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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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흔히 사람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이 왜 더 강한 힘으로 더 직접 개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난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 몇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과거에는 강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오래가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지상의 강국들이 배운 것처럼, 힘과 자유는 껄끄러운 짝이며 하나를 강조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작아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자유 쪽으로 기우신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확실한 답은 모른다. 하나님의 최종 계획을 잠깐씩 언뜻 볼 수 있을 뿐이다. - p347~348,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게 무슨 소용인가'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창조주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그 대답을 구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들 앞에서,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폭력과 살인을 알리는 소식들 속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는 크고 작은 불행이나 아픔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미를 묻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는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가끔씩은 하나님이 악행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눈에 볼수 있게 강력한 징벌을 보이셨으면 좋겠고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셔서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주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끔씩이라도 성경에 나타났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던 기적을 내 가족이나 벗들에게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아마도 신앙생활은 훨씬 더 편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훨씬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젠 그런 모습으로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군대 삼으셨던 것처럼 자신의 육적인 군대를 내세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시지도 않으시고,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셨던 현존하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십니까?' 또는 저자의 질문처럼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그때-구약의 시대-처럼 우리에게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시는 듯이 그리 곁에 조용히 기다리며 지켜보시고 계실 뿐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열 편의 이야기와 강연들 속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얻은 이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아마도 저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런 만남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가 생긴다는 것, 그것이 곧 인격적인 만남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부분은 아닐는지..... 

 요즈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인기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창조주의 존재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서적들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관심을 끌고는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행크 데이비스의 '양복을 입은  원시인' 역시 그런 흐름의 하나를 이루는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보았을 때, 최근의 추세는 과학으로 증명 불가한 미신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의 일부 영역에 국한된 부위가 자극되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일축하는 경향인 듯 합니다. 결국은 영적인 면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남겨진 물질적인 세상에서 종교의 의미를 찾고서는 그곳에는 관련된 흔적은 있지만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증명 가능한 사실은 없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다만 인간의 나약함이나 비합리성, 또는 뇌에서 종교나 신과 관련된 영역이 활성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종교와 창조주의 의미 또는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의 자세로 강요(?)되곤 합니다. 또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부정적인 인종차별, 전쟁과 살인 등을 이야기하지만, 창조주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상을 강요하던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 교회가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 인권을 실현시켜주었고 아픔을 싸메고 더 나은 삶으로 인도했던 이야기들은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버리고는 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해나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했던 총기난사 사건의 치유 등은 바로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를 공격하던 이들에게 대한 믿는 이들의 대답의 일부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를 조용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신앙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저자는 열 가지 사례들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모범이 실천된 곳,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넘치고 은혜와 사랑이 물같이 흐르던 곳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총기 난사의 공포에 떨고 있던 버지니아 공대와 공산 세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흥왕해 가는 중국의 가정교회, 가족들에게서마저 버림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회복 모임과 C.S. 루이스를 삶을 기리던 케임브리지의 모임, 엄격한 규율을 가진 온실 속의 신학교 학생들과 인종차별과 학살의 벽을 넘어 화해를 이룬 남아공의 현장, 지역사회를 섬기는 멤피스의 교회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동의 사역자들, 그리고 시카고의 중독자들의 삶과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삶속에 넘쳐 흐르는 은혜와 사랑,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와 공의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손길..... 바로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깨어 있어서 교회가 '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빚이 더 필요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압제자와 압제받는 사람 모두에게 언제라도 은혜가 흘러나가는 곳, (교회가) 바로 그런 곳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그러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더 많은 대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독자들과 성매매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삶을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악의 위력과 그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수십 편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회의론자들도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한때 밑바닥까지 추락했으나 이제 자기를 구원해 준 은혜가 하나님한테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의 변화의 사연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그분은 나를 성노예와 마약중독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은 내게 삶을 되찾아주셨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삶의 변화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겠지만, 한나절 동안 그런 이야기를 여남은 편씩 듣노라면 이성적인 논거가 곧잘 무색해진다. 예수님은 신학적 '증거'를 제시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열심히 삶을 변화시키셨을 뿐이다. -p345, 에필로그 '하나님이 없는 게 무슨 소용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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