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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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없는 한강변에서 자유롭게 바람을 쐤던 작은 일상조차 큰 행복이었다는 김지은 씨 경험담에

그녀의 책과 함께 공원을 걷고 싶었다.

 

 

 

제임스 설터의 에세이집 중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원제 'don't save anything'의 반어성을 살린 국내 번역 제목)이 있다. 김지은 『김지은입니다』는 그보다 더 절박하다. 쓰지 않으면 철저히 왜곡된 채 기한도 제재도 없이 떠돌 것이기에 어떻게든 남겨야 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이 책에 얼마나 많은지.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사회는 민주주의든 자유주의든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껴 살아남기 위해 본명과 얼굴을 공개해야 했던 김지은은 민주주의, 진보주의, 인간의 존엄을 정치로 실현하겠다는 자들이 모인 곳이 가장 권위적이며 이기적이고 폐쇄된 착취의 온상이었다고 고발한다. 여성이었기에 더 무시당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책은 성폭력이 전면에 나와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폭력적인 사회', '권력', '위력', '갑질'을 행사하는 자들이 개인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위계 사회'의 문제점을 깊게 생각게 한다. 위력을 향위하는 자는 성폭력이 최상위 폭력임을 알기에 그것을 행사하고 그 힘을 만끽한다. 거기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폭력'에 대한 전면적 거부이자 평화 메시지로 수렴된다. 그녀가 고발을 결심한 것이 단지 자신의 피해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그것을 시사한다. 안희정의 핵심 참모였던 문 선배가 자신의 인간관계와 안락한 미래보다 '정의'를 위해 김지은을 돕기로 한 결정적 첫 도움도 그러한 의미다. 그녀의 삶은 정말이지 노예의 삶이었다. 누구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모든 사안에 객관성과 신중을 요구하는 내 모습이 2차 가해가 되지 않는지 자주 고민한다. 이해나 공감조차 희박하지만 이해나 공감이라는 것이 일회성 구세군 모금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계이고, 정확한 사실 관계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변을 내놓다 보면 실수는 돌이킬 수 없어서다. 사행성 언론, 찌라시와 가짜 뉴스, 악플이 이런 폭력을 무수히 낳고 있는 걸 매일 보니까.

최종 유죄 선고 후 나는 이 책을 마주했다.

아프고 불편한 것을 더더 마주하고 이겨내야 하는 세상이기에

나를 포함한 세상의 많은 김지은 씨,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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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짜리 단기 행정 인턴에서 시작해 기간제 근로자, 연구직을 거쳐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다. 계약 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일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6년을 버텼고 학교도 어렵게 졸업했다. 나는 금융채무자이자, 병환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실질적 가장이자, 성과로 평가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안희정 측 변호인이 나를 가리켜 말한 ‘고학력 엘리트 여성’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일 뿐이었다. 내 또래의 많은 이가 나와 비슷하게, 제각기 노력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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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처음 인계받은 내용은 지사가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도록 어떤 위치에 어느 정도의 각도로 놓아야 하는지였다. 지사가 공관에서 나가서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다 수행 업무라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이 지사의 구두였다. 구두를 신고 나서는 순간부터 지사의 일정이 시작된다. 수행비서는 그 전에 모닝콜로 깨워드리고, 일정 준비, 가방 들고 나오기, 문 열어드리기로 업무를 시작해 지사가 일정을 마친 뒤 공관에 짐 넣어드리기, 문 닫아드리기까지 해야 일단 지사와의 동행 수행 업무가 끝난다. 그리고 다시 내일의 업무를 위해 다음 일정 자료를 숙지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재차 확인하고 동선을 모두 파악하여 필요한 연락이나 조치를 취한다. 수행비서는 지사보다 2시간 일찍 일정을 시작해 1시간 늦게 끝마치는 패턴이었다.

그리고 아주 세세한 사항들까지 교육받았다.

“멍 때리지 마라, 절대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격식 있는 자리인지 미리 확인해라, 지위에 맞지 않는 자리를 싫어하신다, 행사 시 앉는 자리에 착석하는 끝까지 봐야 한다, 보안이 필요한 식사는 수행비서 개인 카드로 결제해라, 사우나, 미용, 마사지 등 지사의 개인 일과 비용도 수행비서 개인 사비로 써라, 지사 가족들의 비용도 수행비서가 부담한다, 현금을 넉넉히 가지고 다녀라, 한도 500만 원짜리 카드를 만들어라, 지사의 식성을 파악해라, 아주 세세한 음식 기호를 외워서 맞춰드려야 한다, 얼굴이나 이름을 못 외우니 수행비서가 보조 기억 장치로 있다가 옆에서 알려드려야 한다, 각종 신고서도 수행비서가 써서 챙겨드려라, 경제 용어도 외워라, 못 알아들으면 안 된다, KTX를 탈 때 수행비서 앞에 있는 받침대는 지사의 커피와 가방을 놓을 수 있게 펼쳐놓아라, 아메리카노에 각설탕은 1개, 시럽일 때는 2번 펌핑해야 한다, 빵을 사 오라 하면 크루아상이나 따뜻한 플레인 베이글을 사라, 크림치즈와 나이프를 같이 준비해드려라, 가끔 단 것을 찾으시면 그럴 땐 옛날 꽈배기를 사라, 우유는 예전에는 커피우유만 드셨으나 요즘에는 흰 우유를 주로 드신다, 꼭 빨대 챙겨라, 자주 부르고 자주 심부름을 시키신다, 병장을 웃기는 이등병의 마음을 가져라, 공식 일정 이후 시간, 기업, 친구, 여자 이야기는 주변에 함구하라, 특히 여자 관련해서는 인수인계서 메모에서도 삭제해라, 단어 언급조차 하지 말고 어디에 쓰지도 마라, 보고 듣고 알아도 비밀을 유지하고 반드시 함구하라, 중요하니 재차 강조한다 (…)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인수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님 기분’이다, 여기에 별표 두 개를 그려라,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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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판사는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왜 법원은 가해자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을까?

‘위력은 존재하나 위력이 아니다. 거절은 했지만 유죄는 아니다.’

‘합의하지 않은 관계이나 강간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으나 성폭력은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판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안희정에게도 16시간을 질문했다면 1심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심 내내 안희정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재판부는 그의 말이 더 일관되고 진실하다고 판단했다. 최초 나의 언론 고발 직후 안희정은 합의되지 않은 관계였음을 인정했고,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으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범죄에 사용한 휴대폰은 파기했다. 진술을 여러 차례 번복했고, 증거를 스스로 없앴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을 심문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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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음해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자의 그 시선을 이용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주요 행위주체들의 담론분석 결과,) 가해자 측은 성범죄 사건을 ‘합의에 의한 관계’ ‘불륜 관계’로 정의하면서 ‘법적 문제’에서 ‘도덕적 문제’로 전환시키고, ‘꽃뱀’ 담론을 끌어와 생존자를 가정 파탄을 초래한 ‘가해자’로, 안희정과 그의 주변 사람을 ‘피해자’로 이미지화했다. 또한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페미니즘 담론을 재해석하여 성폭력의 책임을 생존자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하며 성폭력 문제를 ‘개인화’했다”.

어느 한 가해자만의 특수한 방어 전략은 아니다. 가해자의 가족, 특히 아내들은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동참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오직 가족과 관련해서 의리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여성의 명예와 평판은 여전히 정상가족을 잘 유지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친엄마가 나서서 침묵을 종용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피고인을 대통령 만들겠다고 여러 해를 바쳐왔던 사람들뿐 아니라 피고인의 가족들에게도 나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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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에게서, 교수에게서, 선배에게서 힘의 작동 원리에 따라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함께 적용되는 것이 위력이다.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때로는 직급으로 인해, 때로는 성별로 인해, 때로는 나이로 인해, 때로는 조직이나 재물로 인해…….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위력은 늘 존재하고 있다.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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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업무 중인 수행비서에게 상사의 지위는 24시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것을 고의적으로 성범죄에 이용한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이 중요한 판단을 기피하였다.

나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일도 하지 못하고 수입도 없다. 생계를 늘 걱정한다. 고소 이후 일 년이 넘게 재판에만 임했다. 노동자로서 성실히 살아왔던 내 인생 전체가 한 노동자의 삶으로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행동으로 평가받았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대학원에 간 것은 ‘범죄를 거절했어야 마땅한 판단력 있는 고학력 여성’이라는 가해자의 논리에 사용되었다. 이전 일을 그만두고 선거 캠프에 들어간 것은 팬심에 의한 것이 되었고, 근무 시간 제한 없이 일에 매진했던 것은 피고인을 좋아해서였다고 매도되었다.

만약 당시 정상적인 노동자로서의 삶을 보장해달라고 더 강하게 요구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일을 외면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면 피해자다운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장이 절실했던 내가 당장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았다면 피해자다운가? 이미 안희정 사단으로 꼬리표가 붙은 내가 오도가도 못 한다는 건 함께 일했던 이들이 가장 잘 알았다. “본인이 관뒀대.” “일도 잘 못해.” 평판조회 한두 번이면 끝이다.

‘안희정 무죄’라는 판결문을 받아 든 날도 있었다. 끝내는 ‘안희정 유죄’라는 정당한 판결문을 손에 쥐었지만 여전히 내 삶은 쏟아지는 2차 가해 속에, 기울어지고 삐딱한 시선 속에, 일하지 못하는 처참한 비(非)노동자의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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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19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기가 막히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여전히 가해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보고싶어요. 김지은씨가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ㅠㅠ

AgalmA 2020-08-23 22:4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사람들이 권력, 돈, 인맥을 기를 쓰고 쌓으려는 거겠죠. 뭘 하든 방어막이 되어 주니까. 인터넷 발달로 여론 조성도 쉽지만 그만큼 부정적인 효과도 있어서 피해자가 법적 싸움만 하는 게 아니라 더 어려운 싸움이죠. 정부 일하던 실력을 발휘해 성폭력 재활 시스템에서 좋은 역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