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에 대해서
요즘 나는 에세이 붐을 예전과 다르게 보게 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에세이가 쉬운 읽을거리, 휴식과 위로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했다. 많은 에세이를 접하며 이 현상도 '문학의 종말' 범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 사고가 더 소설 같고, 정치가 (개그 프로가 사라질 정도로) 더 개그 같으며, 애써 찾지 않아도 온갖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왜 문학에 흥미를 느껴야 하는가. '마음의 양식' 같은 소린 잔소리처럼 귀에 걸리지도 않고, 공감력을 키우는 데 좋다며 건강 보조제처럼 팔려고도 들고.
'대문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전 시대 작가들에겐 그럴만한 시대, 환경, 역량이 있었다. 지금은 기술 발전, 많은 정보와 지식 속에서 작가라는 필터를 거쳐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으로 여전히 요구하는 것은 '재미'다. 아니, 이 수요는 더 높아졌다. 더더 즉각적인 재미. 게임, 영상, 유튜브가 승승장구하는 이유다. 뉴스마저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들이 소설을 쓰며 어뷰징으로 독자를 낚으려는 이 웃기게 돌아가는 판에서, 문학은 상대가 안 된다. 문학은 인플루언서나 파워 블로거들이 요약해 전달해 주는 줄거리만으로도 충분히 충족되는데 굳이 400페이지 넘게 시간 들여 소설을 읽는다면 그들에겐 무슨 꿍꿍이가 있다. 글을 쓰겠다거나 뭔가 팔아보겠다는 그런. 관성으로 읽는 중독자와 명예욕에 불타는 이들도 빼놓지 말자. 인정욕구로 다 퉁칠 수도.
시가 시들고 소설이 시들며 다음 차례는 뭘까. 에세이는 흥미로운 틈새시장이 됐다. 에세이는 주인공, 화자같이 복잡한 장치 거치지 않고 작가를 통해 더 가깝게 대리 체험하겠다는 직접성이 강점이다. 다음 수순은 내가 말해보겠다는 자기 충족의 에세이스트가 되는 것. 그러므로 에세이는 계속 잘 팔릴 거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실패도 팔 수 있다)라는 자기 계발의 성화 봉송 같은 형국.
에세이를 버라이어티 쇼로 만들어라.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같은 문장(내 것이 아닌 타인의 문장이라도) 잘 쓸 줄 안다면 만사 형통.
정지돈 『영화와 시』, 금정연 『담배와 영화』는 위의 문장을 같이 인용했다.
§ 걸으며 듣고 읽고 생각하기 - 더
너무 애타게 찾아서 본질을 잊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만난 적 있다. 때론 '사랑'이라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유독하게 붉은 가로등을 흘끔 보고서 여름이라 더 붉고 살아 있음의 악취(미)는 더 정당해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나치게 애호하는 사람. '조금'이 '더'보다 겸손할까. 그렇다면 '조금 더'는 어떤가. 나는 좋아하는 것에 '굉장히'를 많이 쓰는 사람. 한 번 의식하게 되자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단어를 쓰고 혼자 경악하는 순간들이 나를 이루고 명사와 동사에 대한 혐오가 센서등처럼 깜빡일 때 언어의 존재감에 대한 혐오는 갈 곳을 더 잃게 만든다. 침묵은 인간적인 언어적인 것을 버려야만 갈 수 있는 특별한 시공간이다. '나'를 애타게 찾은 것도 잊고서야 가능한.
※ 금정연은 '실패'라는 단어를 굉장히(지나치게) 좋아-집착하는 사람.
§ 대체로 복잡한
금정연 『담배와 영화』가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의식』에 기반해 앞뒤 서술을 구축해서 이제 이 소설을 읽을 때도 되었구나 했는데 슬라보예 지젝 『용기의 정치학』 시작부터 또 『제노의 의식』이 언급돼 당장! 안 읽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제노의 의식』을 다 읽고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를 읽으면 좋겠지만 내게 시작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Diary per la fanzata≫라는 제목을 달고 그의 유작으로 발간된 이 일기장을 통해, 우리는 스베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허구적 분신이었던 제노의 성격에 대한 많은 흥미로운 통찰을 해볼 수 있다. ‘이 일기의 작가’는 매일매일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대신 주로 자신의 의식을 고찰했다. 또한 약혼녀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분석했고, 자기 자신의 엉뚱한 공상들을 세세히 묘사했다. 1월 3일 자 일기. 게오르그 에버스의 감상적인 시 한 구절이 꽃무늬와 함께 인쇄된 아래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딱 두 종류의 행운이 있다. 아주 숭고하게 사랑을 하거나,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싸워 승리를 얻어내는 그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만, 운명이 이 두 가지 행복을 다 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행복이란 사랑을 포기하거나 인생의 전장에서 물러서는 것이다."
"조이스는 스베보의 두 번째 작품 ≪노년≫에서 그가 기억하는 몇몇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그렇다. 스베보는 이 젊은 아일랜드 청년이 훗날 작품의 일부를 구상하는 데 ‘도움’을 준 여러 출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이스는 스베보와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더욱 자유롭게 토론하게 되었다. ≪율리시스 Ulysses ≫를 쓰려고 계획했을 때, 그는 종종 자신의 제자인 스베보에게 유대인의 신앙과 관행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스베보는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인물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작품 해설과 배경> ,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의식』(2009, 느낌이 있는 책)
§ 대체로 미미한
어떤 창작도 출발점은(종착점마저도) '나'이다. 많은 글쟁이들에게 실망하는 건 자신의 글이 좋은 사람이면서 훌륭한 작가의 징표라고 알아봐 주길 바란다는 것. 그 괴리를 내보이고 깨부수고 연결하면서도 (고통을 감수하며) 존재하려는 사람이 '진정한'(염오스러우면서도 대체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해 쓴다) 작가이다. 빛의 산발로 가득한 빙산으로 덮을 능력이라도 있나. 문학이라는 간판 뒤에서 정탐하고 이용하고 훔치는 자들을 그만 보고 싶지. 스스로 부역하며 파는 짓도 그만하도록 해. 그걸 걷어낸 문학은 과연 얼마나 남을까. '진정한 문학'이란 것이 없다는 게 핵심일까.
앙투안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2018, 워크룸프레스)은 역시 내 취향이었다. 내가 향하는 동굴의 입구와 흡사하다.
『Bardo or not Bardo』가 가장 보고 싶지만 『찬란한 종착역』이 출간된다는 건 기쁜 소식이다. 『메블리도의 꿈』도 곧 입수할 것이다. 포스트엑조티시즘 같은 건 몰라도 괜찮다. Just read.
머릿속이 너무 엉망이다. 매일이 나만의 맞춤 지옥이다.
바질 3주 차
§ 문체에 대해서
작가가 되길 정말 원하는 이들이 질투하는 것은 등단이나 성공이 아니(어야 한)다. 누구와도 구별되는 문체(스타일)야말로 탐나는 보물이고, 필사는 문체에 대한 찬미다. 좋은 글을 재밌는 스토리와 구성, 인물의 하모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생각하는 강력한 기준은 '문체'다. 문체야말로 잉태와 출산의 모태다. 존 맥피는 구조를 강조하지만 문체가 부실한 건축물은 다세대 주택 같은 구조물이 될 뿐이다. 이런 주택도 살만하다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편집증적인 구조 강박과 작법 프로 선수 문체까지 지닌 존 맥피는 문체보다 구조를 짜는 게 글쓰기 방법으로 더 쉬워 구조를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형식과 내용이 같이 나오듯 문체의 달인은 구조도 잘 짜기 마련인데, 구조를 짤 수 없는 문체는 자산 없는 허풍선이 부자다. 구조냐 문체냐. 사람을 세포에서 외피까지 완성된 생명체로 보는 추적과, 우주적 연결 속에 위치한 인간이 행하는 모든 평행우주적 결과를 가늠해보고 기어이 실현된 인격체로서의 자아를 보는 시각 차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의 성격이나 취향과 문체를 혼동하면 안 된다. 이 문제는 신이나 영혼이 있느냐의 믿음의 여부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고 이 잣대로 세계를 구성한다. '왜'를 떠넘기기에 적절했고 '어떻게'를 사육한다. 태초에 하나의 자아가 있었다라는 식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수많은 씨앗 중에 굳이 바질을 선택하고, 존 맥피의 이론에 동의하며 입장을 펴느냐 마느냐는 문체가 결정한다는 소리다.
결국 아스퍼거 증후군의 독특한 기억 방식이나 반드시 변하고 마는 불 위의 음식처럼 겪고 쓰고 사라지는 결과만이 기이한 유적처럼 남는다.
§ 베른하르트 풍으로
베른하르트 소설은 거처에 처박혀 있거나 정처 없이 산책하는 인물이 많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노골적으로 죽느냐 사느냐 말하지 않는다. 베른하르트의 인물들은 오른쪽 길이냐 왼쪽 길이냐이지만 불길함의 우위에선 베른하르트가 승자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참을 수없이 뛰쳐나가고 싶다. 집안에서 몇 번을 서성이다 어두컴컴할 때 결국 나왔다. 빗속에서 좋아하는 페이지를 읽었더니 우글쭈글 해져 버렸다. 의도와 비의도가 섞인 채 좋아하는 책은 늘 이런 수난이다. 좋아하는 책은 자주 펼치니까 사고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지만 다른 경우에도 역시 수난이 따랐다. 책을 무척 아낀다고 자부하는 이라서 빌려줬는데도 음료수를 쏟아 미안하다며 돌려줬다. 오, 나의 파스칼 키냐르를! 사람들은 책을 빌릴 때 은근히 선물로 주길 바라는데 스스로 실현할 때가 있다. 베른하르트 책 중 구하기 힘든 『벌목꾼』은 아예 돌려받지 못했다. 리뷰라도 써놔서 다행이지.( https://blog.aladin.co.kr/durepos/9024478 )
§ 의지와 무기력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읽다가 이 내용을 소설로 완벽히 쓴 미셸 우엘벡의 이 소설이 생각나 다시 읽었다. 우엘벡 소설만큼 공감과 더불어 반감도 일으키는 작가도 드물다. 한국에선 이런 소설 나오기 참 힘들지. 역시 프랑스 문학 내 취향.
글도 그렇지만 정신승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문학을 마니차나 자위행위같이 쓰더라도 그게 죄는 아니지. 오히려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구도하겠다는 건 대단한 일. 맹목적인 신념이나 기도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으면 그걸로 먹고 살 수도 있고.
1.
자책과 자기비하는 사실은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 타자를 향한 것이다. 우울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자아의 분열이다. 자아의 일부가 역시 자아의 일부가 된 타자에 맞서 그를 비난하고 비하하는 것이다."
2.
내 속의 타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일관되게 조직하는 부정성의 공식이다 .
-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김영사)
1.
어려운 점은 바로 규칙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는 데 있다. 결국 당신은 규칙에 따라 살게 된다(이따금, 정확하게, 그것도 지나치리만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총괄적으로 그렇게 된다). 납세 고지서들은 납입 기한 안에 내야 한다. 청구서들도 제날짜에 맞춰서 지불해야 한다. 당신은 신분증 없이는 감히 나돌아다니지도 못한다(그뿐인가, 신용 카드 전용의 작은 주머니까지 마련해 가지고 다닌다……!).
그렇지만 당신은 친구가 없다.
규칙은 복잡하고 형태도 다양하다. 직장 근무 외에 꼭 필요한 일은 구매 행위와 자동 인출기에서 돈을 빼내는 일이다(그리고 인출기 앞에서는 줄을 서야 한다). 특히 당신 삶의 다양한 측면을 관리하는 기관들이 요구하는 온갖 규칙들이 있다. 게다가 당신은 병이 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이 들고 새로운 수속 절차가 필요해진다.
한편, 자유 시간이 남아 있다. 무엇을 할까?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타인을 위한 봉사 활동에 쓸 것인가? 하지만 타인은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음악을 들을까?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음악을 들어도 별반 감동을 못 느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DIY 제품을 사다가 만드는 취미를 갖는 것도 자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것도 점점 더 자주 나타나는 이런 순간들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의 절대 고독, 우주적 공허감, 당신의 존재가 고통스럽고 결정적인 재앙에 다가가고 있다는 예감이 현실의 고통 속으로 당신을 몰아넣으려고 몰려오고 있는 순간을.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죽을 생각은 없다.
2.
우리 문명은 생명의 고갈로 고통받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루이 14세가 살았던 세기는 삶에 대한 욕망이 컸고, 공인된 문화가 육체적 쾌락의 거부에 역점을 두었으며, 사교 생활은 불완전한 즐거움밖에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진정하고 유일한 환희는 신에 대한 믿음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말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연애와 섹스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경이롭고 신나는 것이라고 우리 자신에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면서도 말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생명의 고갈의 표본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욕도 없고, 야망도 없고, 별다른 기분 전환 거리도 없는 상태. 나는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대체로 다 그렇지 않나 싶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소시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확히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거의 정확한 판단이 아닐까? 적어도 80퍼센트 정도는 정상이다.
3.
몇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한때 자신이 낙오자 내지는 패배자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4.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 빈곤〉 현상을 낳는다. 어떤 이들은 매일 사랑을 하는데, 어떤 이들은 평생에 대여섯 번뿐이다. 어떤 이들은 열댓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여자가 한 명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장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해고가 금지되어 있는 어떤 경제 체계에서는, 각자 어느 정도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성공한다. 간통이 금지된 섹스 체계에서, 각자는 어느 정도 자기 침실 파트너를 찾는 데 성공한다.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실업과 가난에 허덕인다. 완전 자유 섹스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행위와 외로움 속에 늙어 간다.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 각계각층으로의 확장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섹스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 그 사회의 모든 연령층과 각계각층으로 자신의 투쟁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5.
「물론. 오래전부터, 태초부터 그래 왔어. 라파엘, 너는 젊은 여자하고 사랑하는 것은 꿈도 못 꿀 거야. 결심을 해야 해. 그런 식으로 지내는 건 네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아. 아무튼 벌써 너무 늦은 거야. 라파엘, 네가 젊은 시절부터 계속 경험해 온 성생활의 실패, 열세 살부터 너를 따라다니던 좌절감은 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거야. 이제부터라도 네가 여자들을 가질 수 있다고 치자 ─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지만 ─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일도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없어. 네가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날의 사랑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아로 남게 되는 거야. 네 가슴속에서 그 상처는 벌써 고통이 되고 있어.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거야. 그 고통은 가차 없이 너의 심장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고. 너에게는 이제 구원도 해방도 없어. 말하자면 그런 식이야. 하지만 네게 복수의 기회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야. 네가 원하는 여자들을 너도 소유할 수 있어. 너는 그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도 소유할 수 있을 거야. 그 여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 줄 알아, 라파엘?」
「아름다움……?」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름다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그 점에서 내가 네 착각을 깨우쳐 주지. 그들의 질도, 그들의 사랑도 더 이상 문제가 안 돼. 그런 것들은 결국 인생과 더불어 다 사라지거든. 너는 이제부터 그들의 인생을 소유할 수 있어. 오늘 저녁부터 살인자가 되는 거야. 날 믿어, 이 친구야. 너한테 남은 기회는 그것뿐이야. 네 칼끝에서 여자들은 떨면서 자신의 젊음을 구걸하겠지. 그때 너는 진정으로 주인이 되는 거야.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소유하게 되는 거지. 그들을 희생시키기 전에 그들에게서 달콤한 것들을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 칼은 이제 중요한 친구가 되는 거야, 라파엘.」
6.
12월 31일 밤은 힘들었다. 마치 유리 벽이 부서지듯이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부서져 버리는 것을 느낀다. 분노에 사로잡혀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게는 이 모든 시도들이 이미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패, 사방에 실패만이 널려 있다. 오직 하나 자살만이, 닿을 수 없는 채로 저 건너편에서, 반짝거리며 내 마음을 끈다.
우리를 설명할 문장을 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