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미성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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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 정치학자로 널리 알려진 E.H. 카는 초기에 러시아사 연구에 몰두했고 첫 저서로 도스또예프스끼 평전(1931)을 썼다. 그가 도스또예프스끼의 특색 중 하나로 꼽은 이런 말도 눈에 띈다

“똘스또이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지배적인 인상은 <공간감>이라고 최근의 한 비평가는 말한 바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효과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닫힌 느낌을 주는 데 있다. 자연의 넓은 시야에 결코 눈을 두지 않는 그의 관찰력은 무한한 인간의 기상caprice에로 더욱 응축되어 간다.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에게는 일종의 사색적 거리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생활에서도 작품에서도 대도시의 협소한 구속적인 긴장의 희생자였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이러한 거리감이 전혀 없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을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카의 이 날카로운 분석에 이마 탁~ 탄복하리라.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을 읽을 때 특히 폐쇄적인 답답함을 내내 느끼게 되는데, 인물들은 도시 속에 갇힌 쥐 같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늘 사건이 초점이다. 소설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곳곳의 실제 사건들, 러시아 귀족계급의 괴리와 빈민들의 삶, 각 인물들이 추구하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내면이 그의 소설의 주요 뼈대다미성년경우 다른 소설에 비해 답답한 느낌이 더욱 심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미성년인 아르까지 마까로비치 돌고루끼가 자신의 이념과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수기 형식으로 말하고 있어 더 그렇다. 귀족 아버지(베르실로프) 하녀 어머니(소피야) 사이에서 태어나 버림받다시피 자라온 아르까지는 로스차일드 같은 부유한 저명인사나 사교계의 삶을 꿈꾸면서도 모든 걸 버리고 은둔하는 삶을 꿈꾸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서사 구조가 인물의 내면처럼 요동치며 파편적으로 펼쳐지다 보니 서사 전개에 집중해서 읽는 독자나 도스또예프스끼 여타 소설에서 느꼈던 고도의 몰입감을 기대하고 읽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해설을 보니 내 반응만 유독 그런 게 아니었다. 평론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작품. 1권까지는 그럭저럭 읽었는데 2권부터는 중반까지 고역이었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무슨 결론을 도출하려 가고 있는지 후반까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몰락이 기다리려나 하며 총총 따라갈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나가게 만드는 힘은 스릴러와 탐정소설 같은 장치인 편지에 있다. 노공작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소꼴스끼의 딸 까쨔를 부자(베르실로프와 아르까지) 동시에 흠모하고 있다. 상황은 묘하게 꼬여 있는데 노공작은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 베르실로프의 딸 안나와 결혼하려는 와중이다. 아르까지는 이복 누니인 안나에게도 연정을 품고 있다. 이쯤되면 막장 드라마-_- 재혼을 생각중인 까쨔가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매도한 편지를 썼던 소문이 퍼지며 편지가 상황을 뒤바꿀 키워드가 된다. 이것을 누가 가지며 폭로하느냐 마느냐가 모든 소동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유로지비 면모와 유럽 견문 등으로 스스로 확립한 이념으로 매력을 발산하던 베르실로프가 까쨔와 내연 관계였고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 품게 되는 절정부까지 도달하니 그 역시도 정욕과 파토스 속에 양가적인 미성년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한편 문제의 편지를 가지고 있던 아르까지는 이를 이용한 사교계 진출과 모종의 복수도 꿈꿔보고, 베르실로프가 어머니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복잡한 심경 속에 선의로 행동하려 하지만 그의 치기가 뒤통수를 치고 만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서 자주 느낄 수 있었던 셰익스피어적인 플롯인데, 일련의 헛소동은 평탄히 마무리된다.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중 가장 밝은 결말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에서 드문 성장소설이자 그의 소설 변천과 집합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도스또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고독하면서도 자신의 공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 관 같은 방이나 빈곤 속에서 자신의 기개를 지키려 하는 고집, 거미 같은 이미지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아르까지뿐 아니라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백치』의 이뽈리뜨 쩨렌찌예프,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 등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모습은 도스또예프스끼 자화상이기도 하다.

“외부와 내부라는 것은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인상 없이는 내부가 우위를 점한다는 게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신경과 상상력이 한 사람의 구성 요소 안에서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도스또예프스키가 형에게 보낸 편지 중,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저 말은 이 소설에서 베르실로프(안드레이 뻬뜨로비치) 아르까지에게 한 말, 세묘노비치가 아르까지에게 쓴 편지, 그리고 세묘노비치의 입을 빌려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자한 시대 통찰과 상통한다
     

“저는 안드레이 뻬뜨로비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 같은 인간, 당신처럼 〈고독한〉 젊은이에 대해서는 솔직히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당신과 같은 정신적 특성을 지닌 젊은이는 적지 않게 있습니다.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재능은 사실 언제나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한 특성은 몰찰린 같은 아주 비굴한 성향으로가 아니면,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감춰진 욕망 쪽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무엇보다도 먼저, 조화로운 질서와 〈점잖은 기품〉(당신의 용어를 빌려 말합니다)을 지향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젊음이란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열정만으로도 순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젊음의 열정이 뿜어내는 폭발적인 광기에는 어쩌면 바로 조화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과 진리를 향한 탐구 정신이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지 않은 수의 동시대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그런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도 모를 그런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사안들을 접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조화와 진리를 겨우 발견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한 가지 덧붙인다면 과거에는,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은 아니고 약 한 세대쯤 전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동정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그들은 거의 언제나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 계층과 아주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고, 그것과 융합하여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그들이 자신들의 활동의 첫 무대에서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무질서한 점이나 불안함, 그리고 가정 환경에서도 좋은 바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또 훌륭한 가문적 전통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교양의 배경이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직접 그것을 추구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차차 그러한 것에 적응하고 그 가치를 존중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그들이 나중에 융합할 수 있는 대상이 지금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세묘노비치)


 어쩐지 지금의 불평등한 혼란 시국, 흙수저의 어려움에 처한 젊은 세대와도 맥이 닿는 말이지 않은가. 이 소설이 똘스또이 3부작 유년 시대, 소년 시대, 청년 시대를 의식하며 구상한 것이라고도 하나 이 성장소설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개인적 트라우마, 딜레마도 담겨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도박병이나 여러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성년적인 모습이 그의 현실적 페르소나로 읽히는 여지가 많다. 그리고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유럽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러시아 민족주의, 무신론자와 고행 수련자(유로지비) 면모가 결합된 베르실로프 캐릭터는 미성년』 이전 작품인  『백치, 악령』, 이후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설정이다. 이 캐릭터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인간 이상형의 좌절된 혹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내부 결함이 내재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백치최종 원고 작업일 때 내 소설의 주요 생각은 지극히 완전한 사람을 그리는 데 있다 말했다. 백치 미쉬낀을 통해 예수적인 인간형을 이상적으로 제시했듯이미성년에서도 베르실로프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는 재차 실천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도덕주의적 헌신을 추구하는 이상, 내 자신의 사상에 충실히 매진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실제로 나로 인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평생 동안 단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지.
…(중략)…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나름대로 가장 숭고한 차원의 교양을 얻었다는 사람이 자신의 심오한 사상을 추구하는 사이에, 때로 완전히 현실적 문제에서 멀어져서 아주 폐쇄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냉담한 인간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지. 그것도 처음에는 실생활에서만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사상적 측면에서까지도 그런 어리석은 천치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생활에도 진지하게 임해 단 한 사람이라도 정말 행복하게 만들 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본인 자신도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게 되겠지. 물론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설득력이 약하겠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다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습관이 된다면 아마도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고. 물론 처음에는 농담조로 시작했던 일이지만, 이 새로운 계율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가면서 비로소 나는 가슴속에 깃들어 있던 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점차 견고해져 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어.”(베르실로프)

그런 대상으로 소피야를 떠올리고 데려오기까지 한 베르실로프는 우연히 만난 까쨔에게 숙명을 느끼고 정욕에 사로잡힌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의 내연 관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상과 현실, 내면과 외면의 조화는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 하나로도 어려운데, 음모와 돈과 명예의 탐욕까지 끼어들면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진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닫아 두지 마시오. 자신을 자연 앞에 내세워요. 조금이라도 더 외부 세계로, 외적인 사물로 몸을 내세우세요.”(도스또예프스키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으면 우리는 죄인 아닌 자 없고 백치이고 미성년이라는 메시지를 늘 읽게 된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단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기도 힘든 이 삶, 스스로의 부조화를 곱씹으며 이제 도스또예프스끼 5대 장편 소설의 마지막 관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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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7-03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완독을 응원하면서, 한편 부럽습니다. ^^

AgalmA 2018-07-03 02:03   좋아요 1 | URL
처음에 기세좋게 시작했다가 영 진도를 못 빼고 있었죠^^; 이북 덕을 좀 봤습니다ㅎ 목표하던 거 하나 끝낼 수 있어서 소확행이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