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기술 - 권력보다 강력한 은밀하고 우아한 힘
로버트 그린 지음, 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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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유혹자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역사적 곡절이 있다. 오랜 세월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수단은 폭력과 힘이었으므로 정치, 사회, 가정에서까지 여성은 남성과 경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성의 최대 약점이 성욕이라는 것을 파악한 여성에게 유혹은 권력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남성 유혹자를 상징하는 ‘카사노바’에 비해 여성 유혹자 ‘팜 파탈’이 더 치명적으로 여겨진다.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간주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물리적 영역과 심리적 영역 모두 압도하는 그 파괴력에 더 주목해야 한다. 뛰어난 유혹자는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목표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꿰뚫고 있기에 통제자로서의 능력도 탁월하다. 그래서 유혹의 기술은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다. 오비디우스와 같은 로마 시인이나 중세 서정 시인들 경우가 아니면 유혹의 기술은 남성들에게 사소한 것이었다. 17세기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남성들과의 섹스를 거절하는 여성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혹의 기술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정치가들이 대중들을 휘어잡기 위해 유혹의 방법들을 동원했다. 유혹의 기술이 카리스마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현실보다 환상과 놀이를 더 추구하고 물리적 힘보다 심리적 힘이 크게 작용하는 요즘 유혹의 기술은 더 부각된다.

 

 

그린은 아홉 가지 유형으로 유혹자를 분류한다. ①성적 에너지가 풍부하고 사용 방법에 정통해 상대에게 깊은 해방과 자유를 느끼게 하는 ‘세이렌(Siren)’의 대표적 인물은 클레오파트라, 메릴린 먼로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처럼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비참한 몰락을 피할 수 있다. ② 지칠 줄 모르고 유혹하는 ‘레이크(Rake)’는 ‘세이렌’과 비슷한 남성 유혹자로 돈 후안, 리슐리외 공작, 파블로 피카소, 배우 에롤 플린,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에 해당한다. 사회 규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채워줌으로써 여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지만 동성 남성이나 도덕주의자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③인내심과 세밀한 관찰력,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디얼 러버(Ideal Lover)’는 상대의 낭만, 모험, 환상을 채워주는 존재로, 대표적 인물은 카사노바, 퐁파두르 부인, 존 F. 케네디이다. ④자신을 연출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는 ‘댄디(Dandy)’의 대표적 인물은 살로메다.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동시에 초연함을 유지해 많은 남성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뻔뻔스러움에도 절도가 있어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 ? 어린아이처럼 자발적이고 열린 자세를 지닌 ‘내추럴(Natural)’은 천진난만, 개구쟁이, 신동, 개방적인 특성으로 상대를 유혹한다. 찰리 채플린이 그런 유형인데, 성인과 어린아이의 매력이 동시에 묻어나는 삶을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천진난만한 모습을 버리고 자유로운 태도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 충족적(나르시시즘)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차가운 매력을 발산하는 ‘코케트(Coquette)’ 유형에는 나폴레옹의 배우자 조제핀, 앤디 워홀, 프로이트가 해당되는데, 상대의 증오심을 부추기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능숙하고 상대방에 맞추는데 능란한 ‘차머(Charmer)’에는 빅토리아 여왕을 사로잡은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 예카테린 여제 등이 있다. 교활한 아첨꾼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인맥을 넓혀 입지를 굳히고 웅크릴 때와 행동할 때를 구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탁월한 존재로 비치는 ‘카리스마(Charismatic)’ 유형은 기본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열정, 신비감, 웅변술, 무대기질, 자유로움, 대중이 열광하게끔 만드는 의존성, 모험심,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 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에서는 여러 카리스마 유형들이 있었다. 예언자적 카리스마(잔 다르크), 동물적 카리스마(라스푸틴), 악마적 카리스마(엘비스 프레슬리), 구원자형 카리스마(레닌), 정신적 지도자형 카리스마(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성녀형 카리스마(에바 페론), 해방자형 카리스마(멜컴 엑스), 뛰어난 연기자형 카리스마(드골 대통령). 카리스마 특성은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이 피로를 느끼게 되므로 특성을 통제하며 관대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적을 만들기도 쉬운 특성이라 적을 무자비하게 제압할 수 있는 잔인함도 갖추어야 한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타(Star)’는 페티시즘적 매력을 발산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감정과 불멸의 욕구를 자극하는 신화적 스타 존 F. 케네디 등이 해당되는데, 아버지가 영화제작자이기도 했지만 배우들과 교제하며 스타들의 성공 비결과 매력을 모방한 케네디는 유혹의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셈이다. 이 유형은 인간적 약점을 많이 노출해서는 안 되고 유희를 즐기듯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휩쓸리지 않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아홉 가지 유형에 겹치는 인물도 있듯이 누구나 이런 속성을 조금씩 지니고 있으므로 그린은 자신의 주된 본성을 파악하고 강점으로 발전시킬 것을 강조한다.

이와 대비되는 反유혹자의 특성은 조급함, 아첨, 도덕주의, 구두쇠, 소심함, 수다쟁이, 과민함, 속물성 등이 있다. 유혹자가 되고 싶다면 이런 특성을 죽이고, 이런 유형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다. 또한 자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유혹자의 희생양이 되는 유형도 18가지 나온다. 퇴물이 된 변형된 레이크 혹은 세이렌, 좌절한 몽상가, 응석받이, 내숭쟁이, 좌절한 스타, 세상 물정에 어두운 풋내기, 정복자, 색다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 삶을 비극적인 드라마로 엮어가고 싶어 하는 비극의 주인공, 지나치게 분석하고 비평하려는 교수, 칭찬에 익숙한 미인, 성장을 거부하는 철부지, 구원자가 되려는 사람, 방탕아, 우상 숭배자, 매사에 예민한 감각주의자, 고독한 지도자, 양성애자 등.

 

짧은 인생을 낭비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유혹자는 자신에게 없는 특성을 지닌 대상을 선정한다.” 유혹의 대상을 선정하면 상대가 안심할 수 있는=을 만큼 접근해 관계를 차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상대가 헷갈리도록 애매한 태도를 취해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게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행동하며,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부각시키면서 저 사람이라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내면의 결핍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상대가 마치 자기 의견인 것처럼 믿게끔 생각을 심는 ‘암시’적 화법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방어본능을 허물고 유혹자에게 끌려오도록 상대방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한다. 이런 거울 효과는 유혹의 오기 단계에서만 유용하다. 릴케는 이 단계에서 실패해 상대에게 의존적인 모습으로 비쳐 살로메에게 버림받았다. 상대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호기심은 불안을 동반하므로 상대가 불안을 느끼게 되면 조종하기가 쉬워진다. 직접적 표현은 금물이면 사소한 부분(미묘한 몸짓, 무심코 하는 행동, 표정이나 태도)을 통해 상대에게 끝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표시를 줘야 한다. 그런 다음 태도나 행동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상대가 환상을 키워나가도록 한다. 때론 약점을 드러내어 연민을 끌어내야 한다. 심리적, 육체적 고립 속에서 유혹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단계 설명은 배가 끊겨 돌아갈 수 없는 둘만의 여행, “오빠 믿지?” 등의 숱한 일화가 나오게 된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알리 칸은 미모의 여배우 리타 헤이워스를 이 기술로 통해 얻었다. 상대가 넘어왔다고 생각되면 가속화해야 한다. 기사도 같은 입증 행동, 상대의 보호본능 자극, 유대감을 키울 수 있는 둘만의 은밀한 일 공모, 정신적이고 고상한 것을 나눈다는 유대의식 형성, 에로틱한 감정을 고조할 수 있는 적절한 공포 조장 등이다. 유혹에서 최후의 일격은 사태 역전이다. 희생자 자신이 유혹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줘 상대가 더 적극적으로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무심한 듯한 태도로 상대 스스로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야 한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상대를 무장 해제해야 한다. 유혹 뒤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나면 권태, 불신, 실망과 같은 정반대 감정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별을 하려면 짧고 신속하게, 관계를 지속하려면 부재 전략으로 상대를 애타게 해 마음을 뒤흔든다. 


 

「유혹은 궁극적으로 주도권 싸움이다. 유혹에 항복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주도권을 내준다. 그들이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신이 어떤 책략을 사용하든 그들은 모두 용서한다. 당신이 그들에게 세상에서 아주 희귀한 상품인 쾌락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싸움에 능통하다면 무수한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 군중이나 유권자, 나아가 국가 전체를 유혹할 때도 방법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유혹할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점과 긴장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성을 유혹할 때 사람들은 일부러 불안과 고통을 야기한다. 대중을 상대로 한 유혹은 이보다 좀 더 부드러울 뿐이다.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쾌락을 제공하면 그들은 넘어오게 되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p598)

 

 

이 책을 쓴 뒤 그린이 『전쟁의 기술』을 쓴 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유혹의 기술은 이제 더 큰 대상을 공략하고 있다. 부드러운 판매 전략(광고보다 뉴스 활용, 감정에 호소, 시각적 장치 이용, 상대방에게 친근한 언어 사용, 다른 이에게도 인기가 있다는 연쇄 반응 유도, 그들이 동일시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 제공)은 수백만 명을 유혹한다. 유혹의 힘은 사람들을 BTS처럼 성공적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게 만들고, 의식 있는 새로운 운동의 선봉장이 되고 싶게끔 만든다.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인생 드라마도 매일 탄생하고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삽시간에 끈다. 이 세계에서 유혹하지도 받지도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그런 욕망을 투사하고 다시 현실로 끌어온다. 이 유혹의 기술을 찬찬히 훑어보며 마음이 참 복잡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유혹의 세계는 진실된 사랑뿐이라고 나는 자신할 수 없으니. 이 유혹의 늪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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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12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그린의 3부작이 이렇게 연결되는군요. AgalmA님 덕분에 좋은 저자 소개받아 갑니다.^^:)

AgalmA 2019-08-14 03:44   좋아요 1 | URL
그린이 주로 자기계발서로 분류돼 제 주제도 모르고ㅎ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는데요;; 읽어볼만 한 가치는 있는 책들이었어요. 그가 가진 세계관에 호감은 들지 않았지만(글이 너무 냉정, 인간미 없엉ㅜ,ㅜ;;) 사람 심리에 꽤나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건 인정해야겠더군요. 뒷마무리 하는 뒷심이 좀 부족하고 중복되는 걸 좀 더 타이트하게 쓴다면 아주 강력한 글쟁이이실 거 같더라는(여전히 내 주제도 모르고 망발ㅎㅎ;;)

겨울호랑이 2019-08-13 09:43   좋아요 1 | URL
AglmA님과 같은 독서가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재한다면, 아마 알라딘 서재에서 하루에 올라올 글은 몇 편 안 될 것입니다.^^:)

2019-08-1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8-13 05:14   좋아요 0 | URL
두 책 다 번역이 아주 깔끔했습니다. 등장인물들과 인용이 외국인이어서 그렇지 한국인이 쓴 걸 본 것처럼 읽기 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