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Axt 2021.1.2 - no.034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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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소재로 삼는 글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글쓰기에서 그 과정은 불가피하고, 창작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상상을 총동원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요즘 경향을 보면 국내외 구분 없이 '글(쓰기)을 위한 글'로 끌고 가는 소재가 너무 많다. 밥벌이도 해야 하고 마감을 어기거나 원고 청탁을 거절하면 다음 청탁이 불투명해지므로 기어코 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글을 쓴 작가들 글이 대개 그렇다. 하필 내가 읽는 책만 그런 걸까. 미투 운동 등 페미니즘 열풍으로 이쪽 소재도 한창 몰려 있다. 각종 콘텐츠의 발달, 에세이 붐으로 문학의 소재 빈약은 더 두드러진다.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출발했지만, 뭘 써야 하는지 왜 써야 하는지 공허와 실의에 빠져 있다가 맘을 다잡고 작가는 다시 글을 쓴다. 모든 작가가 염원하는 '대작'의 길은 여전히 멀다. 쓰기 자체가 고역인데 이럴거면 자신이 즐거우려고 쓴다는 정지돈 작가의 말이 이해도 된다. 그는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써달라는 당부도 들었고(대부분의 청탁), 실험 정신을 마음껏 발휘해 달라는 지지(워크룸프레스 출판사)도 받았다. 세상과 사람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작가라는 평보다 전위적인 냉소주의자라는 평이 더 많은 것 같다. 작가도 여러 개성이 있으니, 어떤 점이 더 두드러진 소설만 읽은 사람은 단면만 보고 평가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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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인간에 내재된 어떤 보편적 욕망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면 『봄에 나는 없었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어떤 냉혹한 현실과 대면한 의식의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서전과 소설이 함께 필요한 상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한 인간의 정체성의 구성은 역사와 허구가 각자의 기능을 갖고 함께 작용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자기 속의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손정수, <애거사 크리스티의 두 얼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에르퀼 푸아로와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 스쿠다모어>



인간의 지각은 매우 예민해서 작가가 고통스럽게 쓰면 독자도 그걸 느끼고, 작가가 즐겁게 쓰면 마찬가지로 느낀다. 잘 모르겠다거나 이상하다거나 불편하다는 평가로 던져버린다면 그는 매우 게으른 독서가이다. 그림도 그러해서는 안 되지만 글은 전시장에서 쓱 훑어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위상이 커진 만큼 (그 소비자가 바로 독자이므로) 독자의 위상도 커졌다. 어디서든 최소 투자 최대 효용을 요구하는 태도를 자주 본다. 현대의 독자는 자신이 읽기만 하면 글이 알아서 채워주길 바란다. 명작에 동의하든 부정하든 어떤 평가를 하려면 자기만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정지돈 『영화와 시』 리뷰에서 그의 글의 특성과 왜 어렵게 읽히는지에 대해 쓴 적 있다. 정지돈 소설을 '독자와 싸우려는 작가'라고 재단하고 별점 테러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모든 장르에서 '다양성'은 더 많아야 한다. 한국 문단에서 낯선 정지돈의 글쓰기는 그래서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소설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이 장소에서 한 인간이 풀어놓는 사유의 한 보고서로서도 들여다볼 만하다. 문학의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문학이 쓸모없다는 '무용성'론은 일종의 면피이자 끌리는 말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왜 끝없이 실패하는지 (지금까지는) 문학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많은 작가가 실패와 고립된 소외자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형상화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반추하는 특성의 반영이면서 작가 자신과 인간의 근원적 마음의 대변이다. 대동소이한 '행복'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가 힘을 발휘할 때는 복잡한 불행의 만다라를 그릴 때다.

글쓰기에서 언제나 남는 문제는 하나다. 우리는 왜 읽고 왜 쓰는가. 단지 재미만을 위해서? 읽고 쓰는 행위는 생각하기 위해서다. 왜 저것은 문제이고 이것은 이토록 중요한가에 대해서. 이런 지경임에도 우리는 왜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그러나 예술에서 간편하게 얻는 위안처럼 문학의 힘도 점점 축소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과 문학의 핵심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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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샤워에서 다들 선물을 돌려보며 “아, 이거 너무 예뻐요!”라고 할 때 올리브는 너무 끔찍해하고 나중에 잭한테 내 인생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하죠. 그런 게 너무 웃겨요. 더 나아가서 올리브라는 캐릭터가 그 자체로 이 소설의 큰 특성을 결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번에 『다시, 올리브』를 읽으면서 소설 장르가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사람들의 삶이 있는데 그중에 우리가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는 삶이 있지만, 진짜 삶은 모르잖아요. 가족들만 아는 사연이 있고, 또 가족 안에서도 각기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삶이 있거든요. 그런 비밀스러운 삶까지 읽을 수 있는 게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겉으로 말하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한 이야기. 그런 점이 올리브라는 캐릭터의 특성과도 통하는 듯해요.


- 김세희, <table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 : 김세희+정연희+이봄이랑 / 백다흠 - 올리브가 차를 몰고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만 먹고 자는 게 아니듯 읽고 쓰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든 뭔가 써보려는 작가가 아니라 게으른 독자가 해악이다. 그런 독자들이 많을수록 우리가 좋은 글을 마주할 기회는 줄어든다. 자신의 피드에 온갖 책을 진열해 놓아도 교양은 그렇게 쌓이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엇을 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가가 더 중요하니까. 역사 내내 우리가 사회 지도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느끼는 문제도 이것이잖은가. 읽지도 않고 생각도 귀찮아하며 자기 주장에 열 올리는 이 시대 분위기는 더욱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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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05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정지돈의 늪에 빠졌어요.... 한번 읽으면 뭔 얘기야... 싶지만 왠지 읽고 싶다. 읽고 말겠다 이러다 한 열흘째 이 책만 보고 있어.... 오늘 반드시 털겠어요.... 😡

2021-02-05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5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