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작품은 삶이 끝장났다고 여길 때 깊고 텅 빈 우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라는 메시지가 늘 있다. 그러므로 하루키에게 지하세계(우물, 구덩이, 굴, 죽음의 강)는 빠질 수 없는 메타포.
이 소설에서는 앨리스의 토끼굴에 단테의 신곡까지 가미된 구덩이일세ㅎ 『우게쓰 이야기』처럼 일본 회화 풍으로.



하루키는 떡볶이나 돈까스 같은 작가. 내겐 진정 힐링이 된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방울을 흔들고 싶어진다. 그래, 여기 있다고.




1.
사실 그전에 이미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이 식었던 것 같다. 결혼생활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것이—내 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감촉이 점차 잊혀갔다.
어느 시점에서 그런 나 자신을 깨끗이 인정하고 단념했어야 옳다. 무언가 수단을 강구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 미루기만 했다. 결국 나보다 아내가 먼저 단념했다. 그때 나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 「1.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기사단장 죽이기 1 』

2.
나는 천장의 불을 켜고 다시 스툴에 앉아 그림을 새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난폭하게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있고, 그 일종의 폭력성이 무엇보다 강하게 내 마음을 자극했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놓쳤던 난폭함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떼 지어 나타난 그 난폭함을 다스리고 달래어 이끄는 어떤 중심요소가 필요했다. 정념을 통합하는 이데아 같은 것. 

- 「16. 비교적 좋은 하루」,『기사단장 죽이기 1 』

3.
아마다 도모히코가 일본화용 붓과 안료로 그려낸 가상의 인물이 실체를 지니고 현실(혹은 현실 비슷한 것)에 나타나서 제 의지에 따라 입체적으로 돌아다닌다는 건 분명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그림을 보는 사이 점점 그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아마다 도모히코의 필치가 선명한 생명력을 발한다는 뜻이리라. 현실과 비현실, 평면과 입체, 실체와 표상의 틈새가 보면 볼수록 흐릿해져갔다. 반 고흐가 그린 우편배달부가 결코 실체가 아닌데도 보면 볼수록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듯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단지 검은 선 하나로 거칠게 표현한 까마귀가 정말로 하늘을 날아가는 듯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감상하며 나는 새삼 아마다 도모히코라는 화가의 재능과 역량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기사단장도(아니, 그 이데아도) 이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고 강렬한지 알아보았기에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을 ‘차용’한 것이리라. 소라게가 되도록 아름답고 튼튼한 조개껍데기를 제집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 「22. 초대는 아직 유효합니다」,『기사단장 죽이기 1 』

4.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서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권총 자살하는 남자 있지? 이름이 뭐더라? 너한테 물어보면 알 것 같아서."
"키릴로프." 내가 말했다.
"맞아, 키릴로프. 지난번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올라서 말이지."
"그게 어쨌는데?"
아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어쩌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어쩌다가 그 인물이 떠올랐는데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어. 그래서 좀 신경이 쓰였지. 작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그나저나 러시아인은 발상이 참 희한하단 말이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자신이 신이나 통속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많이 나와. 하긴 당시 러시아에서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 「43. 그것이 그저 꿈으로 끝날 리 없다」,『기사단장 죽이기 2 』

5.
생각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그림을 그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림에 나타내는 것.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나 자신의 비밀신호를 그 안쪽에 은밀히 그려넣는 것.

- 「44.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해주는 특징 같은 것」,『기사단장 죽이기 2 』

6.
"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무슨 소설에 썼지."

- 「48. 스페인인은 아일랜드 앞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몰랐으므로」,『기사단장 죽이기 2 』

7.
돈나 안나가 말했다. "그 강은 무와 유의 틈새를 흐릅니다. 그리고 훌륭한 메타포는 모든 현상에 감춰진 가능성의 물줄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시인이 하나의 광경 속에 또다른 새로운 광경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당연한 말이지만, 최고의 메타포는 곧 최고의 시가 되죠. 당신은 그 또다른 새로운 광경에서 눈을 돌리시면 안 됩니다."

(중략)

"마음을 다잡으세요." 돈나 안나가 말했다. "마음이 멋대로 움직이게 둬서는 안 돼요. 마음을 놓쳐버리면 이중 메타포의 먹이가 됩니다."
"이중 메타포가 대체 뭐죠?" 내가 물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그걸 알고 있다고요?"
"그것은 당신 안에 있으니까요." 돈나 안나가 말했다. "당신 안에서, 당신이 하는 올바른 생각을 붙들어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것, 그렇게 몸집을 불려나가는 것. 그것이 이중 메타포입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쭉 당신 안의 깊은 어둠에 살고 있었어요."

- 「55. 그것은 명백히 원리에 어긋난 일이다」,『기사단장 죽이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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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22598 2020-11-04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떡뽁기 같은 작가라니 ㅋㅋ 기가막힌 표현인데요. 20대 초에 하루키를 탐닉하고 있었던 그때가 딱 그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읽지 않고 있는데 AA님의 리뷰들을 보니 다시 또 하루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AgalmA 2020-11-06 06:29   좋아요 2 | URL
20대 때 읽는 하루키는 인생에서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이라 생각해요^^ 나이 들어 읽으면 그때의 나, 지금의 나를 반추하는 시간도 되고요.
다시 맘 가는 작품 읽어보세요. 다른 감회가 밀려 오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