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데닛의 《주문을 깨다》,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장하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잔인한 지하디즘Jihadism이 세를 불리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 임금님은 약 400년 동안 행진해왔는데,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임금님을 가리키며 벌거벗었음을 상기시킬 때였다.
추기경이 바티칸궁전에서 전달하는 교의, 펠리시테에게 무릎을 꿇게 하는 교의, 와인으로 가득한 바티칸궁전, 터무니없는 칙령과 내세에 대한 위협에 시달리는 대중……. 이것은 공격받을 만하고 공격받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공적 영역으로 흘러나와 교육, 법 제정,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장의 정당성을 조사할 때는 상처 입은 감정을 고려할 의무가 없다. 신의 존재 여부가 1급 문제이지만, 그것은 네 기사의 논쟁에서 곧 빠지고 그 자리를 2급 질문들이 대체한다.
신성과 내세에 대한 믿음은 설령 그것이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주장에 근거한다 해도, 선을 위한 힘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것은 세계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소가 되지 않도록 도덕적 나침반과 도덕률을 제공하는가?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것은 대부분 은유이다. 종교적 이야기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구조와 위계, 의미가 사라져버린 이 상대주의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틀로 받아들이면 왜 안 되는가? 모든 곳에 편재해서 우리 모두가 느끼는 영성과 신비는 또 어떤가? 당신은 이성과 숫자와 망원경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두려움 없는 네 기사는 이 2급 주제들로 풍덩 뛰어든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만족스럽지 못한 명제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겹치지 않는 교도권. "과학의 일은 과학에, 나머지는 종교에 맡겨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를 고려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네 기사는 세계, 우주, 인간의 불안은 신비the numinous를 드러내고 경험한다는 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이것은 일종의 양보가 아니다. 왜냐하면 뉴먼numen(정신적·창조적 에너지)은 (몇몇 사전에서 설명하는 뜻에도 불구하고) 루멘lumen(빛)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덜 매력적인 현상인 잔인함, 암, 살을 파먹는 박테리아만큼이나 신성의 존재를 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 : 나는 그 모든 것을, 대개는 그의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종교적 조직에서 받는 무조건적 환영이 없다면 인생이 황량하고 외로워질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종교가 감싸고도는 비합리주의의 잔재가 유감스럽지만, 구제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잘해내는 국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인도적 임무를 인계받을 세속의 기구를 찾을 때까지는 교회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나는 이러한 종교 조직들이 명백한 난센스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충성에 빠지지 않도록 돕겠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 종교인과 말할 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논쟁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의 가장 멋진 점은 깊은 신앙으로 내면의 불신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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