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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과학 -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읽는 통계물리학의 경이로움
김범준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12월
평점 :
과학은 매일 실생활에 긴밀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거리감을 많이 느끼는 학문이다. 어렵고 생소한 개념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의 믿음을 지적하게 되는 학문 특징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정다운 인사와 음악으로 채소를 키우면 무럭무럭 자란다는 얘기는 거짓, ‘사랑’이라고 적은 물통 안에 물을 담으면 물 분자의 형태가 예뻐져 건강에도 좋다는 것도 거짓, 게르마늄 팔찌가 혈액 순환을 돕는다는 것도 거짓, 집 아래에 수맥이 있어 잠을 못 잔다는 것도 거짓, 조상 묘의 위치가 후손의 성공을 결정한다는 것도 거짓, 혈액형과 성격이 관계가 있다는 것도 거짓, 태어난 시점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주팔자도 거짓, 뇌호흡과 텔레파시,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창조과학도 황당한 비과학적 주장이라고 과학은 연신 비판하는 역할이다. 기술과 지식이 좇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늘어가는 현대에서 과학만큼 검증과 비판으로 바쁜 학문도 없을 것이다.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 종교 등 어느 것 하나라도 믿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 볼까 생각하는 게 한국 사람의 흔한 심리 아니던가. 과학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과학을 꺼려 하는 사람은 오해까지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지식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방식”이고, “수많은 시험결과와 관찰 자료를 모아, 현재 내릴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완벽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거다.” 만물을 통제하는 상상적 존재(神)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두려운 진실의 맨얼굴을 용감하게 이성의 눈으로” 마주하자는 게 과학의 취지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름다움은 결국 누적된 체험의 결과”이듯이 과학도 그런 과정 속에서 성장해왔다.
생물학 공부를 하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숫자가 있다. 우리 몸에는 1,000억 개(정확히는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우주 관련 책이나 물리학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숫자가 있다. 우주에는 1,000억 개 정도의 은하가 있다. 신경세포 수를 포함해 우리 몸에 100조 개에 달하는 세포가 있듯이 각 은하는 수천억 개가 넘는 별들을 품고 있다. “지구가 우리은하 전체를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해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12월 31일 밤 11시 30분쯤이고, 우리 모두는 우리은하의 1년 중 한 4초쯤 살다 가는 셈이다. 공간적인 면에서나 시간적인 면에서나 우리는 정말로 티끌과 같다.” 존재는 별의 먼지로부터 와서 다시 먼지로 돌아가지만 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게 없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두루 살펴보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간은 참 대단하면서 참 하찮게도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든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공부’라는 점에서 기쁨과 좌절도 동시에 느낀다. 성과가 아니라 ‘알고자 함’과 ‘나누고자 함’이 인류를 성장시킨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중서적 출판보다 논문 한 편 더 써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쪽이 훨씬 이득일 텐데도 김범준 교수가 이 책을 쓴 것도 그런 동기에서 나왔다.
이 책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현실의 빅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복잡계 과학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호기심-추동 연구(curiosity-driven research)’에 기반한다. 물이 얼음이 되는 온도의 문턱값이 있듯이 문턱값 예측은 지진과 같은 재난을 대비하는 방법이 된다. 과학은 ‘운’이라고 눙치는 게 아니라 ‘구라모토 모형’ 등으로 현상들이 상호작용하며 때맞음(synchronization)으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한다. 정확하게 이용한다면 통계물리학은 세계를 더 명확히 볼 수 있는 지표를 제시할 수 있다. 2016년 한국의 촛불혁명처럼 “비폭력 저항운동이 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비해 무려 2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누적확률분포 도표로 소득세와 재산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의 편중을 막는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세기 프로젝트에서 촛불을 들지 않아 사진 분석으로는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을 ‘암흑물질’로 설정한 것에는 웃음이 절로 터졌다.
같은 데이터로도 방법이 달라지면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선택치우침’이 있으면 역설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과학은 경고한다. 선거 개표 시 실제 지도에 정당을 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구비례지도(키토그램)로 표시하면 더 명확히 상황을 볼 수 있다.
개미 한 마리가 그렇듯 인간 개인의 힘도 미미하다. 그러나 집단이 되면 개미도 인간도 놀라운 창발현상(개별 구성요소는 가지고 있지 않는 새로운 거시적인 특성을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준다. 유머가 넘치는 김범준 저자는 차은우와 본인 비교로 중력파를 설명했는데, 기생충학자 서민이 “저자가 차은우를 닮았다는 대목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책”이라는 평을 달기도 했다(ㅋㅋ). 이세돌과 알파고 승부전에서 저자가 읽어낸 의미도 좋았다.
“사실 내가 이번 승부에서 느낀 것은, 인간의 직관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근거 없던 자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인간의 위대한 직관도 결국은 프로그램으로 구현 가능한 유한한 단계의 계산으로 대치할 수 있다는 가슴 아픈 깨달음이다. 인간의 위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리고 인간도 진화의 연속선상에 놓여 다른 생명체 모두와 기원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경험한, 이번에는 우리가 신비롭게 여겼던 인간의 지성에서 다시 발견한, 익숙하지만 다른 연속성의 깨달음이다.
‘집중’과 ‘직관’은 우리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에 빠져 자랑스러워했던 인간 지성의 엄청난 능력이 아니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한계 지워진 가여운 인간 지성의 두 약점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얼마든지 넓고도 깊게 볼 수 있는 지성은 ‘집중’과 ‘직관’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집중’ 없이 한 번에 모두 다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직관’ 없이 끝까지 계산해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인간의 ‘집중’과 ‘직관’ 없이 모든 것을 ‘계산’으로 환원해 처리할 수 있는 미래의 지성 앞에서, 사람의 연약한 가여운 지성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한의 정보를 0으로 수렴하는 시간 안에 계산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공지능에게도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이런 한계에 맞서, 인공지능도 ‘집중’과 ‘직관’을 배울까. 그럼 인공지능이 갖추게 될, 인간보다 더 넓은 ‘집중’과 더 깊은 ‘직관’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성이 만든 지성이 만들 지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지수함수로 한국의 성씨 분포와 카톡방의 데이터를 비교해 ‘버스트(burst, 잠잠하다가 다시 어떤 일이 후다닥 여러 번 일어나는 현상)’를 설명하는 것과 영화 생태계의 불공평을 비판하는 것도 호기심 많은 물리학자 다운 분석이었고, 분포함수를 통해 득점이나 신기록 경신이 인과적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건이라는 도출, 과학책과 소설책의 판매량 비교로 “우리나라에서 출판하는 책들의 판매량의 반감기가 두 달이 채 못 된다는 결과로부터 대부분의 출판된 책들이 1년이 지나면 가장 많이 팔렸을 때에 비해 판매량이 1%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흥미로웠다. 브라운 운동(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운동)을 만취자의 이동에 비유해 설명하는 것도 재밌는 발상이었다. 영화 《컨택트》를 고전역학으로 볼 때의 해설도 유익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미래를 보는 시각은 정반대다.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 고전역학이라면, 양자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정확히 결정될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와 아주 작은 변수로도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카오스이론’으로 대치한다. 인과론과 목적론적인 고전역학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양자역학이 말하듯 우리가 정확히 입증할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이 세계에는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늘 말한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국이 노벨상을 받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반어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은 조천호 저자가 『파란하늘 빨간지구』에서 밝힌 소회와 다르지 않았다. 학계의 문제도 개선되어야겠지만 한국인의 인식도 상전이(물질의 상이 변하는 것)가 일어나야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더 배울 수 없다.” 자본주의와 각종 카르텔로 돌아가는 세태, 황색 언론과 가짜 뉴스, 기레기 욕을 하긴 쉽지만 각자가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 들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이상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투명성, 합리성, 객관성을 방법으로 한 과학적 사유 방식이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길. “공통의 기반에 함께 동등하게 서 있어야만 합리적인 추론을 통한 합의도 가능”하고 건강하게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에 ‘과학’보다 ‘관계’를 더 앞에 둔 이유이기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