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산책을 하다 발아래 꽃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꽃을 피해 발을 내디디는 게 보통이다. 그때 걸음을 멈추고 ‘흠, 고민이군. 이 꽃을 밟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라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웃기는 사람이다. 별생각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정상적인 것 아닌가?
일상생활에서 깊이 생각해야만 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까? 있다. 아니 이 시대에는 너무 많다. 우리가 꽃을 밟느냐 마냐, 혹은 앞사람을 밀치냐 마냐를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은 산책할 때가 아니라 급히 달려가야 할 때다. 〈화차〉의 여주인공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자신과 처지가 같은 이를 죽이고 그 사람 행세를 했다. 이때 그녀가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대단한 성찰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나와 같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악을 생각하다>
열다섯이 지나서도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종교인, 예술가, 지식인이었다. 종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강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답을 구하는 편이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좀 별나서 남을 괴롭히다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굳이 어렵게 답을 찾았는데, 이제 이들에게조차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소위 `쿨`하지 않은 것이 돼버렸다.
ㅡ<삶의 의미? 지금 삶의 의미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