게 보여준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종교와 신을 본격적으로 다룬 적은 없었다.

이 소설에서 이슬람교는 풍요와 개인적 욕망을 내세에서가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해결해주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복종이 서구-이슬람 문화 사이의 문제성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준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그 둘은 차라리 형제처럼 닮았다. 개종의 길까지. 









유일한 해결책은 이라 불리는 유일한 점을 포함하는 상위 그래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개인들 전체가 관계를 맺고, 이 매개체를 통해 사적으로도 관계를 맺었다. (p334)



서구의 무기력 상태가 결국 이슬람 문화에 굴복해가는 과정은 서구의 정신과 종교가 더 이상 현실에서 강력할 수 없는 노후하고 노회한 힘인 것을 보여준다. 이제 서구에서 십자군 전쟁 같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지금의 서구 종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 갇힌 형국이다. “수도원이라는 표상이 말해주듯,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 영혼의 기쁨에 머무르는 여성적 종교”(p265)라고 프랑수아는 말한다.

   

 

중세 기독교는 그 예술적 성취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생생하게 남을 위대한 문명이라는 것을 르디제 그 자신이 제일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점차로 영역을 잃었고 이성주의와 타협해야 했으며 교황의 지상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차츰차츰 사멸할 운명에 처했다. 왜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을까? 참으로 미스터리했다. 신이 그렇게 결정해버렸다.(p336)

 

 

이슬람 문화권은 종교와 민족주의가 맞물려 체제를 지휘하고 있다. IS를 비롯해 각종 이슬람 무장단체의 성질이 단순히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서구 국가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없다그것은 권력에의 의지며, 가부장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폭력성에 기반하고 있다.   

한국에서 IS로 간 소년의 동기를 생각해보며, 모두들 소년의 교육과 학교생활(왕따), 가정사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인간 본성을 탐구해 볼 여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 세계적인 우경화는 과연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풀릴 문제인가. 경제 활동에서 남성과 여성은 앞으로도 경쟁 관계이다. 이 소설은 이슬람교로 새로운 세계를 시뮬레이션해 본다. 이슬람화가 되자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 때문에 일자리는 늘어나고 경제는 호황이 된다. 권력과 성도 혹할 만한 논리로 모두를 유혹한다.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진화론으로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는 소설 속 지배층 인사는 이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바다.


"자연선택은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나, 그 형태는 천차만별입니다. 심지어 식물한테도 적용되는데, 식물의 경우는 대지와 물과 태양이 제공하는 영양분으로의 접근성과 직결되죠. 인간은, 물론 동물이긴 하나, 들판의 개나 영양이 아니거든요. 자연선택에 의한 인간의 지배적 위치를 결정짓는 건 발톱이나 이빨이나 빨리 달리기 능력이 아니라, 바로 지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진지하게 말씀드리지면, 대학교수가 지배적 수컷의 위치에 놓이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p354~355)



페미니즘의 공격 대상이기도 한 우엘벡의 개인적 가치관은 여기선 차치하겠다. 

그는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서구 체제가 전복될 새 카드를 유심히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카드는 매우 익숙한 카드다. 과학을 통해 우주까지 내다보며 많은 인간은 ’ 세계를 버렸다. 그런데 여러 체제와 사상을 거치며 거듭 실패를 경험한 인간은 우주를 거쳐 다시 신을 타고 돌아오고 있다. 이슬람은 신과 우주 법칙을 수와 아라베스크로 표현하며 복종해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라 꼽는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을 버리진 못했다.

을 가장 거부한 자, 니체도 나는 의심한다. 니체는『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화를 가져와 자유로운 인간상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를 거부할 뿐이지 여전히 "신들 세계로의 귀환"이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평생 이라는 개념과 싸웠지만, 그의 저작은 복종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기도 했다. 을 초인으로 바꿨을 뿐 신=힘과 법칙에의 유혹을 결코 거부하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즉 이 모든 건 동서양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은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통용되는 대표적 우주법칙이다. 이라는 개념은 태어났고, 그 법칙을 깰 증명은 여전히 없으며, 가장 강력한 인간 세계의 체제다. 우리를 고통 속에서 구원해 준다면, 복종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현대어인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자유는 복종할 지 말 지를 정하는, 이미 넘어가 놓고 거부의 시늉만 하는 남루한 모습이다. 

 

 

 

미셸 우엘벡의 다음 책이, 위스망스가 『거꾸로』 이후 쓴『좌초된』으로 좌초된 것처럼(제목이 잘못했네;) 되지 않길 바란다. 그가 농경소설을 쓴대도 흥미롭긴 하지만. 





ㅡAgalma








ps)사람들은 왜 그렇게 로마(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서구가 가지는 향수성은 회자되어온 바지만 전반적으로 그 제국의 헤게모니가 만들어낸 많은 문화에 강력하게 끌리고 있지 않나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복종』에서 이슬람은 제 2의 로마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었다. 암튼 더 깊은 내막은중세』를 읽은 뒤 다시 점검하기로...서구-이슬람의 뿌리깊은 반목의 역사도 상세히 알게 되겠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그런 심리와 관련되어 보이는 내용이 있어 참고로 옮긴다.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이 신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우주에서 표류하며 따라서 불안 속에서 부유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존주의자들은 불안이 생겨나는 까닭이 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신과 무신론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자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불안을 일으킨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썼다. "나의 가능성들을 보면 자유의 현기증과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공포에 떨며 선택을 한다." 선택을 피함으로써 불안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기괴하게도 사람들이 권위주의 사회에 매혹을 느끼는 까닭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엄격하고 선택을 억압하는 사회의 확실성이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격변의 시기를 지나다 보면 극단적인 지도자가 등장하곤 한다. 바이마르 독일의 히틀러, 대공황기 미국의 코글린 신부, 오늘날 프랑스의 장마리 르펜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등이 그렇다. 


스콧 스토셀『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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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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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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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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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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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0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스망스의 소설 <좌초된>의 원제가 궁금해요. 혹시 원제가 ‘Là-Bas’입니까? 원제가 맞다면 우리말 제목을 ‘저 아래에’, ‘지옥에서’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AgalmA 2015-10-01 22:56   좋아요 0 | URL
<좌초된>은 소설 속 그대로 인용한 겁니다. <거꾸로>와도 어울리고 이 소설 상황과도 참 적절하지 않은가 했는데, 작가의 의도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번역자가 국내에도 알려져 있는 <저 아래로>를 함부로 의역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요.

<거꾸로>에서 바로 <좌초된/저 아래로>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죠.
<거꾸로>책에 있는 소개를 옮겨 보았습니다. 정식 불어가 아닌 점은 감안하시고요/
<거꾸로A Rebours>(1984)->가톨릭 개종 후 가톨릭 3부작<피항지에서En Rade>(1886)-><어떤 이들>(Certains>(1889)-><저 아래로La-Bas>(1891) 이 순서죠.
이후 ˝에밀 졸라 <루르드Lourdes>(1984)에 맞서 기적과 치유의 신비를 옹호하려는 르포르타주 형식 <루르드의 군중들Foules de Lourdes>˝을 쓴 게 마지막 저작이라고 되어 있어요.
적절한 의문 감사합니다.

cyrus님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cyrus님 가을 독서는 또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하네요. 모쪼록 건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