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적 거짓의 이면 - 『인간 본성의 법칙』 & 《립반윙클의 신부》
"이런 지식은 다소 유행이 지났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수준이 높고, 기술적으로 발전했고, 진보적이며, 계몽된 상태니까 말이다. 원시적 뿌리를 벗어난 지 한참이고, 심지어 인간 본성을 다시
쓰는 중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가 지금처럼 인간 본성의 노예가 되었던 적도 없다. 인간 본성의
잠재적 파괴력이 지금보다 더 컸던 때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하며 위험한 불장난에 빠져 있다.
소셜 미디어만 봐도 그렇다. 감정이 서로에게 전염될 일은 오히려 늘었다.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바이럴 효과(viral effect, 소문 등이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 - 옮긴이)를 따라 새로운 이슈가 끊임없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조작에 능한 지도자들이 우리를 이용해먹고 뜻대로 휘두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가상 세계에서는 공격성을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뒷일을 생각지 않고 우리의 어두운 이면을 펼쳐놓기가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과 순식간에 소통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시기심을 느끼고, 주목을 받아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성향 역시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족 본능을 보면
이제는 그 성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완벽한 도구가 생긴 셈이다. 나와 동일시할 집단을 찾아내고, 서로의 메아리만 주고받는 공간에서 내
부족의 의견만 계속 증폭시키고, 누가 되었든 외부인은 철저하게 악마로 몰아서 떼로 몰려가 겁을 준다. 인간 본성의 원시적 측면 때문에 아수라장이
벌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어느 개인이나 기관, 기술적 발명보다 인간 본성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결국에 가면 인간 본성과 그 원시적 뿌리를 반영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장기판 위의 말처럼 우리를 가지고 논다. 인간
본성의 법칙을 무시한다면 그 사람의 손해일 뿐이다. 인간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패턴 속에 빠져 계속해서 혼란과
무력감을 느끼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나나미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와지 슌지 《립반윙클의 신부》 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나나미는 내내 타인에게 휘둘렸다. sns로 인터넷 쇼핑을 하듯 남자친구를 고르고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거짓의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부터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녀의 성격 문제도 크다. 학생들이 자신을 놀리는 걸 파악하지도 막지도 능청스레 넘기지도 못했다. 그녀의 소극성
때문에 교사 직업에서 결국 퇴출당한다. 그리고 결혼으로 도피한다. 자신이 정의롭다 생각하는 자들은 나나미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고 말하겠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극 속의 나나미는 스스로를 지킬 정도로 이성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함수가 사회에서
어떤 쓰임이 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하다는 과외 학생에게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데 안도할 정도의 미약한 자존감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립반윙클도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타인의 성욕을 채워주는 AV 배우 역할로 자존감을 채웠다. 행복에 돈을 지불하는 게 더
편하다고 말했던 립반윙클은 자신의 충동과 비이성에 휘둘린 채 삶을 마감했다. 세상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말을 바꿔,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행복은
없다. 세상은 우리 심리의 반영인 셈이다. 나나미와 립반윙클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세울 생각도 용기도 없이 타인의 틀에서 적당히 살아왔다.
아무로는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았고 그들은 손쉽게 그의 먹잇감이 된다. 그는 나나미에게 은근히 경고도 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은 1시간 만에 빠져들걸요. 자신감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
저한테 빠진다면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빠져드는 거니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거나 마음이 안 채워진다거나 그런 느낌을 조심해야
합니다."
집안에서 낯선 귀걸이를 발견한 나나미는 자신의 의심을 더 신뢰했다(확신 & 확증
편향). 나나미는 남편에게 사실 확인을 하기보다 어떤 사람인지 더 모를 아무로를 더 신뢰해 남편의 외도 조사를 의뢰했다(겉모습 편향). 그는
나나미를 유혹할 수도 있었고 죽일 수도 있었다(실제로 죽이려고도 했고). 적당하게 이용했고 그에게 그녀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 나나미에게
급여를 정확히 전해주고 그녀의 새 집에 가구를 선물한 걸로 그가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일 거라 생각한다면 우린 스스로의 순진함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나나미는 아무로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어떤 진실도 몰랐다. 립반윙클과 나눈 투명 결혼반지를 생각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쓰다듬는 나나미의 모습은 불안스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나미는 아무로의 제안에 어디론가 또 보내질 수 있다. 많은 관객이 립반윙클의
생의 마지막 친구가 되어준 나나미의 순수와 낭만성에 취했을 테지만 이와이 슌지는 잘 속는 나나미의 답답할 정도의 수동성, 나약함, 무능력을
끝끝내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실수와 교훈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다. 아무로가 알려주는 정보만 믿고 남편과 남편의 집안 탓만 하며 자기 연민만
했다. 이혼 후에도 타인이 원하는 역할을 반복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헤매며 그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간다. 그녀 결혼식에 온 가짜 하객들에
끼어 그녀도 가짜 하객 행세를 했듯 제목처럼 그녀는 죽은 자의 신부로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우리에겐 디폴트 값이 많은데 죽음과 비이성도 그에 해당한다. 순수는?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듯이 순수와 그 대립쌍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그게 적절히 발휘되고 있는 걸까. 니체가 지적한 우월한 입장에서 가지는 '연민과
동정'처럼 우리는 '순수'도 그렇게 치장하고 있진 않은지 고찰해 볼 일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는 교훈을 배워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그다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의 자기 성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럴 때 자연스러운 반응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
혹은 순간적 오판을 탓하는 것이다. 탓하기 편향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들여다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수를 저지르면 내가 느끼는 이 우월감이 정당한가라는 의심이 생기고, 자존심에 금이 간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한 일을 반추하는 척 시늉만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쾌락 원칙이 다시 부상하고 실수 중에서 내 탓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부분마저 잊어버린다. 그러면 또다시 욕망과 감정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수박 겉핥기식 반성 과정을 거쳐, 잊어버리고, 죽는 날까지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면 세상에 실수는 거의 없을 테고, 누구나 승승장구할 것이다."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 자신과 문학 중에 택한 샐린저 - 《호밀밭의 반항아》 &
『호밀밭의 파수꾼』
J. D. Salinger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 유명세 때문에 내게 더 별점을
깎인다. 이 정도가 영미문학의 대표작? 사람들이 호들갑 떨며 순위권에 넣는 책은 내게 우선순위가 아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야겠기에
읽기도 한다. 때론 수긍되고 때론 그냥 그렇다. 이 소설의 인기는 사춘기라는 공감대, 전후 비트 세대를 알리는 선두, 잭 케루악, 찰스
부코스키, 커트 보니것 등의 소설이 그랬듯 주인공의 삐딱함과 거침없음 그런 다양한 것들이 인기에 일조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나왔을 때 유명세는 완성된다.
번역 문제보다 문장 자체가 정말 내 취향 아니다. 사춘기 소년의 심리를 재현했다고 해도
읽는 내내 쳐내야 할 문장들이 계속 보여서 정말 데뷔작 답군, 나는 툴툴대며 읽고 있다.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2017)를 보며 샐린저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작가
사생활에 관심을 안 두는 내 습관이 작품 파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 살다 보니 이래저래 알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으나 잘 안 풀리던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처럼 여러 학교를 쫓겨나다 컬럼비아 대로 가서 글쓰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다. 문학잡지 편집자이기도 한 위트 버넷 교수는 그에게 창작의 포인트를 잡아주며 격려와 채찍을 아끼지 않는다. 작가 목소리가 앞에 나오기보다 스토리에 녹아들게 하라는 조언은 백 번 지당하셨지. 버넷 교수는 샐린저에게 묻는다. 아무 대가 없이 혹은 모든 걸 버리더라도 평생 글쓰기에 매달릴 자신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넌 작가가 될 운명은 아니라고. 그때 샐린저는 도망쳤었다. 작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던 버넷은 샐린저의 글 속 목소리를 칭찬하며 '홀든 콜필드' 캐릭터로 장편 쓰기를 권한다.
버넷이 칭찬한 샐린저의 글 속 목소리는 '분노' 였을 것이다.
단편 몇 편으로 작가계에 들어선 샐린저는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유나 오닐과
사귀는 기회도 잡게 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샐린저가 참전한 사이 허영심 많은 유나 오닐은 늙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한다. 18세
여성과의 결혼이라니 잘 알려진 찰리 채플린의 성적 취향을 여기서 또 확인. 샐린저의 이후 삶을 보면 유나 오닐이 그와 결혼을 안 한 건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샐린저는 여러 차례 결혼하고 이혼하게 되는데 그게 다 그의 글쓰기 종신 결혼 때문.
전쟁 중에도 샐린저는 내내 홀든 콜필드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펜이 없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 전쟁이 끝났어도 샐린저는 외상 후 장애가 심해 방황하게 되고 명상을 접하면서 글쓰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단편소설로 인지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샐린저가 어렵사리 쓴 첫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판사마다 출판하길 꺼린다. 독특한 캐릭터인 홀든 콜필드에게 공감이 잘 안된다는
게 큰 이유였다. 얘, 혹시 미친 건가요? 소리를 들으며;;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가 전쟁에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다고 말하며 어떤 수정도,
타협도 거부한다. 책이 출판되자마자 대중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샐린저는 광적인 팬과 유명세에서 멀어지고자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다. 출판에 목매는
상업 작가가 아니라 글쓰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창작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즈음 약물, 알코올 중독과 기행으로 자살이나
요절한 작가가 많았는데, 뉴에이지, 명상 문화를 받아들인 샐린저는 구도와 글쓰기의 조합으로 건실히 살아남았다고 해야 할까. 모르긴 몰라도
『호밀밭의 파수꾼』만 읽은 사람이라면 샐린저가 요절했을 거라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63년 이후부터 91세로 사망하기까지 어떤 책도
출판하지 않았다.
샐린저의 은둔적 삶 때문에 더 세간의 관심을 받았겠지만, 이런 삶을 살게 된 사람의 첫
장편이 『호밀밭의 파수꾼』인 건 참 의외다. 전쟁을 겪은 뒤에 30대에 쓴 소설이 이렇다는 것도.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학교를 쫓겨난 사춘기
소년의 도시 방황.
이후 작품을 더 읽어봐야 할까. 이 책의 어떤 점이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추측하고 발견하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샐린저는 내게 매력을 주는 작가가 아니란 걸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으며 알게
됐는데-_-)...
● 진실과 기만 사이에서 - 《체르노빌》
《체르노빌》은 NBO에서 제작한 역사 드라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경위와 수습 과정을 에피소드 5편에 촘촘히 담았다.
"우리의 기밀과 거짓말이 그 원인이에요. 사실상 그 두 가지가 우리를 정의하죠. 진실이 맘에 안 들면 우린 거짓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러다 진실이 존재한단 사실조차 잊어버리죠.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입니다. 머잖아 그 빚을 청산해야 하죠. RBMK 노심이 폭발한 게 그 대가였습니다."
ㅡ 핵물리학자이자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발레리 레가소프의 대사, <에피소드 5>
결함을 은폐한 채 가동한 RBMK 원자로의 작동 과정과 폭발 원인에 대해 저 문장이 모든 걸 함축한다. 드라마처럼 그가 재판에서 저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저 문장은 매우 진실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알면서도 거짓을 일삼는 인간들이 만든 인재였다. 그리고 그 모든 잘못을 대신 겪고 바로잡으려 했던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이 드라마에서는 돋보인다. 피폭 상태였던 발레리 레가소프는 진실 규명과 사고 수습을 위해 노력하다 사건 발생 2년 뒤 자살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부소장이자 수석 엔지니어였던 아나톨리 다틀료프는 사고 발생의 가장 큰 책임이 있었는데 재판에서 겨우 10년 형을 받았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와 이후 대처를 보면 인간에겐 치러야 할 대가가 아직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모두가 치러야 할 문제다.
프리피야트 생존자 증언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많이 참고되었다고 한다.
● 사진으로만 가능한 것 -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선택받은 사람,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초월한, 자기보다 우월한 어떤 기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내적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그 기준의 도움을 만끽한다…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별할 때 우리는 전자가 자신을 닦달하고 후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지금 상태와 자기 자신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뛰어난 사람은… 사실상 노예 상태로 산다. 무언가 초월적인 것에 인생을 바치지 않는 이상, 삶이 무미건조해진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탄압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쩌다 그런 필요성이 사라질 경우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스스로를 강제할 수 있는 더 어렵고 시급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원칙을 따르는 삶, 고귀한 삶이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ㅡ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한 사람이 평생 다 전하지 못할 이야기를 사진에 담은 비비안 마이어. 그래서 그녀에겐 인화하지 못한 필름이 그렇게나 많았는지도 모른다. 미처 따라잡기도 전에 또 다른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들이닥친다. 창작을 해본 사람은 이 진퇴양난의 상황을 잘 알 것이다. 그 예술 행위에 알맹이가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자기 시선과 색깔을 담는 자에게 우리는 예술가라는 호칭을 붙인다. 그러나 마이어는 평생 자신의 작업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그저 취미생활이라 했다. 요즘의 '예술', '예술가'의 의미는 참 남루해졌다. 대중의 눈에 띄어 유명해지길 바라고 명예와 부까지 얻는 '직업' 같이 여겨질 때가 많다. '예술'이 '구도'와 비슷했다는 건 잊히고 있다. 타인의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자신의 작업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파악할 척도가 오직 자신뿐이라면 내가 흔들릴 때 그것들은 다 무가 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진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의심하지 않았다. 작업에 관해서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
사진에는 그 고집이 시선에서 느껴진다. 상처, 비밀, 위험, 경멸, 모욕 등 피사체가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셔터를 누른 순간이 사진에 각인되어 있다. 사진은 여러 상황을 감당하면서 순식간에 잡아내야 해서 고도의 소양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감수 없이 편안히 찍은 자신의 사진을 예술적이라고 흡족해하는 이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마이어의 사진에는 열정적인 탐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많이 알려진 사진보다 사진집에는 더 좋은 사진이 많았다. 비비안 마이어 다큐를 봤을 때와 다른 생각의 시간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