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알쓸신잡> 방송에서 김영하가 각 나라의 묘지 산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 작가가 여행기를 내면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겠구나 했다. 정작 묘지 얘기는 하나도 없었지만ㅎ 그가 작가이자 여행자가 된 동기, 삶과 글쓰기와 타자가 밀접히 얽힌 이야기들이 김영하 판 오뒷세이아로 펼쳐져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여행을 통해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발견”(p27)되고, 우리는 여행기가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p19)이라 여긴다. 작가에게 치밀한 계획과 순조로운 여행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추방자가 되어 떠난 지 하루 만에 되돌아오거나 괴상한 메뉴를 시켜 대실패를 겪으면 글로 쓸 수 있으므로 김영하는 은근히 그런 모험의 빌미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공식적인 이유인 ‘외면적 목표’도 있지만 마음속에는 숨겨진 ‘내면적 목표’도 있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그것을 목도한다. 또한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ㅡ프로그램(노아 크루먼, p58)’을 타인에게서 내게서도 발견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전근으로 잦은 이사와 전학을 다녔던 김영하는 방랑의 습성을 일찍 가지게 되었다. 학생운동 시절 회유책으로 주어진 중국으로의 해외 첫 여행, 그 여정에서의 인연과 이후 대학원을 무사히 진학하게 되고 소설가가 된 과정까지 여행은 그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김영하는 자신의 여행벽이 어린 시절 원경험들이 쌓여 자기 안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으로 발현된 것이며,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삶의 생생한 안정감”(p60)이라고 말한다.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고”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p81)는 점에서 삶과 여행과 글쓰기는 유사하다. 

 

인류는 모두 여행자의 피를 가지고 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자 문화”(p92)이고, VR이나 AR 같은 가상현실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세계 여행 인구의 증가 폭증만 봐도 “호모 비아토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정의한 ‘여행하는 인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영하가 출연했던 <알쓸신잡>은 우리가 늘 갈망하는 여행에 인문학적 소스를 버무린 프로그램이었다. <알쓸신잡>은 tv를 통해 대리 만족하는 ‘비여행’이 아니라 믿을 만한 정보원을 시켜 여행을 대신하게 하는 ‘탈여행’이었다. 김영하는 이 프로그램 제작 과정이 “수십 명이 프로그램에 관여하지만 이 여행의 전부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p104) 없는 카프카적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한 회분이 완성될 때마다 프로그램 제작자와 출연진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은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고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p114) 정신적 과정을 함께 겪었다. 방송이 끝나면 시청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리뷰로 정보도 나누고 방송 영향으로 여행 계획을 짜기도 하면서 시너지는 더욱 컸다. 이 과정을 김영하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 p117)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가 아니라 섬바디로 주목받고 싶은 갈망은 여행자의 욕망 중 하나이다.

 

“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계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실뱅 테송은 『여행의 기쁨』에서 괴테를 인용하면서 '여행을 할 때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낚아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다'라고 덧붙인다.”(노바디의 여행」, p155)

 

일상에서 결핍된 것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과 관련해 김영하는 그런 메타포가 담긴 이야기도 소개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 경우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아 사람들에게 배척받게 된 사나이가 그림자에 연연하지 않고 여행자/탐험가/방랑자로 살아가기로 한 결말, 『오뒷세이아』의 오디세우스가 신들의 저주로 10년간의 고생스러운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키클롭스에게 허영과 자만을 과시하다가 자초한 여정은 여행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김영하가 말한 이 이야기들의 초점은 환대, 인정과 신뢰가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가치이고, 여행이야말로 이 “환대의 순환”(p147)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 내가 받았던 친절과 환대는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베푸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p180) 삶도 생과 사 사이의 긴 여행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끼고, 안정 없는 생활은 유랑처럼 느껴진다. 오래 전에 우리 집에 초대된 한 지인이 내 집을 보고 곧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새 둥지 같다고 했는데, 요즘 집을 가득 채운 책을 보면 그런 소리는 못하리라. 김영하 작가처럼 나는 늘 안주할 곳이 있으리라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떠돌이 운명 같지도 않았다. 어디에도 귀환할 집은 없는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김영하 작가와 공유하게 될 줄 몰랐다.

 

“'여행의 이유'를 캐다 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작가의 말, 213)

 

우리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 살아가고 여행을 하고 마무리할 것이다. 경험으로, 이미지로, 글로, 사진으로 무엇으로도 남기면서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여행을 마친 작가는 자신이 창조할 세계로 또 여행으로 떠날 테고, 조금 달라진 우리는 재차 살아갈 힘을 얻거나 다음 여행을 계획할 것이다. 우리는 여행에서의 경험이 아무리 사소해도 특별하고, 기대에 어긋난 것조차 여행의 요소이며, 일상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친절과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 속으로 평안함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온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철학자 알폰고 링기스, p143) 

 

온갖 기억과 고통과 할 일로 가득한 집을 떠나 환경을 바꾸고 다른 이와 신뢰를 나누며 기쁨을 얻는 상황에 나를 둔다는 것은 아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근사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의 절실함이 우리를 꿈꾸게 하고 우리를 영영 바꾼다. 생활 속에서 멀찍이 동경할 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겪고 생각을 넓혀갈 때 여행에 제대로 도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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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4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여행이 설레임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여행 전후로 짐싸는 것과 정리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닥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저는 아무래도 인류보다는 나롯가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ㅋ

AgalmA 2019-05-11 15:15   좋아요 1 | URL
님 마음 충분히 공감합니다. 여행 다녀오면 이 고생을 내가 왜? 항상 그 생각을 하니까요.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겨울호랑이님은 저보다 늘 현명한 고양이과ㅋ👍

겨울호랑이 2019-05-11 15:17   좋아요 1 | URL
ㅋ 아니에요. 여행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떠나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떠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결혼 전에는 혼자서 새벽에 캔커피 사서 해돋이를 보고 막히기전 돌아온다든지 하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가족이 함께 있으니 맘대로 여행하기가 참 어렵습니다..ㅜㅜ

AgalmA 2019-05-11 15:27   좋아요 1 | URL
요즘은 너무 예약문화라 계획없이 다니기가 힘들어졌죠. 기본적인 차편부터 숙소를 정하려면 일정 정리도 필요하니 그것부터 스트레스ㅜㅜ; 이번 전주영화제도 피크일 때 가서 적당한 숙소잡는 게 쉽지 않았어요. 전주는 자주 가서 그나마 좀 익숙한 편이지만 생소한 환경에 긴장해서 돌아다니는 여행은 매일이 녹초죠😭... 그래도 돌아오면 리프레시가 되는 게 있어서 가긴 갑니다만 제게 여행은 양가적 갈등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더라도 혼자 여행의 자유는 누리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