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이야기
이경희 지음 / 열화당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 뉴욕에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동(洞) 이름을 알았던 사람

장률 감독 <경주>(2014)에 이런 장면이 있다. 술자리에서 플로리스트가 동북아 세계 연구로 저명한 북경대 교수(박해일)에게 친근하게 말도 붙일 겸 자신의 관심사이기도 한, 북경시의 대표 꽃은 뭐냐고 묻는다. 박해일이 미안해하며 모르겠다고 답하자 동석해 있던 북한학 교수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게 뭐가 중요해! 북한의 국화(國花)는 알기나 해? 모르지? 여기 있는 사람 아무도 모를걸. 그건 바로 (탕탕, 탁자를 내리치며) 진달래꽃!”

나도 몰랐고 관심도 없던 사실이라,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이 이 소재를 쓴 것에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다. 헌데 이 정보에도 틀린 점이 있었다. 원래 북한의 국화(國花)가 진달래꽃이긴 했지만 91년 김일성 주석에 의해 목란(남한:함박꽃나무)으로 바뀌었다. 장률 감독은 이 사실을 알고서 북한학 교수를 비꼬기 위해 이 장면을 넣은 걸까, 그도 놓친 걸까?

이 장면이 내게 남긴 것은, 자신의 관심사에 시종 몰두해 있다 해도 인간은 여타의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려고 한 예술가였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라는 백남준의 세계적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예술세계에 큰 흥미가 없었다. 백남준이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아방가르드 시대를 한참 지나 도착한 그의 모니터와 VCR 예술은 내게 혁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새로움과 충격을 최고로 치는 문화 수용자도 아니어서, 내게 그의 작품은 어떻게 받아 들일까 늘 찜찜한 여지가 있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갈 때마다 중앙 홀에서 마주치는 백남준 《다다익선》 작품을 그래서 머뭇대며 지나쳤다. 이 작품은 건축가 김원 씨와 공동으로 2년 넘게 걸려 만들어졌다. 백남준 작품 중 가장 큰데, 개천절 10월 3일을 뜻하는 1003대의 모니터로 만들어졌고 1988년 설치되었다.

1992년 그의 회갑 년에 맞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비디오 예술 삼십 년 회고전을 준비할 때 일화가 있다. 백남준이 유치원 친구이자 이 책의 저자인 이경희 씨에게 국립현대미술관에 전하는 Fax(그 당시 가장 빠른 통신수단)를 보내며, 굳이 “막계동”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그의 면밀한 성품을 살필 수 있다. 이경희 씨는 서울에 사는 본인도 모르던 “막계동”이란 주소지를, 중학생 이후 계속 해외에서만 거주한 그가 명시한 것에 신기해했다.(p103) 잡지와 신문을 가장 빠른 정보 매체로 여겨 집착하다시피 탐독한 백남준이 허투루 첨가한 것은 아니었다.

 

백남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의 먼지 쌓여가는 모니터 기념탑을 떠올리던 나는, 여러 전시장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두루 접하면서 그동안 내 편견이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를 홀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예술에 대해 한국인이 다분히 정적이고 심미만을 편애하고 있지는 않은지 고찰도 하게 됐다.

개념미술의 창시자이기도 한 뒤샹이 1917년 레디메이드(외부 세계에서 가져온 사물이 미술로 주장, 제시되는 미술 개념)로서 소변기 《샘》을 ‘전시’가 아닌 ‘진술’로서 예술화했듯이, 백남준의 예술작업들도 그 연대였다고 생각한다. 뒤샹의 그 시도가 당시 조롱과 논란거리였듯이 백남준의 다양한 예술 작업들도 국내에서 수용하기 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실질적으로는 그의 세계적 유명세 덕이 컸으리라 본다. 뛰어난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부숴버리고, 첼리스트 샤롯 무어맨과의 행위예술 《TV Bra》, 《TV Cello》, 바이올린을 줄에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등 그의 초기 아방가르드 작업이나 이후 다양한 비디오 아트 작업들을 살펴보며, 최근 한국 예술계 작업이 그보다 더 뛰어난 성취들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글쎄...

 

 

 

 

 

 

 

§§ 백남준을 알아본 사람 & 백남준의 말

우리에게는 번역가로도 유명한 김화영 교수가 ‘비엔날레 드 파리’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접하고 해외의 평가와 함께 그의 말들을 기사로 써 서울에 알렸다고 한다. 김화영 교수는 백남준이 1984년 귀국 시 국내 TV 첫 출연 때 대담자 중 한 사람으로 출연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프로는 대중의 혹평을 받았다. 자신의 예술만큼이나 자유롭고 자 하는 백남준과 예술을 일종의 엄숙주의로 생각하는 한국 지식인들 사이의 조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신문 기고 글 《백남준의 말하는 방식》은 그런 점을 잘 짚고 있다.

 

“나는 그의 비디오 예술을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그의 말하는 방식만은 높이 평가한다. 그의 말은 솔직하고 억압적이지 않다. 때로 그의 말은 해학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억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 예술을 스스로 쇼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쇼는 구경거리라는 뜻이다. 구경거리라는 말을 그는 별다른 부끄럼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의 구경거리는 위락적이며 소비적인 구경거리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며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반성적인 구경거리다 … 나는 할리우드에서 재미있는 쇼를 만들면 재미없는 쇼를 만든다는 그의 말은 그의 쇼가 비판적 쇼임을 입증하는 것인데 그런 말을 할 때도 억압적이 않고 진솔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다.

예술을 엄숙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그는 아무 부끄럼 없이 예술이란 지루한 삶을 맛나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서구 부르주아의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삶이므로 예술은 양념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반론이 성립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백남준의 말에서 감동한 것은 말하는 방법의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이다.

그의 말에 찬성하건 안 하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거나 보고 있으면 즐겁다. 그 즐거움은 그가 비억압적으로 말하고 있는 데서 생겨나는 즐거움이다. 내 의견에 대해 뭐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할 따름이라는 것을 그의 말은 드러낸다. … 그는 옳은 소리를 억압적으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옳은 소리를 목청 높여 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은 억압적이다. 다시 말해 위선적이다. …

나는 누구나 비억압적으로 말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 다시 말해 백남준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꾸는 예술의 꿈이다.”(p44~46) 

 

 

 

김현 평론가가 격찬한 백남준의 생각과 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백남준 회고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카탈로그에 실은 그의 '비디오 예술론에 해당하는' 글이다.

 

 

“비디오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말[馬]에 대한 연구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

약 삼천만 년 전, 유인원들은 야행동물이기를 그치고, 그들의 숲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부터, 가장 빠른 통신수단은 가장 빠른 운송수단만큼 빨랐다. 이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텔렉스와 초음속 콩코드기가 같은 속도라고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말은 텔렉스와 콩코드의 기능을 겸하였다. 오늘날 우리들 결정의 90% 이상이 당사자 간의 직접 접촉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

전화는 약 백 년간을 존속해 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대학의 카스 칼바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이 중요한 물건에 대한 논서가 단지 네 편만 저술되었을 뿐인 반면, 마야 어나 바빌로니아 어와 같은 사장(死藏) 언어에 관하여는 수없이 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기원전 700년, 한 중국의 황제는 한 대신에게 백만 불을 주면서 하루에 1000마일을 달릴 수 있는 말을 구해 오라고 하였다. 그 대신은 온 왕국을 3개월 동안 뒤졌으나 헛일이었다. 마침내 그가 원했던 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말은 그 전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은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닦았다. 그는 오십만 달러를 죽은 말값으로 지불하고 시체를 대궐로 가져왔다. 당연히, 황제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러한 배반행위라면 중국 대신은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은 황제에게 극도로 침착하게 말하였다. ‘전하, 사람들은 말할 것이고, 소문은 바람처럼 날아다닐 것입니다. 그들은 만약 전하가 죽은 말값으로 오십만 달러를 치렀다면, 살아 있는 말에는 얼마를 낼 것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생각했던 대로, 즉시 황제는 그가 원하던 1000마일을 달리는 말을 얻었다. 실제로,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기원전 290년 디앙 쿠오 추의 이야기에서)

정보기술이 개선됨에 따라 오보(誤報)의 기술도 보조를 맞추어 개선되고 있다. 거짓이란 항상 진실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며, 살인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덕담(德談)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다. 가짜 예술품의 발견은 새로운 천재 예술가의 발견보다 더 좋은 일면 기사가 된다. … 영혼의 신비로운 새(鳥)인 소문(所聞)은 호모 사피엔스가 발명해낸 최초의 라디오였다. 왜, 어떤 소문은 다른 소문보다 빨리 퍼지는가를 결정하는 어떠한 규칙도 없다. 마찬가지로 선전의 세계를 통치하는 어떠한 규칙도 없다.

소문은 신진대사의 제2의 작업을 구성하며, 거기에서는 신기함이 진실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것은 단순히 작은 놀라움에 달려 있다. …

몽고 역사의 전문가인 일본인 이와무라 씨의 견해에 따르면 말은 기원전 100년경에 처음으로 길들여졌다고 한다. 기원전 1000년경 인간이 갑작스럽게 진보한 이유를 말(馬)을 ‘발명’한 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말은 전쟁과 수송의 기본사항을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통신도 변화시켰다. 나는 청동기시대의 발전은 말의 길들이기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

어쨌든 지금 우리는 비디오(Video) - 비다(Vida) - 비디올로지(Videology) - 비디오광(Vidiots)의 ‘영광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다음에는 무엇이 나올 것인가. 가장 강렬한 통신력 PSI(Psychic Power), 즉 심령력이다. 자국의 목표를 위해 이 능력을 이용할 수 있는 국가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다. (영국은 석탄의 힘을 이용한 최초의 국가였고, 미국은 원자력의 경우에 그러했다.) … (p99~102) 

 

 

백남준은 1990년 이어령 문화부 장관과의 대담에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서양인에게 한국 문화를 팔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 활동을 옮기다 보니 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고, 결국 백남준이가 하니까 한국의 것으로 여길 게 아닌가. 한국에서 민족 예술이란 말이 유행인데, 좋은 예술을 하기도 어려운데 거기에 민족 예술이란 말까지 넣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민족이란 뜻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이 하는 작업은 민족 예술인 것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민족의 미술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선 스페인의 혼과 역사가 절로 배어 나온다.”(p213~p214)

 

 

 

§§§ 그리고 나는 ‥‥‥

내가 간과한 단점들과 오류도 분명 있겠지만, 최소한 백남준은 그의 말과 동등한 예술과 행동을 보여줬던 것 같다.

누나가 손뜨개로 만들어준 니트 바지의 무릎을 ‘어찌 되나 보려고’ 일부러 가위로 잘라봤던 아이.(p86)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학교를 안 가는 그에게, 너는 종이로 만든 아이냐, 가족들에게 놀림을 받아도(p96) 제 스스로 결정했던 학생.

귀국 때 첫 인터뷰에서 “…… 내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던 자유로운 사람.

미술관으로는 악평 받았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바보상자와 기계들을 ‘빛의 정원’으로 바꾸었던 예술가.

작품명을 ‘환경, 농업, 경제학, 인구, 예술, 교육, 민족주의, 영혼성, 통신, 건강, 교통, 건강, 교통, 연구와 개발, 자서전…’(p106) 등 딱딱하게 표현했지만, 인간 사회를 끝없이 살피던 휴머니스트.

그리고 우리들의 사유와 행동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레이저빔을 쏘며 묻고 있는 자.

故 백남준(1932~2006)

 

 

 ㅡAgalma

 

 

 

 

 

 

 

 

 

※ 이 책은 이경희씨의 술회적인 부분이 많아 백남준 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책을 찾아보니 터무니없이 적어 놀랐다.   

    절판 책도 너무 많고… 앤디 워홀과 비견되는 예술가가 자국에서 이런 지경이라니.

    백남준 사망 이후 출판된, 부인 구보타 시게코 <나의 사랑, 백남준>과 이경희 씨 최근작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는 가장 측근으로서 어떻게 다를까 문득 궁금해진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3-1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김소월의 시며..진달래꽃을 너무 애송하기에..벌어진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했어요. 한 때 경주는 저도 봤는데..왜..몰라.알지..하다가.헉~ 했어요.분명 Aglma님 말처럼 90년대 초 책엔 진달래로..그때문에 격는일들이..있었다는걸..이상문학상 수상작에 나와요.이 후 남북 회담등 90년후반엔 모란 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안다면 아는데..어...랏 싶은..뜨끔했네요.
아르코를 정기구독하는데..안그래도 이번 과천
현대미술관서 백남준의 작품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고..무엇이 그의 의지를 잇는것인가..하는
ㅡㅎㅎㅎ

AgalmA 2015-03-11 22:09   좋아요 1 | URL
그 소재로 소설도 있었군요. 목란(함박꽃나무)도 유의할 게 있더군요. 함박꽃이면 작약, 모란을 가리키고, 함박꽃나무는 산목련ㆍ개목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확히는 모란이 아닙니다.
서울 시내권 전시만 살피다보니 저는 용인에 백남준 아트센타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장소] 2015-03-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가나뉘어 그렇지..목란과 모란 ..이러는게 아닐까요? 작약과 모란은 다릅니다만..같은 과이긴 하죠.. 종의 문제 같네요.
아.네..갑자기.제목 생각이 안나서.ㅎㅎ 인상적인 내용여서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너무 한번에 이것저것 읽고 썼나봐요. 줄거리는 기억하는데...제목이..기억안나요.일어나기싫어서..이럼..ㅠㅠ

AgalmA 2015-03-11 22:40   좋아요 1 | URL
네, 둘다 쌍떡잎식물 강인 건 맞는데, 모란은 미나리아재비목, 함박꽃나무는 목련과네요.
알라딘서재에 식물 마니아 있으면 좋겠어요. 이웃하고 맨날 이것저것 물어보면 좋을텐데ㅎ

읽었던 이상문학상 정리하신다고 들은 거 같은데. 천천히^^...각 회차 별로 1등 뽑아주셔도 재밌을 듯? 수상작과 개인적 취향의 차도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그장소] 2015-03-11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문학상은 정리중이고요. 열심히..
식물마니아 그러네요.대충 보면 이름만 알아도 어디냐 합니다. 모란이 미나리아재비목, 함박꽃나무..목련.
ㅎㅎㅎ풀이냐 나무냐..인데..ㅎㅎ
오늘따라 오타 심해서..계속 지우는 횟수가 더 많아요.

이상문학..ㅎㅎ 이미 대상작을 뽑아놓은걸..
제가 그럴 주제는 못되고요.취향은 극명하게 드러나겠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