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님 서재 글을 읽고...
http://blog.aladin.co.kr/798187174/7672384
http://blog.aladin.co.kr/798187174/7672364
§
사회 속 여성의 문제, 페미니즘, 결국은 `인간이라는 딜레마`를 고심하면서 사고 메커니즘으로서의 `언어학`과 관계 메커니즘으로서의 `사회학`을 전반적으로 살펴야겠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하 수로망 같은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으로 관점을 확장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외부로 드러나보이는 남성 vs 여성의 다름, 권력 지배화의 문제에서 더욱 도약해서 살펴야 될 거란 생각을 합니다.
언어가 중요한 단초이기도 한데요.
˝김치녀˝, ˝된장녀˝, ˝김 여사˝ (더 심한 단어들은 차마 자제) 같은 단어들은 한방에 폭탄이 되죠. 그걸 쓰는 사람은 그걸 잘 알고 있기에 강조해서 반복해 쓰고 있죠. 습관화되어 가면서 언어의 계층화, 구조화를 만들며 패거리 문화가 강력해지고 있죠.
최근 일본의 재특회, 일베의 용어들과 폭력성이 그 극단을 보여주고 있고요. 트위터 등 해서 온라인의 수많은 언어 배틀 또한 논의보다 언어의 포화만 되기 일쑤입니다. 거기 사람은 없고 타자화된 공격 대상만 있습니다. `언어충`이란 계층이 생길 것도 같은 상황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메커니즘도 언어성과 사고 문제와 연관되죠. 이론적으로 난관에 봉착할 때 그래서 쉽게 폭력성으로 변질되는 거라고 봅니다. 언어 폭력이든 실질적 폭력이든.
논쟁보다 비교적 상대와의 공감을 바탕으로 문제와 대화를 풀어가려는 성향이 강한 여성의 발언이 무력해지는 지점이기도 하죠. 이 지점에서 주로 지적 능력, 실력 차 운운하는 것 같더군요. 이건 제 추측성 소견입니다.
사고(思考)요? 합리화는 많이 보이는데, 일상에서 제대로 된 사고는 참 보기 어렵단 생각입니다. ˝네가 뭘 알아? 내가 더 잘 알거든! 병신˝ , ˝제대로 알고 까불어라, 루저˝를 교활하게 언어 속에 숨겨 상대를 조롱할 줄 아는 인간의 언어술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남성 끼리 장난삼아 서로를 ˝쌍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과연 언어의 자유입니까. 거기 휩싸여 그 배설을 들어야 하는 제삼자는 어떤 자유가 있습니까.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입니까.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상위 지배층의 어이없는 행태들을 굳이 가져오지 않겠습니다.
또래 집단 문화나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습니까. 문화에 소속되어있지 않은 인간은 없는데, 같은 문화권이어도 왜 그렇게 다를까요. 유전적 우생학과 강자 생존을 들이대야 합니까.
종교, 정치, 일상 전반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이다시피 희생양을 파악하고 동원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개인의 틀, ˝쌍년˝이라 부르는 그 언어 배면에는 `여성`이라는 희생 대상이 상정되어 있으며, 모종의 쾌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때 여성도 남성처럼 뭉근하게 숙성시킨 욕지거리로 맞대응하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핵폭탄을 핵폭탄으로 막자는 어리석은 심산이 아니라면.
모멸은 모멸로 대응하는 게 아닙니다. 상처로 되갚아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보복의 불합리성과 비인간화를 우린 무수히 봐 왔습니다.
이성과 이론으로 무장한다 한들 자신과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비뚤어진 편협성이 감지되고 반성되지 않는다면 타자에게 쉽게 폭력을 감행하는 뿌리 깊은 배척성과 대결의식을 덮어둔 채 문제의 단편만 논하는 게 될 겁니다.
이쯤에서 저는 모두에게 『인민이란 무엇인가』 책을 추천합니다. 얇지만 묵직한 명제들이 가득한 책이죠. 평생 언어와 권력성의 관계-˝구별짓기˝를 연구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 챕터라도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의 저서 『언어와 상징권력』에서 가져온 논의입니다. 부르디외 저서들이 워낙 두껍고 방대해 접근하기 어려웠던 독자라면 부르디외의 연구를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 개론서보다 저자의 육성을 직접 들을 때 명확히 전달되는 게 있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게 단 하나일 지라도ㅡ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ㅡ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앎이 됩니다.
이 책은 여성 뿐 아니라 성 소수자, 이주 노동자 등 세계 곳곳에서 피지배층으로 몰리고 있는 인간-인민에 대해 고심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권력이라도 있는 듯 ˝대중˝이라 부르고 있지만 쉽게 ˝소수자˝를 만들고 있는 수많은 사회 시스템들과 사고화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개인 대 개인의 지루하고 허무한 논쟁으로만 치닫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패러다임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항구적 격차˝를 이해하고 격파해야 할 실천의 문제입니다.
ㅡAgalma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인간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한, 정치적 차원을 생각하는 데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정치는 바로 인민들이라는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들이라는 다수성은 갈등이든, 공동체이든, 각각의 경우에 다르게 변조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p97)
나는 기능적으로 ㅡ그것의 진짜 본성에 의해ㅡ급진적으로 해방자일 어떤 존재를 믿지 않는다. 자유는 실천이다. 따라서 사실 일정한 구속들을 수정하려 하는, 그것들을 보다 유연하게 민들려 하는, 심지어는 그것들을 부수려 하는 수많은 기획들이 항상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획들 중 어떤 것도 단순히 그것의 본성에 의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인간들의 자유는 그것을 보장하는 기능을 가진 제도들과 법들에 의해 결코 보증되지 않는다. (...) 만약 우리가 자유가 실제로 실행되는 장소ㅡ어쩌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 ㅡ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대상들의 본성 덕분이 아니라 역시 또 한 번 자유의 실천 덕분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어쨌든 우리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들을 행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빈민굴 안에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정의상 자유의 기계는 없다. (...) 상호 관계들과 그것들 사이의 항구적 격차들만이 있다.
본문 p119에 인용된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이상길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