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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투 ㅣ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7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직장을 그만둔지 3주 정도 되었나 보다. 직장을 그만두면 마음이 홀가분하고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는 왠지 모를 중압감과 함께 지독한 감기와 어지러움증에 시달리고 있다. 몸 상태는 조금 안 좋은 지점과 아주 안 좋은 지점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왔다갔다했고 건강이 안 좋으니 마음 상태가 가벼워질 리 없다. 일단,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조금씩 읽어 나가던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고 어느덧 마지막 편을 읽게 되었다.
'마지막 전투'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완결편이다. 제목만 보고 책 내용을 짐작했을 때는 나니아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아슬란이 다스리는 영원히 평화로운 나니아의 모습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마지막 전투로 나니아는 다른 나라에 점령당하고 그 이후 나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완전히 멸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나니아 나라의 멸망 이후 나니아보다 더욱더 경이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아슬란은 그 세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면서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마친다.
"이제 다 끝난 거지. 축제가 시작된 거야. 꿈은 끝나고 이제 아침이 된 거다."
나는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이렇게 끝날 줄 상상도 못했다. C.S.루이스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동화책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상당히 논란 거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인류 종말과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해 C.S.루이스의 철저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판타지 동화이기 때문에 작가의 허무맹랑한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이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은 "판타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독자들은 판타지를 읽음으로써 친숙하던 것들에서 놀랍고 새로운 뜻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즉, 판타지는 어떤 존재의 눈에 보이는 외관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적 가치를 결합시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그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판타지가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실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위장해서 내면을 숨길 수 있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는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존재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나는 마지막 전투를 통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C.S.루이스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진리와 진실,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C.S.루이스의 도움으로 나는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과 이 세상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켄타우로스 룬위트는 숨을 거두는 순간 "모든 세계에는 종말이 있으며, 고귀한 죽음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는 귀한 보물"이라는 말을 남긴다. 나니아라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꼭 죽게 마련이다. 나니아가 멸망하고 나니아 사람들이 죽는다면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C.S.루이스는 "그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항상 새로운 장이 그 이전 장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 아니 끝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니아 나라 멸망 이후에 더 깊고 더 높은 곳에 영원히 존재할 나니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C.S.루이스는 이 나라를 묘사하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곳에 있는 과일 맛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다른 과일과 비교해서 기껏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과일을 먹고 나면 이제껏 먹은 가장 싱싱한 자몽도 그저 그래 보이고, 가장 즙이 많은 오렌지도 말라 보이고, 입에서 살살 녹는 배도 딱딱한 나무껍질같이 느껴지고, 가장 달콤한 산딸기도 시큼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세상의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가장 멋진 풍경이라고 해도 그 세계에 가게 되면 그저 그런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나니아의 묘사가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성경의 잠언서에 보면 '아굴의 기도'라는 것이 나온다. 중학교 때 처음 읽고 알게 된 부분인데 내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아굴은 이렇게 기도한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나는 이 기도가 멋있어 보이면서도 이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게 된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정말 많은데 그것들 한 번 누려봐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니아 이후의 영원히 지속될 나니아가 존재한다면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세상에 좋은 것으로 내 입에 넣어 보려고 내 눈을 채워 보려고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이라도 새로운 나니아에서는 시시한 것이 아닌가? 단지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아굴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런 세계가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나니아, 영원한 나라 나니아의 존재를 믿는다.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나는 이 세상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서 몸이 많이 회복되었고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체스터턴은 "완벽한 힘에는 일종의 가벼움,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고 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C.S.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야말로 그런 완벽한 힘을 가진 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나도 그 힘을 조금 얻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