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구약성서 하룻밤 시리즈
이쿠타 사토시 지음, 오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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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챤 -물론 이 책이 말하는 구약성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카톨릭과 기독교의 경전입니다-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자랑이라기보다는 기도와 예배, 찬송 등과 함께 신앙생활의 기본중의 하나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한번 읽는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읽고 묵상한다거나 단순히 한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구약을 예로 든다면 39권 -기독교의 경우-으로 이루어져 이것들을 율법서, 역사서, 대선지서, 소선지서, 시편 등 몇그룹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읽다보면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은 수월하게 읽히지만, 각 지파를 열거하는 부분이나 성막이나 성전에 대한 지루(?)한 -물론 그 뜻을 풀어나간다면 많은 신앙적인 깊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설명이나 건축양식에 대한 소개 부분은 분명 많은 신자들의 성경읽기를 방해하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성경이 연대기적으로 기술되거나 반복되는 부분이 없이 체계적 기술된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 열왕기나 역대기를 읽다보면 여러가지 사실들이 실타래처럼 꼬이기도 하고, 다른 보조 서적의 도움이 없다면 선지서나 시편 등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은 아예 가늠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국 성경을 한번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신앙인으로서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는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그러한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싶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구약성경을 완전히 읽지 못했거나 읽기는 했지만 그 흐름을 꿰뚫지 못한 신자들에게 유용하게 읽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글 제목에 '무난한 소개서'라고 표현한 것은 말 그대로 구약의 줄거리를 파악하고 중요한 포인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전체적인 개요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무난함입니다. 반복되거나 지루하게 열거되는 부분들은 과감히 생략을 했고,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왕들에 대한 부분도 간략하게 정리해서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전체적인 개략은 역사적인 순서와 사건에 입각해서 기술했기에 시편이나 잠언, 기타 선지서의 내용 대부분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커다란 줄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책내용의 대부분은 구약의 내용을 그대로 알기쉽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무난한 소개서' 정도로 언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생활에서 필요한 신앙적인 깊이를 담지 않았다는 점 -물론 이 책의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에서의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예를 들면 신자들에 대한 교육이나 묵상시간이라면 당연히 언급되었을 창세기의 뱀과 여자와 아담에게 벌을 내리는 장면에서 언급되는 '여자의 후손'이나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낼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이 품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 등은 성경자체가 언급하는 내용이 아닌, 그 안에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기에 그냥 이야기로 서술되는 정도입니다. -물론 이 부분도 각 종교의 차이가 있으니 교리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가 아닌 이들이나 타종교인의 입장에서 오로지 구약성경의 내용을 알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읽는다면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경전으로서의 구약이 아닌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천지창조에서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여러 사건들에 촛점을 맞춘 내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 하나: 110페이지에서 야곱이 라헬을 부인으로 얻는 과정에 대한 부분에서 책에 소개된 대로라면 7년동안 삼촌 라반에게 봉사하고 레아를 부인으로 얻게 되고, 다시 7년을 더 일한 다음에야 라헬을 부인으로 얻게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아니라면 번역의 잘못(?)- 실제 성경대로라면 7년간 봉사한 뒤에 레아를 얻고, 7일동안 초례를 치룬 뒤에 다시 라헬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 댓가로 다시 7년간 삼촌 라반에게 봉사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사족 둘: 이 책을 제목처럼 정말 하룻밤에 읽을 수 있을까? 물론 답은 '아닙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속독에 능한 사람이라면 날새워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개략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며 읽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하룻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족 셋: 성경 개역한글판에 익숙해져 있는 입장에서 책에 언급되는 몇몇 인명(이삭을 이사악, 에서를 에사오 등)과 지명(벧엘을 베델 등) 그리고 사사기를 판관기 등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상당한 혼돈과 낯섬을 안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가 공동번역을 사용했다고 밝혔으니 나름의 기준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의 대부분이 개역한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혼란을 예상하고, 손이 좀 가더라도 그런 부분은 편집의 묘를 사용해서 해결했다면 나같은 이들에게는 훨씬 편안한 책읽는 시간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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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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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대심문관)은 죄수(예수)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쓰리고 무서운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죄수는 침묵 속에서 노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열어젖히고는 말했다. "가버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마... 다시는 말이야!" 그리고 그는 죄수가 도시의 어둠 속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한 이후 현재까지 여전히 그 분을 십자가상에 다시 못박히게 만드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2000여년전 그의 가르침에 열광했던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휩쓸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고, 메시야를 그리도 갈망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냉정하게 그를 십자가상으로 보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마저도 2000여년 동안 당시의 유대인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이 행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대심문관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을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모든 모습이 그러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결국 종교화 되고 의식화 되어버린 종교는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이 행해지고 박해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감옥에 가둔 노회한 대심문관은 눈앞의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가르친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기적과 권위와 신비로 포장된 교회가 제공하는 평안에 몸을 맡기고 기꺼이 자유를 저당잡히고자 하는 존재들일 뿐이며,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교회라는 제도 속에서 제공되는 안전이,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에 대한 꿈과 함께 두려움이라는 짐마저 함께 지도록 만드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훨씬 정당하고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쳤던 그러한 자유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기적과 신비, 권위라는 근간위에 세워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양도하고 그 안에서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는 군중들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지만, 결국은 껍데기만 남은 종교가 진짜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힐난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재의 종교인들에게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서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이 말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도 당혹스럽게 했던 예수님이 가르치고자했던 자유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준 첫번째 가르침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가르침은 영적인 삶의 내재화와 인식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인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으로 연결되며. 결국 예수님이 '인간의 마음속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자의 사랑을 주러 온 자' 즉 그리스도라는 점진적인 드러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종교적인 편견위에 자리잡은 신성한 장소, 과거에 얽매인 종교적인 시간, 성스러운 것과 불순한 것의 종교적인 구분,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민족만을 위하는 신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전복을 통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지고 있던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 대한 기득권을 해체하고 영적인 삶과 내적인 자유에 대한 깨우침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란 '...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 너무나 쉽게 충동에 휩쓸리게 하는 자유,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헛된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타인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자율적이며 책임을 갖도록 만드는 내적인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며.... 이 관계가 인간을 예속하는 것이 아닌....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바로 진리가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아가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한다' 것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 이야기와 에필로그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그 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예수, 평등과 개인의 자유, 여성의 해방, 사회정의, 비폭력과 용서 등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윤리와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고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의 종교로서 확립되어가는 과정, 박해받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중세의 막강한 권력에 취해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껍데기만 남기고 배반했던 사실들, 그리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시작된 휴머니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신의 부활, 탈종교화를 걷는 휴머니즘과 근대화의 과정 속에 형식은 지워졌지만 여러가지 형태의 내용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대심문관 이야기와 명백히 대조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명확한 자각일 듯 합니다. 단지 종교화된 형식과 마음으로 후딱 읽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행간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깨우침, 즉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한 각성과 그러한 처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린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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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케이도 감사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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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만 하면 행복할 텐데." 저자가 몇가지 예를 들었듯이 여느 사람들처럼 내게도 빈칸을 채울 단어들이 상당히 있는 듯 합니다. '몸이 나으면? 승진만 되면? 결혼만 하면? 혼자 살면? 돈방석에 앉으면?'..... 누구나 빈칸에 채울 절실한 단어 한두개쯤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때로는 집착을 보이기도, 때로는 현실과의 괴리에 낙망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한데, 한편으로는 행복의 조건으로 뭔가 욕망의 충족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담은 이러한 형태의 문장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별로 좋은 접근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 바라는 무엇 한두가지 만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기는 어려울테니 말입니다. 그럼, 이 문장의 형태를 조금 바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          )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가?" 건강하지 못해도? 승진하지 못했어도? 아직 결혼하지 못했어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생활에도?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어도? ..... 여느 사람들처럼 내게도 이러한 질문에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만한 용기가 많지는 않은 듯 합니다. 특히나 세상살이에 바빠서 넋을 놓고 살때면 말입니다. 이런 내게 저자는 조용히 말합니다.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이 목자 안에서 이미 가진 것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에게는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당신 뒤에는 사랑의 힘이, 당신 안에는 성령님이, 당신 앞에는 천국이 있다. 목자가 있다는 것은 모든 죄를 사해줄 은혜와 모든 모퉁이 너머를 보여줄 지도, 모든 구석을 밝혀줄 촛불, 모든 풍랑에서 보호해 줄 닻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셈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첫번째 문장을 멋지게 채울만한 단어들이 몇개 떠오릅니다. 이기적인 욕심만 버리면, 믿음을 소중히 지키면, 감사할 줄 알면, 예수님의 사랑을 행하면 ...... 그리고 이런 삶의 자세가 두번째 질문에도 선뜻 나서서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감사의 제목이 되고, 내 손에 들려있지 않은 것들이 불평의 원인이 된다면.....  아마도 성경에서 이르는,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감사'의 경지(?)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듯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감사의 제목들은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나 명예, 건강 등을 목록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더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감사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에 대한 눈높이와 생각의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에 기초한 삶, 또는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을 되새기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동행이 감사의 제목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모습이 현실적인 삶과 신앙 안에서의 삶이라는 이중적인 구분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 현실을 핑계로 여러 소유의 목록들을 들이대며 감사하고 부족한 것을 집요하게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부와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장은 빼고 머리만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곤 하던 잘못을 고백하고 마음도 함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내 삶을 지켜보고 내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단순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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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예수 - 예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길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대상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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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예수님의 삶을 바라볼 때,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그러한 기독교의 입장을 비판하거나 반성하는 측에서는 세리와 과부와 고아, 그리고 어린이와 사회적인 약자를 끌어안고 포용하셨던 측면에 대해서 강조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이고 또한 자기의 시각을 내세우는 것일 뿐, 실제 예수님의 삶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열린 자세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 '럭셔리 예수'는 그러한 면에서 사뭇 신선한 면이 있습니다. 좋은 집에 멋진 차, 귀한 보석에 비단같은 옷..... 어떤 사람이 '럭셔리'하게 산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습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물론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럭셔리한 모습도 있겠지만, 아주 서민적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을 마실만한 여유로도 럭셔리함을 느끼기도 할 겁니다. 즉 럭셔리하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 소유한 것의 물질적 가치에서 올 수도 있지만, 사람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것들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럭셔리함도 바로 후자의 럭셔리함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문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적어도 나 자신은 이 말을 기억할 때마다 어느 멋진 차도 주택도 보석도 주지 못하는 풍요함과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저자가 말하는 럭셔리함이란 그런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의 삶이 남긴 가르침을 통해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들을 느끼고 누리는 것, 하나님의 풍성함이 충만한 삶을 깨닫고 누리는 것, 바로 예수님안에서 럭셔리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이겠지요.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지저스 럭셔리' 라는 의미를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출생에서 부터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삶자체에 담겨 있는 실제적인 럭셔리함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저스 럭셔리'가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고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구체적으로 삶의 부분부분에서 그러한 럭셔리함을 분별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깊은 묵상과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각이 없다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20여가지의 럭셔리함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과 곳곳에 담긴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지저스 럭셔리'라는 제안 부분은 신앙안에서 누리지 못하고, 때로는 잊고 살았던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던 의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족히 먹이신다고 말씀하셨던 의미...... 그러한 것들이 결국 저자의 말처럼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추구하는 지저스 럭셔리에 비하면 샤넬, 까르띠에, 마이바흐 등의 럭셔리는 일차원적이고 단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삶속에 담긴 럭셔리한 것들을 알게 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매일의 삶속에서 추구한다면, 더 많은 럭셔리함의 제목들을 알아가게 되겠지요. 어떤 사람이 보석을 장롱안에 넣어두고 잃거나  망가질까 무서워 치장하는데 사용하기를 주저한다면 참으로 우스울 일인 것처럼, 믿는 이들도 그러한 실수를 매일매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믿는 모든 이들의 삶이 럭셔리한 예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성함을 한껏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소원처럼 그러한 태도가 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염될 수 있었으면 더더욱 좋은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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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을 리뷰해주세요.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5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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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둥그스름한 얼굴에 머리를 뒤로 동여맨 채, 여러 음악가의 일생과 음악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마지막에는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연주를 멋지게 하는 한 남자를 가끔 보게 됩니다, 얼마전에는 일반인을 위한 고전음악에 관한 책으로 조명을 받기도 했던 이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렵고 멀게만 느끼는 고전음악을 가지고 서서 사람들을 부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서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음악회라는 고전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이러한 강의 형식이나 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아마도 한 연주가로서의 자존심을 낮추는 것일 수도, 가슴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들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고전음악을 꿈꾸며 과감하게 나선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음악회에 가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이고, 음악이라고 하면 가요 몇 소절과 종교음악 몇 곡, 그리고 학교다니면서 배운 것들에 대한 기억과..... 몇몇 귀에 익은 클래식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 역시 그가 다가서기를 바라는 클래식에 대한 문외한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의 모습과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 하곤 하였습니다. 여러 음악가의 삶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구요.....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이 책에 대한 반가움도 아마 그러한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교향곡에 대한 관심은 대학교를 들어가고 얼마되지 않았던 때 읽었던, 소설속의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던 듯 합니다. 남의 집 창가에 앉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그 중에서도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며 청춘의 열정을 부여잡던 주인공의 모습이 나도 그 음악을 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켰고, 그 뒤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몇몇 유명한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귀에 달고 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내 삶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게 만들고, 바쁜 삶에 잊고 있었던 몇몇 교향곡의 낯익은 선율을 내 귓가로 다시 데려다 줍니다. 하이든에서 시작하여 모차르트, 베토벤,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클래식에 관심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을, 열명의 작곡가의 음악에 얽힌 삶과 특히 그들이 만들어낸 주옥같은 교향곡에 대한 이야기들을 간결하지만 흥미롭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해당 작곡가의 교향곡 중 가장 사랑하는 한곡을 선정하여 세세한 작품설명을 곁들여 함께 들어보기를 권하고 있는데, 옆에 소개된 곡들이 없다는 점이 많은 아쉬움을 줍니다. 시간을 내어 다시 책을 보며 꼭 들어보아야겠습니다..... 

 앞에서 케이블 TV에서 강의를 하던 이는 언젠가, 지금은 클래식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클래식이 현대의 대중음악처럼 매우 대중적인 음악이었고, 지금의 여러 파격적인 음악처럼 당시에도 파격적인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이 있었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고전음악을 어려워하거나 따분해하는 이유는 귀에 익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교향곡을 처음 들었을 때,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그냥 녹음기에 테이프를 넣고 틀었을 때의 기억은 이 음악에 대한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니까요. 그리고 아직도 연주회나 방송을 통해서 듣는 낯설은 클래식 곡들은 분명 끝까지 듣는데 인내심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귀에 익은 좋아하는 곡들의 선율을 들을 때면, 그 의미는 180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가의 생애와 곡들에 대한 설명을 함께 하고 나서 듣는 것이라면,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깊이와 의미를 담아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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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클래식, 특히 교향곡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 또한 좀더 적극적인 사람에게는 고민하지 않고 저자가 권한 곡을 시작할 수 있게 자신의 느낌을 잘 설명해 놓았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이 분야에 대해 낯선 청소년들, 관심은 있지만 적절한 안내자가없어 교향곡이라는 소리의 드라마를 아직 즐겨보지 못한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나는 베토벤 작품을 연주할 때 음악을 가슴으로 포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느낌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크의 작품에는 없는 것입니다. 모차르크의 음악은 어른보다 어린아이가 연주하기 더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차르크의 음악은 타고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타고난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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