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 종교, 믿음을 팔고 권력을 사다
김상구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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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같은 '변질된 종교와 타락한 신앙인'에 대한 날선 지적을 대할 때마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들의 지적에 대해서 때로는 변명을 하고 싶고, 그래도 많은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항변을 하고도 싶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살아있는 손길을 알기나 하는 거냐고 따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내 그 안에 담기 그들의 주장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는 합니다. 그래도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감정안에는 진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먼저요, 그 다음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때로는 일면만을 침소봉대하곤 하는 이들의 편협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된 요지는 우리에게도 이제는 종교 단체를 통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종교 법인법' 형태의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소득세를 내지 않는 성직자를 비롯한 종교인, 막대한 부동산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실명제를 유유히 피해가는 종교계의 유지재단을 통한 명의 신탁, 개신교가 종부세라는 세금폭탄을 피해가는 과정 등을 통해서 성역화된 한국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며, 주류 언론도 힘있는 정치인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러한 변질되고 세속화된 종교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의 시도로서 저자는 '종교 법인법'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2부 한국 종교의 뒤틀린 모습'을 통해서 우리나라 종교계의 치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종교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만들어진 기독교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은 유관순 열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의 과거에 대한 의문들로 연결됩니다. 또한 기업화된 대형 교회와 그들과 손잡고 돈을 굴리는 금융기관의 기가 막힌 유착, 여성차별을 아직도 공공연히 행하는 종교계,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종교 권력, 종교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권보다 더 구린(?) 형태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등 저자는 그동안 우리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더 종교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더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개혁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종교 법인법이 뒤틀린 우리 종교의 모습에 대한 개혁의 완성이라기 보다는 기틀이고, 그러한 기반을 통해 현재 사회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 그 절반이 대한민국에 있다!' 순전한 신앙인의 눈으로 교회의 부흥을 생각한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 내면을 끄집어 내면 낼 수록 그 안에는 부끄러운 이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리 성장한 교회를 향해 던지는 저자의 외침은 신앙인들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은 이상은 깊이 숙고하고 겸손히 반성-실제 신앙적으로는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할 제목들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저자의 지적을 교회에 흠집을 내려는 사악한 자의 간교함 -분명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정통적(?)인 신앙인의 관점이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입장에서가 아닌 신앙 밖에 있는 이로서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있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현재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변질되고 타락한 모습에 대한 따끔한 지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종교 법인법'을 뛰어 넘는 해결책과 변화된 교회, 처음의 모습을 회복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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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리처드 포스터 지음, 정성묵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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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에는 교회에 가고, 예배와 기도, 찬양을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하나님과 자신만의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사소할 수도 있고, 생사를 가르게 된 중차대한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간직하게 된 그러한 스토리는 한 사람의 신앙인을 지탱해주고, 믿음에서 멀어졌을 때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함을 강조했었는데, 신앙의 처음 반석을 세우는데 그러한 개인적인 만남 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필요함을 말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 없어 매번 곁길로 가기 일쑤이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했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2:4-5a)는 책망이 곧 내게 주어지는 책망이 되곤 합니다. 결국 신앙의 반석을 멋지게 세웠지만, 그 반석위에 멋지게 집을 짓지 못하고, 어찌할 바 몰라 짓다가 허물곤 하는 것이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은 바로 신앙의 여정에서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와 그리 살기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멋진 신앙의 집을 짓기 위한 뼈대와 벽을 견고히 세울 재료들, 그리고 내부를 내실있고 멋지게 장식할 가구들과 장식품들.....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집을 지을 것인지를 안내해 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천은 성경을 먹고 산다. 인간의 몸이 음식에서 영양분을 얻는다면 거룩한 공동체는 성경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크리스천은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 삶 속에서 소화시킨다. 다시 말해, 성경은 사랑의 행위, 냉수 한 그릇, 온 세상을 향한 선교, 치유와 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행하는 정의, 아버지를 향해 뻗은 예배의 손길, 아들과 함께 씻긴 발로 변형된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어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뼈대는 성경 말씀임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영적 훈련의 기본은 바로 성경을 먹는 것, 배우거나 연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소화시켜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경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기 위한 자세와 훈련-노력이 아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훈련의 주권을 우리 자신이 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나와 함께 하려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믿음으로 응하는 일련의 과정에 필요한 영적훈련의 방법과 과정들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뼈대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집 내부를 적절한 가구와 장식품들로 채우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할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송을 드리거나 감사를 드릴 때, 그 자리에 내 자신만 있고 정작 하나님이 소외될 때가 없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참뜻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서 내 자신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많은 부끄러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군더더기가 붙은 것을, 말씀과 어긋나는 많은 상황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이라고 합리화시키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조그맣게 쌓은 성경지식과 신앙의 연수를 은연중에 내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고 있는 모습이 비치기도 합니다. 내 삶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들어와 함께 거하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한 삶이 되기를 훈련해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나와 함께 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초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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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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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흔히 사람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이 왜 더 강한 힘으로 더 직접 개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난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 몇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과거에는 강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오래가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지상의 강국들이 배운 것처럼, 힘과 자유는 껄끄러운 짝이며 하나를 강조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작아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자유 쪽으로 기우신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확실한 답은 모른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을 잠깐씩 언뜻 볼 수 있을 뿐이다. - p347~348,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게 무슨 소용인가'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창조주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그 대답을 구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들 앞에서,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폭력과 살인을 알리는 소식들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는 크고 작은 불행이나 아픔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미를 묻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는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가끔씩은 하나님이 악행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눈에 볼수 있게 강력한 징벌을 보이셨으면 좋겠고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셔서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끔씩이라도 성경에 나타났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던 기적을 내 가족이나 벗들에게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아마도 신앙생활은 훨씬 더 편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훨씬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젠 그런 모습으로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군대 삼으셨던 것처럼 자신의 육적인 군대를 내세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시지도 않으시고,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셨던 현존하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십니까?' 또는 저자의 질문처럼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그때-구약의 시대-처럼 우리에게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시는 듯이 그리 곁에 조용히 기다리며 지켜보시고 계실 뿐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열 편의 이야기와 강연들 속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얻은 이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아마도 저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만남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그것이 곧 인격적인 만남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부분은 아닐는지..... 

 요즈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인기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창조주의 존재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서적들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관심을 끌고는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행크 데이비스의 '양복을 입은  원시인' 역시 그런 흐름의 하나를 이루는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보았을 때, 최근의 추세는 과학으로 증명 불가한 미신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의 일부 영역에 국한된 부위가 자극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일축하는 경향인 듯 합니다. 결국은 영적인 면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남겨진 물질적인 세상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고서는 그곳에는 관련된 흔적은 있지만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한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다만 인간의 나약함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에서 종교나 신과 관련된 영역이 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종교와 창조주의 의미 또는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의 자세로 강요(?)되곤 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부정적인 인종차별, 전쟁과 살인 등을 이야기하지만, 창조주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상을 강요하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 교회가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 인권을 실현시켜주었고 아픔을 싸메고 더 나은 삶으로 인도했던 이야기들은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버리고는 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해나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했던 총기난사 사건의 치유 등은 바로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를 공격하던 이들에게 대한 믿는 이들의 대답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를 조용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신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저자는 열 가지 사례들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모범이 실천된 곳,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넘치고 은혜와 사랑이 물같이 흐르던 곳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총기 난사의 공포에 떨고 있던 버지니아 공대와 공산 세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흥왕해 가는 중국의 가정교회, 가족들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모임과 C.S. 루이스를 삶을 기리던 케임브리지의 모임, 엄격한 규율을 가진 온실 속의 신학교 학생들과 인종차별과 학살의 벽을 넘어 화해를 이룬 남아공의 현장, 지역사회를 섬기는 멤피스의 교회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동의 사역자들, 그리고 시카고의 중독자들의 삶과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삶속에 넘쳐 흐르는 은혜와 사랑,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와 공의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손길..... 바로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깨어 있어서 교회가 '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빚이 더 필요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압제자와 압제받는 사람 모두에게 언제라도 은혜가 흘러나가는 곳, (교회가) 바로 그런 곳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그러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더 많은 대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독자들과 성매매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삶을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악의 위력과 그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수십 편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회의론자들도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한때 밑바닥까지 추락했으나 이제 자기를 구원해 준 은혜가 하나님한테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변화의 사연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그분은 나를 성노예와 마약중독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은 내게 삶을 되찾아주셨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삶의 변화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겠지만, 한나절 동안 그런 이야기를 여남은 편씩 듣노라면 이성적인 논거가 곧잘 무색해진다. 예수님은 신학적 '증거'를 제시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열심히 삶을 변화시키셨을 뿐이다. -p345,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 게 무슨 소용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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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 혜초, 천축 다섯 나라를 순례하다
혜초 지음, 지안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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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스님 혜초가 법을 구하기 위하여 천축의 다섯 나라와 중앙 아시아, 그리고 아랍을 여행한 시기가 8세기라고 합니다. 기간은 4년여가 걸린 것으로 보고 있으며, 처음 출발한 뱃길 여행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여행은 도보로 하는 순례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더 나은 교통편과 숙박 등의 여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지역을 4년여에 걸쳐서 순례한다는 것, 또는 4년이 아니라 며칠 만에 스님 혜초가 돌아보았던 지역을 현대적인 방식의 여행 수단을 통해서 동일하게 여행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 시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불법을 얻기 위해 나서서 순례의 길을 마무리한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와 각오, 그리고 인내의 시간들을 쌓아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사 시간의 초반에 우리 대부분은 불교의 전래에 대해서 배우고, 원효와 의상대사에 대해서 배우고, 또 하나 불교와 관련해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었습니다. 내용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시기에 인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자체가 배우는 입장에서는 멋있어 보이고 흥미롭게 여겨졌던 기억입니다. 배울 당시에는 그런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았고 찾아서 읽어보라 권하던 이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이리 관심이 생겨 손에 들고 읽는 <왕오천축국전>은 학생때 제목만 듣고서 느꼈던 그런 경이로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지내온 순례의 길을 너무도 간결하고 담담하게 기록한 내용은 자신의 여행에 대한 단순한 기록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도 만듭니다.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이리저리 꾸미기 보다는 자신이 보고 들을 것을 성실히 옮겨 적은 기록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이런 저런 여행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과 색깔들을 생각한다면 초라하게도 느껴질 수 있겠지만, 혜초 스님은 자신의 여행을 나라의 위치와 국가의 문화나 풍속, 왕의 권력, 불교의 번성 유무, 대/소승 불교의 번성 유무 등에 대한 틀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만 치고 본다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혜초 스님이 그 몇줄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몇날 며칠을 더위 또는 추위속에,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노상을 헤매고 되돌아가는 고행의 시간을 거쳐야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기록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단순히 책상 앞에서 써내려 간 화려한 문장이 가지지 못할 삶의 이면을 담고 있음을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기록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레오에 의해서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되었고, <일체경음의>의 혜초전에 수록된 단어와 일치하는 단어가 있는 것을 근거로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추정하기에 이른 것인라고 하는데, 실제 <일체경음의>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상/중/하권으로 나누어 실려 있고, <일체경음의>에 설명된 단어 중에서 이 필사본에 나오는 것이 17개 정도라고 하니, 적어도 우리가 지금 읽는,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단순한 기록이라고 실망하기도 하는 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의 온전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극히 일부이거나 그보다는 전체 내용을 축약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한다면 더 방대한 원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고, 간단한 축약본만 보고서 미리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시대에 몸을 아끼지 않고 법을 구하기 위해 천축을 찾아 나서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님 혜초의 용기와 삶에 대해서 더 집중하며 읽어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달밤의 고향 길 바라보니 / 뜬 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 편지라도 써서 구름 편에 부치고 싶건만 / 바람이 급해 구름은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 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 / 더운 남쪽 천축은 기러기도 없으니 / 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월야첨향로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 (함서참거편 풍급부청회),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아국천안북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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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삶 - 믿음이 이긴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긍정의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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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His Time, In His Time, He Makes All Things Beautiful, In His Time....'  우리말 가사로는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라고 불렸던 복음성가의 한 구절입니다. 물론 이 성가가 말하는 궁극적인 주님의 시간이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 모든 것이 회복하는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내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니, 앞길에 버티고 서있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거나 바라던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도 문득 문득 생각하게 되고 마음을 가다듬고 겸손히 한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를 받고는 하였던 노래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은거야,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내가 바라던 것들만큼이 아니라 더 나은 것들을 받을 수 있을거야....' 내 자신의 작은 일에 이리 적용하며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한 이 성가가 아마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소망을 간직하며 자신의 현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언젠가 주님의 시간이 도래하면.....  

 이리 삶에서의 소망과 소원들에 대해서 '언젠가...'라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을 더 성숙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러한 방식의 생활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이 책을 통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선포하는 '지금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와 회복의 때'이고 '지금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 가운데로 들어갈 때'라는 말들은 '언젠가'라는 단어로 꽉찬 내 영혼의 막힌 한쪽 벽을 말끔하게 뚫어 주는 듯한 시원함을 내 영혼에 선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재림의 때에 완성되기는 하겠지만, 지금 내가 사는 가정과 이웃, 교회와 직장에서도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설교 말씀을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리 이야기하는 책들을 여럿 읽기도 하고  성경 구절들을 묵상하기도 하면서, 왜 '언젠가'가 오늘이나 내일 또는 다음달에나 올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막연히 미래의 '언젠가'라고만 생각하고 말았을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도적과 같이 불시에 임할 수 있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 신앙의 모습은 은연중에 내일이나 모레, 또는 올해나 내년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방심과 나태함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나같이 '언젠가'라는 시간에 머물고 있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이들의 모습을 알고 있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지금이 당신의 때입니다', '지금'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이고, '지금'이 그 분의 복을 누릴 때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복을 받고, 최고의 사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저서 <긍정의 힘>이나 <잘되는 나>에서와 같이 이 책에서도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멀리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며, 그의 자녀들을 살피기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쓰러진 자녀를 손내밀어 일으키시고, 상처받은 자녀를 따스한 손길로 위로하시고, 울고 있는 영혼의 눈물을 손수 닦아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시고 능력있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과 또 자신의 삶속에서의 생생한 체험이 바로 이 책에서 선포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이고 하나님께 복받을 때라는 믿음, 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주시리라는 소망, 원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구하는 대로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 시련과 고통도 더 큰 일과 축복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희망의 증거가 되겠지요. 이러한 격려에도 불구하고 분명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에게는 여전이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이 있고 그것들은 삶의 즐겁게 하기보다는 고단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하지만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그러한 고단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최고의 삶을 준비하고, 최고의 축복을 내리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를 멈추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시련이 오면 피하지 않고 맞서 이겨내고 성장의 시간으로 삼고, 열정을 가지고 꿈을 꾼다면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근저에는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아버지 되시고, 나와 함께 지금도 동행하고 계신다는 아주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우리들에게 이 책을 통해서 이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적지가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지금이 너의 때다!'라고.....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하나님안에서 믿음으로 자신의 때를 열어가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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