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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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많은 생활의 편리를 매일 누리면서도 과학을 어려워하는 것을 넘어 적대시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이제껏 알던 것들을 부수는 과학의 혁신성에 대한 반발 심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폐해를 거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운용하는 방식의 문제다. 과학은 인간에게서 나왔고 인간을 위한 삶의 방법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故 칼 세이건(1934~1996)의 뜻은 마이클 셔머에게도 이어졌다.

 

“10년 전 칼 세이건의 강의 “회의주의가 짊어진 부담”은, 지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방황에 빠져 있던 내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회의주의 학회, 〈스켑틱〉,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결국 칼 세이건이 불어넣어 준 영감 덕분이며, 회의주의와 과학의 가능성들에 내가 온 마음을 쏟게 된 것도 그이 덕분이다.”

 

저 헌사로 시작되는 이 책은 독자를 비장하게도 뭉클하게도 만든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회의주의는 입장이 아니라, 주장들에 접근하는 방법”이었고, “과학 또한 주제가 아니라 방법”이다. 1997년 나온 이 책은 셔머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각종 지식과 주장의 타당성을 과학적 회의주의로 논파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그는 멀찍이서 논리로만 따지는 과학자가 아니다. 적극적인 취재, 활발한 강연과 저술, 대중 매체 활동으로 각종 사이비와 대결하는 것에 몸을 사리지 않는다.

 

“이 책은, 서로 비슷한 믿음과 희망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다룰 것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 역사와 사이비 역사를 구분하고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다룰 것이다. 비록 각 장이 독립적으로 읽힐 수는 있지만, 장이 이어지면서 심령술사의 능력과 초감각 지각, UFO와 외계인 납치, 유령과 흉가가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다. 사회에 해를 가져다 줄 논쟁들?이것들이 꼭 사회의 주변부에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이를테면 창조과학과 성서 축자주의,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표현의 자유, 인종과 아이큐, 정치적 급진주의와 극우익, 도덕적 공황 상태와 집단적 히스테리에 의해 촉발된 현대의 마녀 광풍, 이와 아울러 기억회복 운동, 악마 숭배의 의식적 폐해, 소통보조자에 의한 소통 문제를 다룰 것이다. 생각의 차이가 모든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인간은 주변의 사물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하고 찾아내는 능력을 진화시켰으며(이를테면 방울소리를 내는 뱀은 피해야 한다는 것), 최상의 연관성을 찾아낸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자손을 남겼다. 그 후손이 바로 우리들이다. 문제는 인과적 사고에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연관을 짓는다. 이런 착오의 결과는 두 가지이다. 잘못된 부정은 목숨을 해칠 수 있다(방울소리를 내는 뱀은 해가 없다). 반면 잘못된 긍정은 시간과 기력만을 허비하게 할 뿐이다(기우제를 지내면 가뭄이 물러갈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바로 잘못된 긍정이다. 출면시 환각이 유령이나 외계인이 되고, 빈집에 울리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정령과 폴터가이스트의 존재를 암시하고, 나무의 음영이 동정녀 마리아가 되고, 화성 표면의 산들이 아무렇게나 드리운 그림자가 외계인이 구축한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다.”

“믿음은 지각에 영향을 준다. 지층 속에 ‘빠진’ 화석이 있다는 것은 신에 의한 창조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고, 유대인을 말살하라는 히틀러의 문서화된 지령이 없다는 것은 그런 명령이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유대인 말살이 없었다는 의미가 되며, 어쩌다가 아원자입자들의 구성과 천체 구조가 일치하면 지적 설계자가 우주를 설계했다는 증거로 둔갑하고, 애매한 느낌과 기억이 최면 요법이나 유도 상상 요법을 통해 되살아나면 아동기 때 성학대를 받았다는 아주 뚜렷한 기억으로 변모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그것을 확증해 줄 아무런 보강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말이다.”

“신화는 과학과는 전연 무관한 인간의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본성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신화를 과학으로 바꾸거나, 과학을 신화로 바꾸는 것은 신화에 대한 모욕이며, 종교에 대한 모욕이며, 과학에 대한 모욕이다. 창조론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신화가 가지는 의의, 의미, 숭고한 본성을 놓쳐 버렸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망쳐 버렸다.”

 

 

복잡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가설→이론→사실 확인을 살피는 과학적 방법으로 독단을 피해야 한다. “개인들이 더 많은 지식을 쌓고 자기네 생각들의 토대를 다질수록(우리 모두는 반증이 아니라 확증의 증거를 찾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하라), 각자가 가진 이념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기존의 것을 보강해 주지 못하는 새로운 생각들에 저항하는 ‘면역성’을 키우는 셈”인 ‘플랑크 문제’가 되기도 한다. 셔머는 ‘이상한 것을 믿게 만드는 스물다섯 가지 사고의 오류’를 자세히 소개하며 독단에 빠지지 않을 사고력을 키울 것을 당부한다. 그는 과학적 패러다임이 실험, 반증을 통한 지식의 누적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이 진보적이라고 말하면서도 과학적 방법을 써서 밝힌 지식이 절대적으로 확실한지는 알 수 없다고 인정한다.

 

“과학은 일련의 믿음들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박과 확증에 열려 있는 시험 가능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 과학에서 지식은 유동적이고, 확실성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과학을 제약하는 것이며, 또한 과학이 가진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마녀 광풍이 1980년대 악마 숭배의 공포‘로 부활, 1960년대 미국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아인 랜드(Ayn Rand(1905~1982)의 ‘객관주의’ 운동이 개인 숭배와 컬트 집단이 된 사례, 근절되지 않는 각종 사이비 종교, 홀로코스트 부정론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왜 반복될까? 수많은 계들이 닫힌 계를 형성해 정보 순환하는 되먹임 고리를 통해 자기 조직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각종 카르텔, 종북좌파 운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현존하는 지식의 상당 부분을 무시하거나 버리라고 요구하는 창조론과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추론 방법도 비슷하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역사학자들의 학문에서 오류를 찾아낸 다음, 그들의 결론이 틀린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역사학자들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처럼. 진화론 부정론자들(창조론자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다)은 과학에서 오류를 찾아낸 다음, 과학의 모든 것이 틀린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과학자들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처럼.”

“순진해서 그랬든 의도적이었든 간에, 창조론자들은 이제까지 유기체 변화의 인과적 요인들을 두고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건전한 과학 논쟁을 오해해 왔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자들이 벌이는 정상적인 생각의 교환과 과학이 가진 자기 교정의 본성을 마치 그 분야에서 내분이 일어나 곧 스스로 무너질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여긴 듯하다. 진화론자들이 수많은 주장을 하고 논쟁을 벌이면서도, 모두가 한뜻으로 확신하는 한 가지가 바로 진화는 정말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쉬지 않고 논의하는 것은 정확히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양한 인과 메커니즘들의 상대적 세기는 어느 정도인지 하는 문제들이다. 엘드리지와 굴드의 단속 평형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세밀하게 다듬고 개선시킨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뉴턴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단속 평형 이론 역시 다윈이 틀렸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일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까지고 버리지 않는다. 그런 희망이 바로 종교, 신화, 미신, 뉴에이지 믿음의 원천이다.”

 

위 인용은 간단히 가져온 것일 뿐이다. 창조론에 대한 진화론의 스물다섯 가지 반박은 책에서 꼼꼼히 읽어보길 바란다. 1920년대 시작되었던 스콥스 ‘원숭이 재판’을 시작으로 1987년 미연방 대법원까지 갔던 루이지애나 재판은 공립 교과서에 진화론을 금지하려는 창조론의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셔머가 최근 낸 『천국의 발명』에서 “1990년대 말 이후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 중 72에서 83퍼센트 정도가 천국을” 믿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천국에 대한 믿음은 강력하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라는 이들도 3분의 1은 사후 세계를 믿는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비합리와 비이성은 이토록 무궁무진하며 감히 말하지만 영원할 거 같다.

세계화로 인해 대륙 간 이동이 많은 만큼 민족주의, 인종 차별 문제도 해결 기미는 요원하다.

 

“곤충들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분법적인 변이는 예외에 속하며 연속적인 변이가 일반적이다.” 킨지의 결론이다. 마찬가지로 행동의 경우에도, 우리는 “극단적으로 옳은 행동과 극단적으로 그른 행동 사이에서 무한히 다양한 형태의 행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은 채” 옳다 그르다를 판단한다. 정말 그렇다면, 생물의 진화처럼 문화의 진화에 대한 희망은 변이와 개인주의를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개체 간의 이런 차이들은 유기적인 세계에서 자연이 진보, 진화를 이루는 데 질료로 삼는 것들이다. 사회 변화의 희망은 바로 사람들 사이의 차이에 자리하고 있다.”(크리스텐슨 1971)”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딱지들은 우리가 여전히 인종과 문화를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 계보를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까?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놓였던 베링 육교를 건너기 전인 2만~3만 년 전으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사실상 아시아인이다. 그리고 아시아인은 수십만 년 전에는 아프리카에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상 ‘아메리카 원주민’을 ‘아프리카?아시아계 아메리카 원주민’이란 말로 대신해야 마땅하다. 만일 아프리카 기원설(인종의 단일 기원)이 맞다면,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다. (카발리 스포르차는 최근 7만 년 전에 이 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설사 아프리카 기원설 대신 가지촛대설(인종의 다중 기원)이 맞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과科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모두 그냥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표시해야 할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독일인이셨고, 외할아버지는 그리스인이셨다. 다음번에 인종을 묻는 문항에 표시할 때 나는 ‘기타’에 표시를 하고, 내 인종 및 문화적 혈통에 대해서 진실을 적을 것이다.”

 

 

 

사람들이 ‘과학과 사이비 과학’, ‘역사와 사이비 역사’,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회의주의자들과 과학자들의 답변은 대략 이렇다. “교육을 받지 못함, 잘못된 교육을 받음, 비판적 사고가 부족함, 종교의 흥기, 종교의 쇠락, 전통 종교를 컬트가 대신함, 과학에 대한 두려움, 뉴에이지, 암흑시대의 재도래,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봄, 독서를 별로 하지 않음, 잘못된 책들을 읽음, 가정교육을 못 받음, 저질 교사들에게 교육받음, 그냥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 셔머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믿는 현상이 일종의 ‘문화’라고 평가하며 몇 가지 바탕을 짚는다.

 

①‘크레도 콘솔란스(내 마음을 달래 주기 때문에 믿는다)’게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다. 내가 생각해도 사람의 사고는 감정과 이성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명확하기보다 교란되기 쉽다.

②‘즉석 만족’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의 운세를 생각해보라!

③“‘단순성’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살이를 단순하게 설명해 주면, 그 믿음에 대해서 아주 쉽게 즉석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착한 사람에게나 나쁜 사람에게나 사람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 같다. 게다가 과학적 설명은 십중팔구 복잡하고, 알아들으려면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운명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미신과 믿음은 삶의 복잡한 미로를 시원하게 관통하는 단순한 길을 제공한다.”

④“‘도덕과 의미’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과 의미에 대한 과학 체계와 비종교적 체계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보다 높은 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가 뭔가? 윤리의 기초는 무엇인가? 삶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대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좋은 물음들에 대해서 과학자들과 비종교적 인본주의자들은 훌륭한 대답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다가가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 무한하고, 보살핌이 없고, 무목적적인 우주를 제시하면서 오직 차갑고 잔인한 논리만 내놓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사이비 과학, 미신, 신화, 마술, 종교는 도덕과 의미에 대해 단순하고 즉각적이고 위안이 되는 규범을 제공한다. 한때 거듭난 기독교 신자였기에, 나는 과학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⑤“‘영원히 마르지 않는 희망’ 이상한 것들을 믿는 이 모든 이유를 한데 묶어 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으로 삼았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언제나 더 나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찾아 앞날을 내다보는 종이라는 나의 확신을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결과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약속을 붙들려 하거나, 오로지 불관용과 무지를 고집함으로써, 오로지 타인의 삶을 가벼이 생각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다가올 미래의 삶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금의 삶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이다. 희망의 다른 원천도 있다. 원천이 다르더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측은지심과 더불어서 무수히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각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역사의 진보가 계속 이어져 보다 큰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보듬어 갈 것이라는 희망, 사랑과 공감과 아울러 이성과 과학도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우주를 탐사할 만큼 놀랍기도 하지만 이토록 암담한 딜레마도 가지고 있다. 과학적 회의주의로 생각의 노를 끝없이 젓는 길밖에 달리 뾰족한 수도 없는 것 같다.

 

“사람은 패턴을 찾는 동물이다.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우연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이야기를 짓는 동물이기도 하다. 수천 년 동안 신화와 종교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패턴들, 곧 신들과 하느님,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신비로운 힘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조물주와의 관계, 우주 속 우리 자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사람들이 줄기차게 마술적으로 사고하는 이유의 하나는, 현대 과학적 사고방식의 역사가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은 반면, 인류는 몇 십만 년 동안 존재했기 때문이다.”

“믿음 엔진을 진화시켰던 두 가지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1 자연선택 믿음 엔진은 생존에 유용한 메커니즘이다. 곧,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환경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게 하고(여기서 1형 적중과 2형 적중이 생존에 도움을 준다), 주변 환경에 대한 불안을 마술적인 사고를 통해 덜게도 해 준다. 불확실한 환경에 처했을 때의 불안을 마술적 사고가 줄여 준다는 심리학적 증거도 있고, 기도, 명상, 숭배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건강하게 한다는 의학적 증거도 있다. 또한 주술사, 샤먼, 이들을 휘하에 둔 왕이 더욱 큰 권력을 쥐고, 생식 활동 기회를 더 많이 가지면서, 마술적 사고에 맞는 유전자를 널리 퍼뜨린다는 인류학적 증거도 있다.

2 스팬드럴 믿음 엔진에서 마술적 사고 부분은 스팬드럴spandrel이기도 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이, 메커니즘이 진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부산물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스팬드럴이다. 1979년에 발표한 영향력 있는 논문 「산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팡글로스적 패러다임: 적응주의자 프로그램에 대한 한 비판」(『왕립학회 의사록』, V. B205: 581쪽~598쪽)에서 굴드와 르원틴은 이렇게 설명한다. 건축에서 스팬드럴은 “두 개의 둥근 아치가 서로 직각으로 교차할 때 형성되는 끝이 뾰족한 삼각 공간이다.” 중세 교회에서는 이 여분의 공간을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안들로 채워 넣었는데, “그 공간이 모든 분석의 출발점인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주변 건축 구조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적합한 분석 경로를 뒤바꿔 놓은 것이다.” “스팬드럴을 만든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다. “남자에게 젖꼭지가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올바로 물으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여자에게 젖꼭지가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여자가 아기에게 수유하기 위해선 젖꼭지가 필요하고,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구조틀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자연 입장에서는 바탕에 깔린 유전적 구조를 남녀가 다르게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남자가 불필요한 젖꼭지를 갖도록 구성하는 것이 단연 쉬웠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 엔진의 마술적 사고 요소는 스팬드럴이다. 우리는 인과적으로 사고해야 하기 때문에 마술적으로 사고한다. 우리에게는 1형 적중과 2형 적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1형 오류와 2형 오류를 범한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패턴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와 미신을 가진다. 둘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마술적 사고는 인과적 사고 메커니즘이 진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나온 부산물이다.”

 

내가 이 리뷰에 인용을 가득 채운 뜻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자세와 지식으로 중무장한 책을 간파하고 찾아 읽으며 당신도 과학적 회의주의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믿는 건 쉽다. 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을 때 많다. 그러나 삶 자체가 복잡하다. 오래전 파스칼은 사람이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지만 지성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면에서 인간이 그 상태를 지속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 4월 21일이 과학의 날이라지요. 평소에도 과학책 많이 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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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4-10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공헌은 우리를 막연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라 생각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에 한계점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밝히겠지요. 다만, 과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대한 의심 또는 다른 한 편으로 ‘열린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ㅑ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AgalmA 2019-04-14 16:16   좋아요 0 | URL
과학의 방법론도 쓰자는 거지 과학을 추종하자는 게 아닌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그렇게 오해하는 선입견이 있는 거 같아요. 과학은 믿고 따르자는 학문이 아니잖아요. 다른 어느 분야보다 더 반증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과학 아닙니까. 그나저나 저는 과학쟁이가 되고 싶어도 수학이 약해서 이번 생에서는 글렀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