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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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반서사적 글쓰기를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 서술 방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실제 인물의 삶이 문학적 허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다. 두 주인공 어머니와 아이를 위해서도. 물론 이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이의 탄생은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과 말문이 완전히 막히는 것’이 만나는 문학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 소망 없는 불행  ▒

 

*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이니 심리학적이니 사회학적인 꿈 해석 운운하며 이 흥미로운 자살 사건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도 있을 어떤 낯선 인터뷰 기자보다는, 내가 그녀에 대해서, 또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다. 가령 무언가 할 일이 있으면 나는 기운을 얻는다. 마지막 이유는, 방식은 좀 다르겠지만 마치 인터뷰 기자처럼 이 자살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모든 이유들은 아주 임의적인 것들이고, 역시 임의적일 뿐인 다른 이유들로 대치될 수도 있다. 어쨌든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던 짧은 순간들과 그런 순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옛날부터 내게는 이런 욕망들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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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히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

이 두 가지 위험들은 ㅡ 즉 일어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위험과 한 인물이 시적 문장들 속으로 고통 없이 용해되어 버리는 위험 ㅡ 나의 글 쓰는 작업을 더디게 한다. 왜냐하면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평형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어떤 문학적 창작에나 다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는 사실들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무언가 허구로 생각해 낼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왜냐하면 이미 통용되는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서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소한 사건들 중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몇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문장마다 여자의 전기에 흔히 쓰이는 보편화된 형식들과 나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의 특수성을 비교했다. 결국 그 둘을 비교했을 때 일치되는 것과 상치되는 것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글 쓰는 작업이 따라나오게 된다.

 

 

태어난 곳과 똑같은 곳에서 자살한 어머니. 가난한 시골 살림에서 여자아이로 태어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은 없었다. …(중략)… 그저 더위와 추위, 축축함과 건조함,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었다.”

 

 

***

빨랫줄 위에 매달리는 물방울,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 앞으로 펄쩍 뛰어드는 두꺼비들,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람들이 ‘난 나 자신을 느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할아버지께 무엇인가 배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할아버지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 몇 번으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가출, 돈을 벌며 잠깐 누린 청춘의 맛, 전쟁, 유부남과의 첫사랑, 임신, 아이 때문에 한 다른 남자와의 결혼, 남편의 외도, 주정뱅이가 된 남편, 손찌검, 임신, 낙태,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고 싶은 공허한 일상, 국경 탈출, 임신, 고향에서 똑같은 반복 …… “그녀는 성(性)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일상의 사소함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타입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전쟁 전의 타입에서 전쟁 후의 타입으로, 시골 처녀에서 도시 여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적절한 말로 표현하자면 크고, 날씬하고, 검은 머리를 한 도시 여자로 말이다.

그런 타입으로 묘사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내력에서 해방된 듯 느꼈다. 왜냐하면 이제 에로틱하게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낯선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코 시민적으로 평온해질 가능성이 없었던 정서 생활은 겉으로는 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모임의 시민적 체계를 서툴게 흉내 냄으로써 안정되어 갔다. 그 체계 속에선 ‘이러저러한 사람은 내 타입이지만 난 그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난 그의 타입이지만 그는 나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우린 서로 잘 맞아’라거나 ‘우린 서로 쳐다보는 것도 견딜 수 없어’라는 말들이나 상투적인 말들이 구속력 있는 규칙들로 간주되었기에 어떤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약간 주의를 기울이는 반응조차 모두 이 규칙들에서 벗어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사실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

(중략)

그녀는 언제나 계산을 틀리게 했다. 집에서는 소시민적인 해결책조차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단칸방에다 날마다 하는 빵 걱정,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제스처와 억지 표정, 그리고 의사소통이라곤 김빠진 성행위밖에 하지 않는 동거인과의 생활 여건들이 시민적이랄 수 있기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삶에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밖에서는 승리자 타입, 안에서는 약한 반쪽, 영원한 패배자였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중략)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

사사로운 걱정,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갈증, 무언가 하고 싶은 욕망, 단 한 번뿐이라는 느낌, 먼 곳에 대한 동경, 성적 충동 등등 머릿속의 생각들이 어느 것 할 것 없이 역할이 뒤바뀐 듯한 전도된 세계와 함께 이런 의식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렸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노래를 같이 하자거나 춤을 추자고 요청할 때나 ‘자유 의지로’ 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내력과 감정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은 말[馬]과 같은 가축들에 관해 말할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숫기가 없어졌고 거의 말을 하지 않거나 약간 정신이 돌아버려 집 안 여기저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기분 좋은 가난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완성된 궁핍”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다른 삶은 오지 않았다. ‘소유권이란 구체화된 자유’라는 말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 자유의지는 비참함을 알려주는 공소장 같다. 참아낼 수는 있지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가난 속에서 취미도, 오락도, 활동적인 공공생활도 없이 닥쳐오는 삶을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병이 들자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 나 자신과 얘길 한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라고 한 말은 한트케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 사실 이건 우리 모두의 속내 아닌가. 유언장에서 자살 선택에 대해 ‘행복하다’고 남겼지만 그도 우리도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자살을 선택하는 상황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가능한 한 적합한 문장들로 기억에 접근해 가려고 노력함으로써 공포의 상태에서 작은 쾌감을 얻어내고, 공포의 쾌감에서 회상의 쾌감을 완성해 내는 것”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부모에 대해 이런 글을 써보고 싶을 것이다. 이 작품을 에세이로 보든 소설로 보든 한트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고 끝맺음이었다.

 

 

 


 ▒  아이 이야기 ▒

 

*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소망이 있었다. 아이, 운명의 여인,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직업. 이 세 가지가 그에게 다 왔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으로 모이지 않았다. 작가도 되었고 아이도 생겼지만 아내와의 불화는 그 때문에 더욱 커졌다. 아내와 별거 후 아이와 살게 된 그는 틀에 짜인 습관들로 가득했던 어머니의 시간을 조금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물건들은 무기처럼 비스듬하게, 악의를 품고 비현실적으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는 무기 창고 속에 무기가 쟁여져 있는 것처럼 공기 한 점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묶여 있는 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 속에서 어디를 보나 적대적인 무질서만이 있었다. 훨씬 나중 에야 비로소 그는 아이가 어질러놓은 잡동사니를 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심지어는 형편없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무질서 속의 질서를 깨닫고선 그 속에서 아이와 똑같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배웠다. 단지 자유로운 순간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만이 필요했다.

(중략)

집에 묶여 있으면서도 거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색깔과 형태에 대한 모든 감각과 사물 간의 거리와 등급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고, 시야는 흐려지고 불유쾌한 여명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여러 물건과 섞여 있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물건처럼 돌아다녔다. 그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이란 상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광기와 구별되지 않는 야만이었다. 활기를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그의 의지를 더욱 빼앗아갔다. 


대작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아이 양육 사이에서 그는 시종일관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위해 아이를 버린 아내를 그는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아이는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였다. 처음에 그는 아이의 감독자나 상급 명령자처럼 대했지만 아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뢰감을 배웠고, 그가 비난해왔던 위대한 말들도 아이와 함께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내, 아이와 함께 피크닉도 가지만 그들은 끝내 ‘가족’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도, 그도, 그의 아이도 자신만의 소망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에 의해 비밀처럼 덮인다. 우리가 가진 소망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소망은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삶이 삶을 키우듯 소망이 소망을 키운다. 소망 없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이 끝났다고 매듭짓는 순간이 불행 아닐지. 소망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하리라. 그가 아이를 보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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