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그의 기호 이론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나는 그를 ‘어머니’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그가 ‘사랑과 죽음’을 논할 때 ‘어머니’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처럼 그의 글 여기저기에 떠돈다. 그의 후기 저작에 해당하는 『애도 일기』는 1977년 10월 25일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10월 26일부터 1979년 9월 15일까지 쓴 일기다. 1980년 처음 출간된 『밝은 방 La Chambre Claire(=camera lucida)』도 같은 시기에 쓴 사진에 관한 에세이다. 이 책에서도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온실 사진>은 2부 전체를 할애할 만큼 중요한 오브제이자 푼크툼이다.
예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머니’에 집중해 읽었는데 이번 재독에서는 좀 다르게 살펴볼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명제인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사진 비평에 도입한다면 바로 이렇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구경꾼으로서, ‘감정’에 의해서만 사진에 흥미를 느꼈다. 사진에 질문(주제)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의 상처로서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나는 눈으로 보고 느낀다. 그러므로 구별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생각한다.”(『카메라 루시다』, p27, ※별도 표기 없으면 모두 이 책에서 인용)
그는 "나 자신이 사진에 관한 ‘앎’의 척도”(p16)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진은 분류할 수 없다.
“사실상 사진을 분류하는 방식은 경험적이거나(전문가/아마추어), 수사적이거나(풍경/정물/인물/누드), 미학적이지만(사실주의/회화주의), 어떻게 하건 간에 이러한 분류는 대상과는 무관하며, 대상의 본질과도 관계가 없다. 본질이란(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근원이 되는 ‘새로움’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류는 오래된 다른 표현 형태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이란 분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무질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중략)…사진은 철학적으로 변형될 수(말해질 수) 없으며, 완전한 우연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p12~13)
바르트는 사진이 거대한 무질서 속에서 어느 특정한 사건을 표지(標識)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유동하는 기호들’이라고 했다. 사진의 세 가지 실천(만들기, 받아들이기, 바라보기)에서 그는 ‘바라보는 사람’의 역할밖에 할 수 없으므로 사진의 특성(보편성)을 자신의 개인적인 방식에 의거해 살펴보기로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스투디움-푼크툼’이 나온다. 스투디움이 촬영자의 의도와 정보(욕망, 흥미, 취향)가 담긴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문화적인 요소ㅡ약호화, 개념화ㅡ라면, 상처나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키는 라틴어인 푼크툼은 촬영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성, 세부성, 비개념성을 나타낸다.
바르트는 사진에서 ‘푼크툼’적인 것을 집요하게 찾는다. 그의 방법론에 따라 ‘푼크툼’은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도 있다.
“(나는 <온실 사진>을 보여줄 수 없다. 그 사진은 나만을 위해서 존재한다. 독자들에게는 흥미 없는 한 장의 사진,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수많은 표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학문의 명백한 대상이 될 수 없고, 객관성ㅡ이 용어의 실증적인 의미에서ㅡ의 근거를 줄 수 없다. 기껏해야 시대·의상·촬영효과 등 독자의 스투디움에 흥미를 주겠지만, 독자는 거기에서 자신과 관련되는 어떤 대상도 찾지 못할 것이다.)”(p76)
바르트의 푼크툼은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대해 서술할 때 이미 예견한 바 있다.
“사진사가 인위적인 조작을 하고 또 모델의 태도도 계획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러한 사진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그것에 의해 사진의 영상을 골고루 태워냈던 우연과 현재적 순간을 찾고 싶어 하고, 또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가 버린 순간의 평범한 삶 속에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얘기를 하면서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미미한 부분을 찾고 싶어 하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대신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들어선 점에서 그러하다.”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중)
“사진사가 인위적인 조작을 하고 또 모델의 태도도 계획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그러한 사진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그것에 의해 사진의 영상을 골고루 태워냈던 우연과 현재적 순간을 찾고 싶어 하고, 또 그 속에서 이미 흘러가 버린 순간의 평범한 삶 속에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얘기를 하면서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미미한 부분을 찾고 싶어 하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대신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들어선 점에서 그러하다.”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중)
벤야민과 바르트의 차이는 흥미롭다. 두 사람 다 인간의 지각 작용에 의문을 던지는 사진의 재현·폭로적 기능에 주목하지만, 벤야민이 사진의 정치적 가능성(혁명적 사용 가치)에 집중했다면 바르트는 사진에서 미래 지향성을 부인하며(“사진은 부동성으로 말미암아 현전화(現前化)로부터 과거의 정체성을 향해 역류한다”(p91)) 사진의 기호적 특성(대상물과 공존하는 사진)에 집중한 게 변별된다.
“우선 나는 사진의 대상물이 어떤 점에서 다른 표상 체계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를 잘 생각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말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만(비록 간단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했다. 내가 사진적 대상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영상이나 기호가 참조하는, 임의적으로 현실적인 사물이 아니라, 렌즈 앞에 놓인,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사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을,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사물이다. 그림은 현실을 보지 않고서도 현실을 가장할 수 있다. 담론(discours)은 분명히 대상물을 가진 기호들을 결합하지만, 그러나 이 대상물은 '공상'일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대개는 공상이다. 이러한 모방과는 달리, 사진에서 나는 그 사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에는 현실 및 과거라는 두 위치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강제는 사진을 위해서만 존재하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진의 본질 자체, 그 노에마(noème, 현상학에서 사유 작용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역주)로 간주해야 한다. 한 장의 사진에서(아직 영화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고) 내가 의도하는 것은 '예술'이나 '전달 체계'가 아니라, '대상물'이며, 그것이 바로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질서이다.”(p79)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자적인 면모는 여러 분석에서 볼 수 있는데, 그의 문장은 언어유희, 모순적인 역설이 많아서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 (사진에는 프루스트적인 것이 없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시간에 의해, 거리에 의해)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p84)“나 자신이 모든 사진의 지표이며, 바로 그 점에서 사진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를 놀라게 만든다. 그것은 왜 나는 여기에,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명히 그 어떤 예술보다도 사진은 세계를 향해 하나의 즉각적인 현전(現前)을ㅡ하나의 공존을ㅡ제시한다. 그러나 이 현전은 정치적 차원일뿐 아니라(‘영상을 통해 현대의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 형이상학적인 차원이기도 하다.”(p85)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 (사진에는 프루스트적인 것이 없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시간에 의해, 거리에 의해)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p84)
“나 자신이 모든 사진의 지표이며, 바로 그 점에서 사진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를 놀라게 만든다. 그것은 왜 나는 여기에,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명히 그 어떤 예술보다도 사진은 세계를 향해 하나의 즉각적인 현전(現前)을ㅡ하나의 공존을ㅡ제시한다. 그러나 이 현전은 정치적 차원일뿐 아니라(‘영상을 통해 현대의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 형이상학적인 차원이기도 하다.”(p85)
사진은 찍은 뒤에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보는 행위는 소급하는 사유를 거칠 수밖에 없기에 사진이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는 그의 표현은 모순이다. 또한 사진은 기술적 특성상 무수한 감상자를 낳으므로 지표의 준거점이 없고 현전의 진위를 논할 수도 없게 된다. 바르트는 “자신의 확실성을 증명할 수 없음은 언어의 불행”(p87)이라고 말했지만 사진도 예외가 아니다. 발터 벤야민이 파악했듯이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은 기술 복제로 인해 교란 받는다. 바르트의 비평적 태도도 영화관의 관객이 그렇듯 그런 복제 기술에 의해 도출되는 자세다. 감상자가 발견하는 푼크툼이 촬영자의 의도를 다 빗겨 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내가 바르트의 사진 비평을 데카르트 ‘코기토 에르고 숨’에 비유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체를 나로 상정했을 때 빚어지는 혼란이 바르트의 분석에서도 이렇게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가 제시한 푼크툼은 다른 특성도 있다. 형태는 없지만 강도를 지닌 ‘시간’이 그것이며, “노에마(‘그것은-존재-했음’)의 애절한 강조법”(p95)이자 순순한 표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1865년 미국의 국무장관 시워드의 암살을 기도한 청년 루이스 패인의 초상 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청년(스투디움)ㅡ그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푼크툼)ㅡ그의 죽음은 실현될 것이고, 실현되었다는 사실(전미래全未來, ‘시간’을 담은 푼크툼)의 등가 관계를 설명했다. 바르트는 사진의 미래 지향성을 부정했지만, 위에 내가 가져온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인용문처럼 “과거를 뒤돌아보면서도 미래적인 것을 발견”하는 푼크툼은 우리가 사진을 볼 때의 보편적 특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푼크툼을 보려고 하는 ‘나’가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이쯤 되니 나도 순환논증에 빠진 기분이다.
광기를 가두고 진부하게 만드는 사진 예술은 허위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다. 스투디움에 안주할 것인가, 푼크툼으로 뻗어갈 것인가의 선택은 감상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며 바르트는 글을 마친다.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현실성의 깨어남과 맞설 것인가는 나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 1979년 4월 15일 ㅡ 6월 3일”(p118)
롤랑 바르트는 1980년 3월 26일 사망했다. 이 책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고심했던 주제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는 저작이다. 사랑, 죽음, 언어, 시간, 의식과 육체, 대상과 의미 등등. 기호학자로서 언어의 불투명성, 대상의 불투명성 앞에서 그러했듯 그는 “사진의 깊이를 파고들어갈 수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도 없다”(p106)고 인정했다. 어둠의 통로(camera obscura)를 통해야 대상이 드러나는 사진은 육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너와 나의 무한한 평행선처럼, 있음과 없음의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공존과 다르지 않다.
※ 현재 이 책은 절판이라 동문선에서 나온 『밝은 방』으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